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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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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이 생사의 갈림 길! 한 호흡지간에 달린 생과 사 우리의 생과 사는 한 호흡지간에 달려 있어요.숨 한 번 들이마셨다가 못 내쉬면 죽는 겁니다. 이승에 산다고 하는 것은 저승에 사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요. 딴 데 가는 것이 아니에요. 얼마 전 제주도의 마지막 해녀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참으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여든이 넘은 해녀 할머니의 말씀이 법문처럼 들렸습니다.바다는 딴 세상입니다. 이승과 다른 것입니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생사를 담보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러한 저승에서 돈을 벌어서 이승의 삶을 산다고 말했습니다. 저 바다가 저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를 부정하고 외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가는 것입니다. 바다가 죽음과 고통을 주더라도 그..
문은 이분법적 규정에서 나와야 집이나 방으로 들어서려면 문을 통과해야 한다.사찰 법당에 들어서려면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이 쭉 들어서 있다.부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 열반과 행복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문이 법문(法門)이다.그런데 정말 정해진 어떤 문을 통과해야만 그 세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일까?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선(禪)에서는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는 문이 없다고 한다.법문(法門)은 무문(無門)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그 이유를 물은즉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는 “문을 통해 들고 나는 것은 잡스러운 것들이요,인연을 통해 얻은 것은 마침내 부서지고 말 것이다.”라는 옛사람의 말을 든다.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뭐 문을 통해 찾고 들어설 일이 이겠느냐는 말이다.문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인데 그것으로 통해 ..
청정한 참마음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 마음일 뿐 거기에는 어떤 법도 없다. 이 참마음은 본래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고 예전과 지금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바로 그 상태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별심을 내고자 하면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다. 끝이 없으며 재볼 수도 없다. 이 한 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본래 부처인 참마음 자리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탁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 구족[圓滿具足]하여 모자람..
스스로 다가온다 깨달음은 자기를 찾는 공부. 자기를 돌아보는 공부. 마음자리 주인공을 찾는 공부. 이 공부는 마땅히 평생을 두고 해야 할 공부이다. 조금 해보고 잘 안된다고 해서 나약해지거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순간이 더욱 중요하다. 앞서 도를 깨달은 무수히 많은 분들을 생각하며 용맹심을 일으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많은 옛 스님들은 후학들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보지 못하였는가? 역대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옛날에는 우리와 같은 범부였음을! 저도 장부요 그대도 장부. 다만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 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이 말씀을 다시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이미 지난 세상에 도를 이룬 분들을 살펴보라. 모두가 그대와 다를..
心眼 心眼으로 보세요!껍데기로 들으면 쭉정이만 남을 뿐, 오로지 자신의 혼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흙탕물 같은 소리를 내가 참마음으로 듣는 순간에 청정수로 변하는 이치 세상의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은 지혜를 얻지만, 필요한 소리만 잘 듣는 사람은 편협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과 음욕에 시달리는 이유는 육체의 귀로 듣기 때문, 참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귀를 막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모든 소리는 참생명의 깨달음의 소리로 들립니다. 이것이 참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깨달음의 가장 유익한 방법은 들어서 깨닫는 것, 나를 비방하는 소리도 귀로 들으면 화나고 괴롭지만 나의 참마음 자리에서 들으면 나를 완전히 해탈시키는 위대한 반야선에 오르는 것이지요. 항상 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네모..
