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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현재 사람의 몸을 받아 살고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우리는 아득한 옛적부터 수많은 몸을 받으며 윤회를 거듭해 왔습니다.수백 생 벌레로 살았다가 수천 번 짐승이 되었다가 수만 번 남자로 혹은 여자로부모로 자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무수한 생애를 통하여 갖가지 버릇, 갖가지 용심(用心)을 키우며 살았습니다.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입니까?수많은 생애동안 익혔던 버릇과 용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따라서 지금의 "나"에게는 벌레 때의 행동도 터져 나오고, 짐승 시절의 버릇도 터져 나옵니다.인간으로 살면서 얽히고 설키고 가슴에 숯이 박히고, 서로 해치고 못살게 굴었던 행동과 마음 씀씀이가수시로 바깥으로 표출됩니다.겉모습만 지금의 모습과 같은 사람의 가죽을 덮어..
찰라의 평상심 !!! 망상은 번뇌의 그림자일 뿐, 마음은 얼마나 맑고 고요한 것일까, 우리도 마음이란 게 있지만 깨달으신 분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으십니까?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귑니다. 망울 튼 버들가지는 싱그럽고 시냇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갑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들은 봄나물을 뜯고 있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런 광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이 있으면 물을 보고 꽃이 있으면 꽃을 본다는 것. 이게 바로 空寂靈知입니다. 이 자리가 本心의 자리인 참 마음인 것입니다.(있는 그대로 보아야)산에 올라가서 연 초록색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듣고, 흘..
일체사 일체처 일체심, [살필 수 있는 마음] 좌법을 익혀놓으면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에서 습이 되어 버리거든요. 생활에서도 해야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막연한 수행관이 자기한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고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부처님 당시 수행법을 모아놓은 을 보면 행주좌와가 다 공부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일체사 일체처 일체심, 일체 어느 곳에 어느 때 있든지 모두 수행 꺼리라 했습니다. 내가 번뇌가 일어나면 일어난 줄 안다, 또 번뇌가 계속되면 계속된 줄 안다, 번뇌가 멈췄으면 멈췄음을 안다, 번뇌가 멈춰서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지 않는 줄을 안다,순서가 번뇌가 생겼고 있다가 없어지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번뇌가 일어나서 선정경지에 들었다. 번뇌가 있는 것이 점점 없어져서 없는 것이 목적으로 ..
스스로 완벽한 존재 확인하는 공부[염불선] 공부 길은 바로 차 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뗏목입니다. 공부 길을 정함에 있어서 가장 고전적인 것으로는 부처님 당시의 팔정도와 삼학, 대승불교 시대의 육바라밀을 그 표준으로 해야 바람직합니다.이것들을 참고로 해서 자신에게 맞는 공부 길을 정립해야 합니다. 공부 길은 일단 간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화두 하나면 된다, 혹은 아이타불 하나면 된다는 식으로 너무 간단한 공부 길을 갖는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공부 길은 간단한 것이 좋으나 너무 간단하다는 것은 너무 건조한 것일 가능성이 있고, 복합적인 마음을 다 아울러 다스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간단하되 너무 간단하지 않게, 복합적이되 간단하고, 간단하되 복합적인 길이 중도라고 생각합니다.불성(佛性)과 불성을 가리는 번뇌(煩惱)..
참회! 과거로부터 지어온 잘못은 물론 현재 생활하는 가운데 지은 모든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또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부처 앞에 고하는 것을 참회라고 합니다.다른 종교에서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불교에서는 특히 참회를 중요시합니다. 그것은 계(戒)란 타율적인 규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것이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거니와 자신마저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먼저 참회하고 나서 자신의 원을 세우라고 가르칩니다.불교에는 두 가지의 참회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름과 그믐에 대중(스님)이 한 곳에 모여 계경(戒經)을 다시한 번 공부하면서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잘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를 대중 앞에서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을 포살(布薩)이라고 합니다. 일반..
