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불법의 요지입니까.
“바로 그대가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곳이다.”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곳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절체절명(絶對絶命) 일 수도 있으며 절대무사(絶對無私)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진정한 답은 없다. 오직 두 가지 공심(公心·空心)이 절실하게 필요할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로서 깨달음의 완성인 빈 마음 공심(空心)과 중생을 요익케 하는 공심(公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때 시공을 초월한 참 지혜를 중생들에게 던져줄 수 있다”고 공심을 강조했다. 수행의 요처는 어디에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공심이었다. ‘공심’에는 진심(眞心)이 함축되어 활짝 열어놓은 문 밖으로는 봄이 재주를 넘듯 풍성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적멸의 공간에 긴 한숨을 채워 넣었다.
“마음은 재주를 부리는 광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며 삽니다 . 바로 그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중생에서 부처로 가는 길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겨우내 방 안에 갇혀있던 난들을 손수 햇볕이 잘 드는 툇마루로 옮겨놓기 위해서다. “이놈들도 말이지 봄을 알아. 바람에 따스한 기운이 묻어나면 햇볕에 옮겨 주어야 해. 다음 해에 핀 난의 향기가 참 맑고 향긋해. 지금이 바로 적기야.” 곧바로 하늘로 쪽 뻗은 난, 땅으로 자신을 길게 늘어뜨린 난 등 대여섯 개의 난들이 제일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졌다. “좁은 공간에서 넓은 공간으로 옮겨졌어도 난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어요. 참으로 절묘한 조화예요. 잘 봐요. 자연의 이법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잖아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말씀이요 부처의 마음입니다.”
세월 속에서도 이름없는 선사들의 부도들은 여전히 그 향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왜 수행을 해야 합니까. 요즘 수행자들은 출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직업이 아닙니다. 또한 근원적으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운수(雲水) 납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분들을 보십시오. 이 분들은 작은 부도탑 하나만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그분들의 수행의 향기가 넉넉하게 넘쳐납니다. 시대적인 병폐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요즘 수행자들은 수행의 첫출발이자 마지막은 집착과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 집착과 소유를 버린 선사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근원으로 돌아가 법신에 나고 죽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의 일발의 전통 그리고 대중공사의 전통, 선농일치의 전통 등 참으로 아름다운 전통들이 선가를 지탱해온 버팀목이었습니다. 이 전통들은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야 합니다. 성철·청담스님 등이 오늘의 우리 선가를 지탱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왔는지 말입니다.” 불교가 시대적 당위성을 넘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불교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불교는 몇 시인가라는 당위론적인 물음에서부터 지금 한국불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깊게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 중생들의 요구에 답을 해야 할 때입니다 . 부처님의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 백척간두의 자세로 모든 수행자들은 절치부심 노력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은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임을 자각케 하는 데 있습니다. 작은 미물에서부터 우주운행의 이치까지 깨달음의 진리는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 지혜 있는 자들의 당연한 행로인 것입니다.
자비란 모든 것을 융섭하고 용서하는 ‘큰마음’이다. 중생심을 이기는 첫출발을 자비는 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