팔풍부동 八風不動 {1} 우리 인생은 팔풍경계(八風境界)에 흔들리면서 여덟 가지 좋고 나쁜 현상과 접하는 일이다.나를 이롭게 하는 이익(利)과 늙어가고 기울며 나에게 손해가 가는 쇠(衰)의 바람,나를 헐뜯고 비방하는 훼(毁)와 나를 기리고 받드는 예(譽)의 바람,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칭(稱)과 나를 나무라고 꾸짖으며 비난하는 기(譏)의 바람,나를 괴로움에 멍들게 하는 고(苦)와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하는 락(樂)의 바람이 그것이다.이렇게 우리는 좋고 싫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얻고 잃어버리고, 만나고 헤어지고, 편하고 괴롭고, 기쁘고 슬프고 등의 여러 가지 경계에 접하면서 파도에 흔들리는 나룻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간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면서 산다는 점이다. 경계를 나누는 것도 부족..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삼재가 없어요 “놓고 가는 데는 이유 없이 무조건 이어야죠” - “내 할 일 다 하고 내 가정 지키고 부모도리 다하며 자식도리 다하는 게 곧 회향이고 불사입니다”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뀝니다. 물론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도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 중 세계의 사람이 사는 데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달력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살아가시면서 한번 더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을 스스로 개선시키도록 다짐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말씀드리기를 모든 것은 자기 주처에서 하는 것이니 바로 자기 주처 를 믿으라고, 주처라는 것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 자 부처도 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야 뭐라고 부르든 어떻겠습니까마는 굳..
참선법!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진실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해 봅시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일은 쉽기로 말하면 참으로 쉬운 일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기로 말하면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육신, 즉 감정의 덩어리로 된 몸뚱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성을 내달라고 하면 화를 불같이 내주는 등 감정이 해달라는 대로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사는 시간이 많지, 참마음이 주인 되어 행동을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팔만사천 번뇌 모든 욕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망상번뇌가 우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내 ..
좋은 힘!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힘이 있습니다 "이타심" 이 그거예요 상대를 이익되게 하려는 힘! 반대로 이것의 장애는 안타깝게도 "이기심"이 있어요 예를 들어, 내 주관을 내세워 상대를 무시하거나 또는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한다면 그들도 역시 이기심으로 나를 그렇게 대할 거예요 그랬을 때, 나도 그 일이 신경 쓰이고 그들이 이해 안 가고 힘들잖아요 그렇듯 상대도 그렇게 힘들어 할 수 있겠구나.라고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내가 힘들듯이 말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잘 살려 상대에게 이익을 주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결국 내 이익이 되돌아옵니다 나를 인정해 달라며 고집을 부리며 "저 사람은 왜 그러지? "라고 하기 전에 저렇게 하는 저 사람의 고집과, 그것이 맞다 틀리다고 주장하는 내 고집이 큰 차이가 ..
비워야 채워지는 섭리 올 때에 빈 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 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잊고 산다. 죽음이 임박해서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기 전까지는 이 엄연한 진리를 망각 속에 묻어둔 채로 지낸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그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고 데려갈 수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아끼고 집착하고 목말라하면서 산다. 소꿉장난하는 아이들과 같다. 해 질 녘이면, 다 버려두고 뿔뿔이 흩어질 텐데 땅뺏기 집 짓기에 열중하는 아이들과 같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무지만도 못하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독이다. 결코 같이 갈 수 없음을 알면서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가령 저 진시황처럼 미이라가 되어서라도 내 재산 내 사랑 내 명예 내 권력을 지키겠다고 생사람과 황금을 무..
염불공덕! 우리 중생들은 살아가면서 입만 떼면 업(業)을 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업을 소멸하거나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이란 말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도 드문데 말이지요. 그러면 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뭐라 그럽니까. “나는 왜 이리 전생에 지은 업이 많은 것일까?” “업장이 얼마나 두텁길래 이리도 일이 안 풀리는 것일까” 등과 같은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대체 업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이 업이라는 말의 어원이 본래 우리말이 아니거든요.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인데 이것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한..