만물은 홀로 살수 없다 업의 숙명을 슬기롭게 따라가야 하며 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은 만남과 인연의 연속입니다. 좋은 사람만을 만나서 선연(善緣)을 이어가고 싶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지금의 인연은 전생의 업력에 따라 생깁니다. ‘인연과 근기에 따라 산다’고 했듯이 자신의 근기도 훌륭해야 좋은 인연을 엮어갈 수 있습니다. 인연이라는 말에서 인(因)이란 자기 인자 즉 자신의 근기이니 이것이 업이고, 연(緣)이란 여건이요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연은 자신의 업과 주변 환경이 맞물려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인연을 잘 성찰해 보면 연기법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고 하지 않았습까? 연기법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보리심으로 기도해야 공덕이 쌓인다 살다보면 누구나 뜻밖의 기회가 찾아오고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거짓말처럼 복잡했던 일이 술술 풀리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기도 하니까요전생에 복을 많이 지은 덕분입니다. 반대로 다 되어가던 일이 뒤집어지고 훼방꾼이 나타나기도 합니다.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탓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은공을 전생에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나쁜 일의 원인만큼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거든요. 그래야 성찰이 가능하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통찰력이 생깁니다.그로 인해 살아온 길을 반추하며 잘잘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귀인의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습니다.이는 그를 찾아가 은혜를 갚는 ..
자신의 그림자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지혜자인지를 분별을 하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판단을 합니다 성실하고 착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분명히 다름에도 그런 선해 보이고 깨끗한 모습을 보고 지혜자라고 판단을 쉽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려하지 마세요 너무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것을 보려하는 것은 깊은 바다 위에서 마치 그 속에 무엇이 있나 보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볼수도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입니다 내가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다음 세대를 우리가 염려할 것이 ..
마음가짐!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 정녕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가? 앞에서 꿈같은 인생, 불타는 집 속에서 사는 인생, 사대(四大)로 구성된 이 몸의 노예가 되어 사는 인생을 이야기할 때 은근히 답을 밝혔지만, 그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다. 애착을 비우고 소유욕을 비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무소유의 정신을 기르고 무소구행(無所求行)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곧 구하고 소유하려고 하면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구하고 더욱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사람도 내 사람, 물질도 ″나″의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나″쪽으로..
공덕 창고 비었는데 행복 바라는 건 잘못 공덕 창고 비었는데 행복 바라는 건 잘못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라 하더라고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죄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을 바라지만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뿌린 씨앗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씨앗, 큰 씨앗을 뿌린 사람은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작은 씨앗을 뿌린 사람은 작은 행복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인과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밤잠을 안 자면서 열심히 공부한 사람과 놀 것 다 놀고 잠잘 것 다 잔 사람이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본다면 누가 더 잘 보겠습니까? 당연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둡니다. 노력이라는 씨앗을 더 많이 뿌린 사람이..
본래 마음 허공과 같은 본래 마음 1} 우리들이 우선 생각을 허공 같다고 하는 (허공이 내가 허공 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을 비유하기를 허공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허공을 비유해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허공 안에 우주가 건립되어 있고, 우주 그 안에 지구가 있다 하고 지구 가운데 만물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공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입니다. 이 허공과 같은 큰 마음이 본래의 마음인데 거기서 바깥의 허공 가운데 지구라든가 지구를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태양을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아니면 어떤 별을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이렇게 그 허공 가운데 있는 어느 부분 하나를 붙잡아서 자기라고 매달릴 것 같으면 물론 자기가 아니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착각입니다. 그 가..
공짜바라지 말고 나눔의 복밭을 일구세요 발원! 불 보살님에게서 빛과 에너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불보살님은 우리 중생들에게 끊임없이 빛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계십니다. 불보살님의 무한한 에너지를 오롯이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바로 ‘발원’과 ‘참회’ 말입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에게 빛과 에너지를 입는 것을 가피라고 표현합니다. 가피(加被)란 말 그대로 더함을 입는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을 단순히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원을 세워 실행하고자 노력하되 불보살님의 도움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능동적인 원을 세우되, ‘~해주십시오.’하는 식의 구걸형이 아니고, ~하겠습니다. 하는 식의 발원형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아주 힘들 때, 혹은 아직 어릴 때는 ..
백수가 되어 죽도록 빌어도 공염불! 진실된 마음이 아니면 백발이 되도록 앉아 있어도 무소득 진실된 마음이 아니면 백발이 되도록 앉아 있어도 무소득, 우리가 일생 동안 참선을 해도 안 되는 원인은 간절한 일념(一念)에서 구하지 않는데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앉아있으면 온갖 쓸데없는 궁상, 망상에 시간을 다 빼앗기고 결국, 허송세월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결정코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일념으로 화두를 참구 할 것 같으면, 시간이 흘러도 흐르는 줄을 모르고, 옆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며,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것까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직 화두 한 생각뿐입니다. 그 한 생각, 화두일념(話頭一念)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될 것 같으면 천 사람만 사람이 다 진리의 눈을 뜨게 되는 법..
