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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곳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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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저것도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속에 갇혀 있습니다.그리고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내 것’, ‘내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인연 따라 잠시 왔다 스쳐 가는 것을 애써 잡아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그렇게 스스로 울타리를 쳐서 ‘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빠져버립니다.내가 스스로 만든 ‘나’에 집착합니다.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네가 아니야 그 울타리만 걷어차고 나오면 무한한 세상이 다 네 것이야.”지금껏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그리고 ‘내 것’을 많이도 늘려놓았습니다. ‘내 것’을 늘리는 일, 그것이 우리네 사는 일상입니다.우리네 한평생 살림살..
업장소멸이란!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
모두가 한 생각에 있다 지옥과 극락 한 생각에 있어,  지금 우리는 인간이야말로 극악극선의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아침 한 나절에 저렇게 혼란에 빠지고 수만의 인명 이 살상될 수 있다는 현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의 이면에는 국가적인 이해관계와 인종적인 적대감 등등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문제는 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희생된 것인지 조차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간은 한 마음을 펼치면 선으로 향하고 한 마음을 돌리면 악으로 향하는 존재입니다. 선과 악이 항상 함께 인간의 마음자리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하고 수행을 잘해서 선한 마음을 많이 꺼내어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
번뇌망상이 본래 어디있느냐, 너희가 만든것이지 無相으로 爲宗하고 無住로 爲體하고 妙有로 爲用이라.공부에 대해서 말한다면 상이 없는 것으로 전체를 삼고, 주함이 없음으로써 체를 삼고. 마음의 용심하는 것으로 용을 삼으라 했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그러기도 하고 혹은 손가락을 척 내밀기도 하고 혹은 이렇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가리키기도 하는데 그것이 다 한 물건을 가리키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모든 스님네의 공부하는 방법이지요. 이 세상물건은 모든 것이 그늘이 있으면 양지가 있고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듯이 상대가 있는데 이 물건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뭐라고 입만 열면 한방 망이 맞아야 하지요. 말이 안 통하는 겁니다. 언어도단이고, 말 길이 끊어진 자리지요...
향기로운 글 업을 뛰어넘으라!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나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 론에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무 상 수행자가 아닌 시주들은 정신적인 영역은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禪의 세계이기에그 보이지 않는 선의 힘이기 때문이지요산중에서 일상으로 격는 인간적인 담백함으로 다가오는 대자연의 시간은때로는 홀로 남는다는 것그것이 沙門(사문)삶인 것 같아 아련히 서글픔에 격기도 잠시차라리 所有(소유) 모습이 그려진다네가끔 看經(간경) 벽을 향해 火頭를 챙기는 나 자신을 볼 때면 결코 느슨히 할 수 없는 게 수행자의 참모습으로 가닥이 안 잡힐 때 내 가슴은 섬뜩해 하여, 쉽게 안일 속에 안주하려 드는구나 하는   따스한 아래목 방구들짝 생각에 눕고 싶픈 몸이 잠이 쏟아지면,눈을 이불 삼아 잘 정도로 혼침이 온다는 마장과의 싸움 이겨내려는 수행자의 자세산중숲은 늘 비어 있다. 絢爛(현란)으나 열림을 위해 긴 침묵의 시간..
사람들아!!! 남의 허물 꾸짖기 좋아하지 말고 스스로 내 잘못을 되살펴 보라, 만일 이를 알고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근심, 다툼이 영원히 사라진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그 행복은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이 문제는 아마도 인류시원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그러나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사람들은 많은 일을 꾀해왔고 그 결과물이 우리가 맞이한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삶에 대한 욕망과 환상!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보다 밝은 내일을 욕망하는 것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닙니다.이웃집 강아지도 그러하고 밀림의 맹수도, 개천의 물벌레도 마찬가지지요. 그뿐 아니라 한 알의 씨알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긴 가뭄과 장마를 견뎌내는 (오만스러운 인간들에 의하여 억울하..
莊嚴한 法의 世界 티끌만큼의 분별도 버리고 이 문에 들어라,  천재적인 문장가이자 크게 깨침을 얻으신 ‘소동파’라는 분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부처의 설법인데, 저 푸른 산이 어찌 법신부처의 몸이 아니랴 (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라고 했습니다. 어제까지는 시끄럽고 듣기 싫은 물소리인데 깨치고 나니까 부처님 말씀처럼 들리며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묘한 자연의 모습이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만고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도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있으며 시주님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오손도손하게 살고 있는 집이 진정한 불국토(佛國土)라는 것입니다. 이 법계(法界)의 모든 것이 바로 부처요, 부처님의 법문이고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뜻입니다. 그것은 물을 마신사람만이 물의 도움을 알듯이 깨달은 사람만이 오직 느낄 ..