모든 문제의 발단은 ‘나’ 살기 위해 불교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죽으려고 해야 됩니다. 죽을 사람은 절에 발을 들여놓고, 살고 싶은 사람은 절에 발을 들여놔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가르치며) 요거 없애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데도 ‘나’라고 고집하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불교인의 자격이 부여됩니다. 여러분은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합니까. 절이라는 공간은 부처님께 절을 하거나 불공하거나 제사지내거나 기도하기 위해서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응어리를 없애기 위해 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응어리가 있을 때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사회가 화합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릴 때 여러 분의 가슴에 응어리..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행위의 씨앗, 오늘날처럼 격동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큰 방황 속에 동요하고, 실상을 등지며 현상에 따라 움직이는 행복과 명예를 무조건 소유하려고 하는 미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결과는 자기 스스로가 심어놓은 종자의 결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기복에만 정신을 소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갖는 특징 중에 하나가 내적인 수행으로 바른 마음을 갖는 데 있다고 할 때, 오직 이기적 요구만을 내세워 기도하는 것은, 이 타행을 가르치신 부처님의 본 뜻과는 멀리 떨어진 어리석은 수행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불교를 자신들의 안일한 삶의 행복과 기쁨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기원하고 소원하는 기복 신앙에만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자로는 생사해탈 못 구해 어느 학인이 묻길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이십니까”하니 선사가 대답하길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무연자비의 화신이라” 하셨습니다. 무연자비란 무엇입니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애욕과 집착에 의한 사랑이지만, 부처님이 중생을 사랑하는 것은 무연자비입니다. “중생이 원하는 바가 있어 내 명호를 부르면 그 소리를 들어 다 성취시켜 주겠다”는 것이 관세음보살님의 원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합니다. 지혜로써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관조하여 중생의 능력과 성격에 따라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관세음은 사바세계 중생의 괴로움을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조는 중생을 사바의 고해에서 건지고자 하는 서원에서 나왔으므로 대비의 승자, 구세..
존재와 삶!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육신과 생각은 하늘과 땅이 열린 아득한 태초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부모님들께서 혼돈 속에서 이름 모를 생명체로 시작하여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며 진화하고 지혜와 사랑과 행복을 깨달아 물려주고 물려준 위대하고 숭고한 유산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세상을 살 수 있음을 우리들의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과 끝없이 이어지는 부모님들께서 마음을 육신과 생각과 함 몸으로 잉태하고 잉태하여 낳고 낳아주신 은혜 덕분입니다. 마음이 존재와 삶의 주체로서 그 공덕이 아무리 높다할지라도 사람 세상에서는 사람으로 낳아 사람세상을 살게 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는 결코 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비록 존재와 삶의 주체로서 감각, 언어, 행동 등 존재와 삶의 모든 능력을 갖추 어으나 육신세..
(照顧脚下)늘 자신을 돌아보세요! 산사에 가면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라고 쓰인 주련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밑을 살피라’는 뜻이지요. 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금, 자기의 존재를 살펴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스스로 살펴보라는 법문입니다.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당나라 때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이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일찌감치 온갖 경전에 통달한 분이라고 해요. 하지만 많이 아는 것이 말재주나 늘릴 뿐 마음을 깨치는 데는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승을 찾아다닙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마조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 선지식을 만나니 평소 늘 의문인 것을 묻습니다. “입만 벌리면 부처가 어떻고 보살이 어떻고 하는데 ..
“我” 허수아비와 같은 “我”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지혜자인지를 분별을 하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데도 마치 아는 것처럼 판단을 합니다 성실하고 착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분명히 다름에도 그런 선해 보이고 깨끗한 모습을 보고 지혜자라고 판단을 쉽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보려 하지 마세요 너무 알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것을 보려 하는 것은 깊은 바다 위에서 마치 그 속에 무엇이 있나 보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입니다" 입니다 내가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
자비로운 신심! “뭔가 새롭게 해야겠다” 발심하고 실천합시다 “혹한의 추위가 없으면 저 눈 속에 핀 매화가 어찌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향기를 얻겠는가” 설중매(雪中梅)가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얻기 위해서 혹한의 겨울을 견뎌내듯이 우리 중생도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이것을 절집에서는 발심(發心)한다고 합니다. 뭔가 새롭게 해야겠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 해서 새롭게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입니다. 발심하기까지가 어렵다고 했어요. 마음을 내고 각오만 가지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며 편안이며 안락함을 전부 이룰 수 있어요. 그렇게 발심을 했건만 아직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처음의 발심을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번 겨울이 몹시 힘들 겁니다. 추위도 추위지만 구조조정에..