불에 타는 법과 타지 않는 법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의 일이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모아놓고 불에 타는 법[燒燃法]과 불에 타지 않는 법[不燒燃法]에 대해 말씀하셨다. 첫째 불에 타는 법이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계를 범[犯戒]하고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악행을 저질렀다면 뒷날 그는 병석에 누워 온갖 고통을 받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육신의 고통아 아니라 자신의 악행에 대한 기억이다. 평소 자신이 지은 갖가지 악행이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이 임종을 맞이하는 영혼에 낱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臨終悉現]. 마치 해 질 녘이 되면 큰 산의 그림자가 드리우듯 [譬如大山 日西影覆], 악행은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절망과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악행을 범할 때는 거리 김 없이 했겠지만 인과관계는 손톱..
발심[결심]! 우리의 수행 결심이란 말은 결정적 마음이라, 가히 해야 될 일에 대하여 결코 한번 해보겠다는 마음이니 다시 말하면 곧 용맹심, 정직심, 견실 심이다. 이 마음을 일으킨 자는 일의 크고 작고 간에 모두 이루어 냅니다. 용맹심에서 나온 것이 옛 조사 성현들의 정진과 고된 수련을 다 들 수가, 이와 같이 그 참기 어려움을 능히 참고 실행하기 어려움을 능히 실행하셨는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고대광실에 잠만 자고 무명업식(無明業識)에 푹 취하여 분발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가. 세상에서 사소한 기술직 한가지를 배우더라도 성의가 없으면 교묘한 경지에 이르기 어렵거늘 위없는 대도를 구하려는 수행자 가인이 어찌 결심이 없이 성공할 가망이 있으리오. 대도는 그만두더라도 사업과 공명을 구하더라도 영웅호걸이라도 다..
업장[과보]은 외상도 없다 업은 외상도 에누리도 없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들 사이에서 보기에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많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인간은 누구에게나 부처님의 종자인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배부르고 몸편한것 입니까. 거기다가 맘도 편하면 더욱 좋겠고. 그러나 아닙니다.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완성인 성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살게 해 달라”는 기도는 “어서 성불하게 해 달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어쩌면 세속과는 다른 출세간의 스님이나 하는 풀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런 자세의 기도가 옳고 그름을 떠나 좋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불교의 핵..
마음의 벽 마음의 벽을 허물어라. 사람의 행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있다. 다시 말해 마음 마음이 통하는 정신적 소통공간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상대가 없는 혼자만의 마음에는 행복이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 인간이 혼자일 때는 항상 고독하고 외로움의 슬픔이 그림자처럼 따르게 마련이다. 다만, 고도의 명상세계(冥想世界)에서 자기의 근원적 정체성을 찾는 공부에 있어서는 주관과 객관을 초월해 버리므로 행(幸)과 불행(不幸)을 다 함께 뛰어넘는 수도 있다. 보통의 일상적 생활감정은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 스스로 답답해지며 불우해지기 시작한다. 모든 불화는 마음과 마음의 사이가 좋지 않은 데서 조성(造成)되는 것이다. 또 불화(不和)란 개개인의 비위가 서로 상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비위가 상하는 원인은 나와 상대..
고정관념!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 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
어묵이 마음이다 우리의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것은 그대로가 허상입니다. 이 허상이 바로 허깨비입니다. 허깨비이기 때문에 거품 같고 안개 같고 구름 같고 연기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무한 것입니다. 이 허무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산다는 것 자체가 일장춘몽입니다. 즉 거북이의 털, 토끼의 뿔입니다. 여기에는 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현실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지 현실을 벗어나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산승이 하는 말 모두가 거짓입니다. 그러나 거짓 가운데 진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법입니다. 이것은 허무한 말과 뜻과 생각이 아닙니다. 도를 이룸으로 법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말로써는 절대로 깨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도는 선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법이다, 선이다, 도다, 하..
나눔의 밭을 일구세요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나누며 살고 있는가를 돌이켜 보고, 자신의 깊은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전율과도 같은 삶의 의미를 느껴 보세요. 오늘도 여러분은 부처님 앞에 몸을 숙여 3배를 하며 무엇인가를 빌었을 겁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여러분이 부처님께 빈 것은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란 것. 여러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법 하나를 제시할까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불교는 인과(因果)의 종교입니다.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간단한 원리가 바로 인과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만 잘 파악하면 최고의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훌훌 나뭇잎들을 떨구어 내는 저 가을 나무들을 보고 ..
