내가 무엇이며 어찌해서 보고 듣는지!
사람은 늙어갑니다. 항상 젊은것이 아니지요. 늙어서 병이 들면 공포감이 옵니다. 여기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그때 떳떳한 정신을 가지려면, 미리 수행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옹골차게 걷어잡는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장소와 시간을 떠나 항상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생에서 가장 거룩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실 때도 ‘이 차를 누가 만들었으며 어디서 왔고, 찻그릇은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면, 모든 인간관계에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귀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수분지족(受分知足)’의 삶이 중요합니다.
불교적 삶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재가불자들은 마음의 근본을 제대로 봐야 모든 것은 반드시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에서 꺼진다는 진리를 깨쳐야 해요. 마치 물거품이 바다에서 일어나 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 등에서 한량없이 일어나는 작용은 마음을 근본으로 해 생멸합니다. 이 이치를 일상생활 속에서 원만하게 잘 굴려야 합니다. 내 마음의 덕을 기르는 도리로, 지혜를 계발하는 도리로 알아야만, 인생 문제가 순탄하게 해결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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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듣고 깨달음에 들어야 가능해요. 그때는 불법을 믿기보다 자기 자성을 잘 가꾸고 깨달아 자신의 본바탕을 본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주의 주인공은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49년간 설법한 팔만대장경의 모든 법문도 이를 위한 것 부처님은 ‘하심(下心)’ 공부를 하기 위해 걸식하며 무진법문을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서 자신을 낮추는 하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남을 존경하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화합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하심은 남을 위해 살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또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는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화(家和), 인화(人和), 세계화(世界和)의 단초가 되는 것이지요. 마음을 항상 단정히 하고 청결하게 하면, 거룩한 이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사대(四大)가 구 족 한 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불자들은 어렵게 인간의 몸을 받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어떻게든 수행해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잘 가꾸고 잘 개발해야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지혜를 잘 닦고,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선구자가 돼야 해요. 그러니 우리는 모든 모습놀이와 물질에 속지 말고, 자성 즉 부처 자리를 어떻게든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을 잘 못 쓰면, 마음자리가 황무지로 변하기 때문이죠. 새카맣게 녹이 슬게 하지 말고,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특히 재가자든 출가자든 ‘이 몸을 끌고 다니는 마음자리 찾는 것’이 본분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영특한 지혜가 있어, 이 몸을 어디로든 옮길 수 있게 합니다. 우주의 모든 물체가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연은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설법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창조됐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법을 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자들의 삶과 수행은 따로 놉니다.
‘불이(不二)법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죠. 어떻게 해야 이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고봉 스님에게 불이법문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래 둘이 아닌데, 어찌 둘이 됩니까?” “어찌 분별하느냐?” “스승과 제자가 둘인데, 어찌 분별을 안 하겠습니까.” “악! 귀도 생기지 않은 것이 사람을 떠보려고 하느냐. 썩 나가거라.” “어디로 나갈까요?”
그랬더니 고봉 스님이 묵묵부답하셨습니다.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나가라’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들어오면 나가는 도리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마도 고봉 스님은 나갈 곳도 들어갈 곳도 둘이 아니기에 침묵하신 것 같아. ‘말없이’ 불이법문의 이치를 알려준 것이지요. 불교란 무엇일까요? 서른 살 때 <석문의 범(釋門義範)>의 대례참례(大禮懺禮)에 있는 글귀를 보고 이 이치를 깨닫게 됐습니다.
불교는 따로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습니다. 항상 ‘회광반조해서 내가 무엇이며’ ‘어찌해서 보고 듣는지’ ‘그 작용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의심하면서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오래오래 하면 어느 순간, 느낌이 옵니다. 근본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인 까닭에, 그 마음을 항상 궁리(窮理)해서 노력하면 반드시 깨달음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