위대한 가피! 미친 듯이 정진하면 무한 가피 열린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달이 지구를 도는 것, 그리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 등은 상호 간에 별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공부한 사람들이 이들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왜 기도를 해야만 하는가? 법칙을 공부한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고 달이 돌고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모두 중력의 법칙임을 이미 알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만유인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존께서 게으르지 말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나아가라 하신 이유 역시 끊..
수행자로 살아가기! 세상의 향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을 무얼 그리 탐하며, 한 번 참으면 두고두고 즐거울 텐데 어찌 닦지 않는가? 학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재산을 모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로다. 끊임없이 변명하면서도 어찌 그리 탐착 하며, 다음 다음하면서도 애착을 끊지 못하는구나. 당장 할 일은 한이 없는데도 헛된 일을 버리지 못하며, 끊임없이 핑계를 대면서 끊을 마음은 내지 않는구나. 오늘만, 오늘만 하면서 나쁜 짓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은, 내일은 하면서 착한 일하는 날은 별로 없으며,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은 또 다가오는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시간은 촌각으로 흘러 어느새 하루가 되고, 하루는 이틀로 흘러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은 두 달로 흘러 문득..
무기 두 가지 무기! 1) 자유 의지의 가치 인간은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그 실례로 든다. 아울러 신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자재하고 전지전능하다는 불사의 신은 자살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는 자유자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자유 의지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지 않고, 실제로는 자살을 예찬하는 데로 귀결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자살은 무가치한 자유 의지이다. 자살이 자신의 과거를 일소해 버릴 수 있다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이루어질 수는 있겠지만, 기대하는 결과를 ..
인생은 나그네 길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형제와 한 가족이 되어 사는 것도 한 편의 여행길이요, 성장한 후 사회인이 되어 생활하는 것도 역시 한 편의 여행길이다. 사람에 따라서 짧고 긴 인생길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한평생 산다는 것도 나그네의 여행길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기에 인생길이 짧던 길든 간에 나그네의 여행길은 즐겁고 기쁘며 뜻깊고 보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행길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길이 남아야 한다. 그럼 정처 없는 나그네인 인생길이 즐겁고 보람되려면 어떠해야 할까? 첫째], 여행길은 열린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봐야 한다. 가득 찬 그릇엔 물이 넘치듯 주관적인 고정관념이 강하고 이기적인 습성을 지닌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치 색안경을 쓴 사람이 어떤 사물을 보고서 자기가 본 것만이 옳다고 주장..
어둡고 우둔함이 곧 밝고 총명함도 아니다 “어둡고 우둔함을 능히 알 수 있는 그것은 결코 어둡고 우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어느 곳에서 초월하고 깨달을 것을 찾겠습니까? 지식인이 이 어둡고 우둔함에 의지하여 들어가야 만약 어둡고 우둔함에 집착하여 스스로 나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고 여긴다면 어둡고 우둔함이라는 마귀에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대개 평소에 지견(知見)이 많으면 깨달음을 찾는 마음이 앞에서 가로막기 때문에 자기의 올바른 지견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도 역시 밖에서 온 것은 아니며, 또한 별다른 일도 아닙니다. 다만 능히 어둡고 우둔한 것을 알 수 있는 주인공일 뿐입니다.” 어두우니 밝으니 우둔하니 총명하니 하는 것은 이미 사념(思念)에서의 일이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알고 우둔함을 우둔함으로 아는 것은, 밝음을 ..