흘러가는 물처럼 마장과 싸워이겨내라 우리는 세세생생 버릴 줄 모르는 집착의 세계에서 살아왔습니다. 『능엄경』에는'오십종변마사(五十種辯魔事)'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색 · 수 · 상 · 행 · 식 5 온의 각각에 해당되는 열 가지씩의 마구니의 일을 곱하면 오십 종 변마사가 됩니다. 곧 쉰 가지의 마구니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 일상생활이 전부 여기에 해당됩니다. 심지어 머리를 깎고 절에 계시는 큰스님들이나 큰 절의 조 실 스님이라도 이 오십 가지 마구니의 장애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능엄경』에서는 무섭도록 마장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밝혀놓았는데, 그것들은 과연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이 마구니 모두가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내 부모,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가 지워진다는 것은 있을 수..
마음에 뿌리! 뿌리에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 깊이 사유해 보세요 " 뿌리에 독이 있다면 나무 가지나 열매, 잎에도 독이 있고 뿌리가 약이라면 가지나 열매, 잎도 약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면 반드시 보리심 (모든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위한 마음으로 그 마음을 성취하기 위해 중생에게 이익을 먼저주는 마음)을 내어야 하며 나와 가족의 다음 생 축복을 위해 선행하고 기도하면 해탈은 못해도 다음생에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생에서의 행복과 재산을 모으기 위한 기도를 한다면 이 생에서 약간의 행복이 있더라도 다음생에는 삼악도에 떨어질 수 있다고 하셨다. 온 중생의 이익을 위한 ..
얻는 공부 아닌 걷어내는 공부! 야들아! 무엇을 얻고자 예까지 왔는가? 그 이유는 인간이 그 자체로서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빈부귀천과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누구나 부처님의 생명을 지니고 이기에 더 이상 보테가 뺄 것이 없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우리의 순수한 본성은 본래 맑고 깨끗하다. 허공처럼 푸르고 한계가 없다. 그런데 망상과 잡념이 그것을 덮는다. 무수한 생각의 장막이 밝은 생명의 숨소리를 막아버린 밝은 태양을 구름이 덮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나친 욕심과 헛된 망상만 비우고 쉬어준다면 우리는 내 안에 파릇파릇 숨 쉬고 있는 생명의 숨소리를 듣게 되기 마련이다. 마음이 쉰 사람이 좋은가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사람이 좋은가. 당연히 마음이 쉰 사람이다. 마음이 여유롭고 한가하여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 마음이 ..
초로의 방황을 끝내고.... 내 어린 날은 참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생각만큼이나 뜻 모를 방황도 아울러서였을 것이고, 비행 저지를 소년될 용기도 없었고, 턱없이 감상적인데다 대책없는 시절이었다. 그럴 수밖에. 너무 어린 날 맞았던 그것은 한 소년을 생각 많고 우울한 시절로 만들어 갔다. 이 때 이미 한생의 계산서를 다 작성해버린 셈이 된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았는지 간다던 날짜에 이틀인지를 넘겼던가. 그 때서야 용기가 났다. 그러나 걸어야 할 수밖에. 몇 십리 길을 한나절인가를 걸었다. 동구에 이르렀을 때는 마을 집 아궁이에 생솔가지 쪄다 저녁 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피어오르고,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아픔이 인 것도 그 때였다. 모를 세상으로 향하는 두려운 마음이 그리움을 더욱 사무치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왜 두..
새는 그릇은 아무리 채워도 ( 생각일 뿐)... 내가 있다면 맘대로 되는 게 있어야 변하지 않는 게 있어야는데 전혀 안 그래 어느 게 나? 깊이 보면 무아 구함이 없는 걸 구하면 그 역시 속박 구하지 않는 해탈한 여래의 생활 보니... 반야바라밀 몸은 파초와 같다 알맹이 없고 허깨비 같고 생각은 허망해~~ 아지랑이 같아 깨닫지 못하면 붉은 고깃덩어리 무상, 무아를 철저히 느끼고 철저히 부수고 수행해야 망상 덩어리를 녹여야 성불~ 쓰레기 더미에서 금은보화를 얻는다! 반야를 얻으면 악몽에서 깨어나듯 일절의 걱정 근심에서 벗어난다 지혜를 얻고 나면 내 문제는 일체 없어 자비뿐.... 무상을 느끼고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도 닦을 이유 없어 공덕 심는 이 흙더미에서 보물케는 것 몸은 사라져도 공덕은 남는다 윤회 바로 봐도 끝도 없어 순간순간 나를 잃는 ..
인연 ! 남에게 먼저 받지 말고 먼저 베푸는 삶으로 찾아가세요 부처님 가르침을 펼치면 8만 4천 법문 또는 그 이상 펼쳐지는 것처럼, 번뇌도 펼치면 8만 4천 번뇌 또는 그 이상 펼쳐집니다. 그 많은 번뇌는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 중심이 되어, 이 어리석음에 의해 온갖 번뇌가 함께 일어나 고통의 바다에 생사윤회합니다. 이러한 무명을 중심으로 번뇌를 펼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인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펼쳐지고, 더 나아가 탐(貪)[탐욕], 진(瞋)[성냄], 치(癡)[어리석음], 만(慢)[자만], 의(疑)[의심], 악견(惡見)[그릇된 견해] 등 6가지 근본번뇌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더 많은 번뇌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보통 번뇌에 대해 널리 알려진 말로는 ‘백팔번뇌’가 있습니다. 글을 ..
가을날 사색의 길.... 그림자가 끊긴 자리!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전부 생각의 흐름, 한 생각도 없이, 그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 생각도 안 한다 해도 보통 중생의 세계에서는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을 가지고 안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다 쉬어버리지 못한 것이고 텅 비웠다 해도 비웠다는 생각 역시 하나의 생각이거든요. 결국은 우리의 생각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자꾸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좋은 경계가 오고 기뻐할 때는 좋은 줄은 알지만 그것은 금방 꿈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또 어떠한 생각이 대신 밀어닥쳐 연신 붉은 생각, 푸른 생각, 흰 생각 온갖 생각이 난다 그 말이지요. 기쁜 생각 덤덤한 생각, 사랑하는 생각, 미워하는 생각, 질투하는 생각, 온갖 생각이 자기의 부처를 가리고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무지한 사람은 기도해도 복을 짓지 못한다! 일 심!! 우리의 마음은 본래 희고 밝은 것이기에 염불도 필요 없고, 참선도 필요 없고, 마음공부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잖아요. 쓸데없는 잡념, 번뇌, 망상, 좋지 못한 貪瞋痴, 三毒을 일으키지요.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절실히 해야 하고 생각을 완전히 비우기는 어렵지만 생각을 좋은 쪽으로 돌이켜 염불수행으로 정화시키기는 어렵지 않아요. 오직 일심으로 염불 수행하면 업장도 소멸되고 질병이나 고통에서 다 벗어나서 염불에만 마음을 두면 정신이 집중되고 정신이 집중되면 정신통일이 됩니다. 정신이 통일이 되면 참선해서 깨우치는 것과 같고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염불수행이 어째서 좋으냐 하면 참선은 자기 힘으로만 하는데, 염불수행은 자력도 필요하지만 타력이 더 많이 증가되지요. 항상 자나 ..
於事無心 於心無事 행동의 무위! 문제가 생기면 삶은 우리의 행동에 그 답을 묻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하고 그러나 결과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반문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지? 그러나 우리가 부딪치는 삶의 문제는 포기할 수도 없고 풀지 않을 수 없기에 풀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 존재를 제약하는 필연성이 모든 당위(當爲)의 근본 우리는 살아 있는 동물인 까닭에 행동을 전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용된 선택의 자유는 행동과 비행동(非行動)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행동 사이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는 행동할까 행동하지 말까 하는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그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은 행동을 전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달리 행동하겠다는 판단인 ..
법 거 량 육신의 땀 옷을 벗어던져 마칠 것 같으면 바야흐로 봉과 활이 또한 우치함이 앎이로다 확연한 본체는 허공과 같음이니 이 가운데 이 소식을 아는 이기 누가 있으리오 어디서 그 소식을 얻었느냐? 자신의 허물에서... 아인슈타인은 “허공을 본 사람은 석가모니 여래 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양 허공을 허공으로 잘못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허공 자체는 변함이 없다. 마음 부처가 그와 같은 것이다 허공은 깨달은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은 깨닫고 보면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나와 네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집에도 벽이 있으니 이 방, 저 방, 아랫방 있는 것입니다 이 벽 다 허물어 버리면 저의 집도 없고, 허공이 되어 버리지요 그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