자비로운 관세음 . “천룡팔부 신장들이 자비로 보호하고, 백천 삼매 속히 닦아 성취하고, 가없는이 몸은 밝은 빛이 깊게 되어, 가이없는 이 마음은 신통력을 감추는 곳, 번뇌 티끌 모두 싣고 고통바다 건너서 방편문을 넘어서 깨달음을 얻겠네. 자비로운 관세음께 귀의하여 원하오니, 모든 진리 얻게 하고 지혜 눈을 얻게 하여 모든 중생 제도케 하옵소서. 자비로운 관세음께 귀의하여 원하오니, 반야심을 발하게 하고 하루 빨리 고해바다 건너가서 계·정·혜를 빨리 얻게 하고, 하루빨리 법신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할 때 언제나 외우는 천수경의 일부분을 약해서 풀어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천수경을 항상 독송하면서도 근본 뜻은 마음에 새기지 아니하고 외우기만 합니다. 아무리 좋은 부처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루라... 이 거룩한 말씀은 늘 나의 마음을 흠뻑 적셔줍니다. 나날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일상을 도리어 더욱 값진 행복으로 되돌려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날이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나아가는 일상이 늘 걸림 없이 뻥 뚫리길 바랍니다. 그러다가 장애가 올 때 한없이 괴로워 하고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며 때로는 크게 좌절하기도, 포기하기도 합니다. 장애가 바로 부처이며 괴로움의 경계가 바로 부처되는 경계임을 알지 못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 그러나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준다고 하면 덥석 붙잡을 수 있을까요. 남들은 다 늙어 가는데 주위는 모두 변해 가는데 나만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늘 그대로 생생하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친구들이며 사랑하는 여인이며 부모님 모두가 늙어 가는데 홀로 젊음을 즐..
마음의 집착! 마음의 집착! 탐욕은 인간을 미혹한 삶으로 이끌어 수행을 통해서만 ‘탐욕’ 씻어낼 수 있다 ‘욕망을 최고의 반려로 삼는 사람은 오래도록 미혹의 세계를 헤맨다.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며 미혹한 생을 되풀이 할 수밖에, 그래서 이 미혹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은 탐욕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알아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 인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탐욕으로부터 오는 속박이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휘몰아 이로 인해서 인간을 미혹의 생으로 떠돌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나는 탐욕의 마음보다 더한 속박을 보지 못했다”고 이는 탐욕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을 악하게 만들고 미혹의 세계로 이끈다는 것을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다. 이 ..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마세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라!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종교가 불교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불과 1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는 불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극성스럽게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옥’을 외쳐대고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설치고 다니고 있습니다. 워낙 기복적인 종교이다 보니 귀가 얇고 근기가 하열(下劣)한 많은 사람들이 흡수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교만이..
해탈문을 여는 연기! 연기!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말’(馬)을 보고 ‘사슴’(鹿)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말로는 해석할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중생이라 해도, 번뇌라 해도,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늘 바른 생각으로 수행 ‘삼라만상이 실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이는 분별 망상으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 잠깐 머물러 있다가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딱 바로 잡아서 어떠한 환경이나 문제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바른 마음을 낼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 걱정 근심이 없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자기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 편안하거나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집, 높은 벼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는 될지언정 행복의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불법은 안에서 찾아야지 결코 밖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은 자기가 이끌어가지 않..
공덕 베푸는 공덕! 세상을 사는 순리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사람 관계가 좋은 사이로 유지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먼저 사람의 마음에 감정의 균열이 생기며, 의심과 조바심이 일어나 불안감마저 조성되게 된다.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 때는 스스로의 마음에 믿음이 생길 때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내가 너를 믿는다는 자기의 예상대로 상대의 행위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두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이 말은 몰랐던 사실을 알고 났을 때 내 마음속에 ‘아! 그렇구나.’ 하는 이해와 확신이 생기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것이 그런 것이었다.’ 하고 이해했을 때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이 가는 상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