無盡 功德 생산처가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빈집과거에 집착하면 그게 업이 되고 그냥 뛰어넘으면 도입니다 우리나라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다른 나라처럼 기술이 요요합니까? 마음이 깨어서 삽니까?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삽니까? 물질을 좇으면서 자기 분수 에 맞춰서 살 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정신세계는 언제 돌아다보겠습니까. 미래의 세계에서 본다면 지금 현실 세계가 과거가 되고, 과거의 세계에서 본다면 정신세계가 미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세계와 정신세계가 둘이 아니요, 또는 과거와 현실이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마음으로 다스려 가면서 모든 거를 놓는다면, 크면 큰 대로 다스리고 작으면 작은 대로 다스려서 놓는다면 화목이 오지 않을 수 없고 조화를 이루어서 끝간 데 없이 평..
감사하다는 생각과 말 감사하다는 말과 생각이 운명을 바꾼다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창조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의 진실생명이 반야바라밀인 사실을 관하고 어떤 경우라도 어두운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쇠퇴하고 대립하고 투쟁하고 파괴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언제나 화합하고 성장하고 향상하고 전진하고 평화하고, 원만한 것, 건설적인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노쇠나 쇠약이나 대립이나 투쟁을 생각하고 말한다면 생각하는 힘, 말하는 힘에 의해서 쇠퇴와 파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말은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생각하고 말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바뀌었을 때 환경이 바뀌는 것처럼 어두웠을 때, 불행할 ..
처처가 극락! 남 이롭게 하면 나가 편해요!요즘 세상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수행자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산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올 사람은 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한결같이 묻는 것이 ‘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겁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네가 싫어하는 거 남한테 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을 못해줄망정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한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한테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남이 나를 원망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하나는 남이 잘못하는 것 무조건 용서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 보면 밤잠을 잘 못 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드는 것은 정해진 수순입니다. 잘못하긴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
내 마음 돌아보기 '내 마음 돌아보기' 침묵하고 귀기우리라! 우리나라 사찰에 가보면 팔상전(八相殿)이라는 법당이 있습니다. ‘상’이란 글자는 ‘서로 상(相)’자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여덟 가지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모시는 법당을 팔상전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팔상도입니다. 인격의 최고를 의미합니다. ‘모니’는 ‘적묵’으로 침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구하는 게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구하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침묵하지 못하는가 하면 마음속에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다 지었고, 만족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
지혜로운 불자가 되는 길 지혜로운 불자가 되는 길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온통 다 번거롭게 보입니다. 반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또 가까운 이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좋아하고 가까운 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힘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스스로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이며, 스스로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또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이 세상이치인데, 衆生心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기에만 집착[執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자가 겪고 있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괴로움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자작자수..
남과 나눌 줄 아는 복을 실천해야...! 신년 법문 분명하게 보는 안목이 열리면 전체를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부분적인 것은 누구나 다 알고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이며 또한 우주와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는 말씀,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진리를 배워도 나 혼자 잘 살길 바랍니다. 나만 잘되길 바랍니다. 우리만 잘되길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과 세상과 우주와 인드라망으로 연결돼 있어서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똑똑한 것 같아도 물과 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가본 적은 없지만, 경주에는 최부자댁이 있다고 합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집은 몇 백 년..
업 소멸 위해 염불공덕 쌓아야! 우리 중생들은 살아가면서 입만 떼면 업(業)을 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업을 소멸하거나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이란 말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도 드문데 말이지요. 자 그러면 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뭐라 그럽니까. “나는 왜 이리 전생에 지은 업이 많은 것일까?” “업장이 얼마나 두텁길래 이리도 일이 안 풀리는 것일까” 등과 같은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대체 업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이 업이라는 말의 어원이 본래 우리말이 아니거든요.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인데 이것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누가 내것 만들어 주는게 아니다 지금 여기 법당이 있습니다만 법당도 꼭 사찰에 있는 법당만 법당이 아니라 각자 자기 몸뚱이가 바로 법당입니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상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법당일 수밖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라면 변소 간도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인 셈이죠. 법당에 와서 절을 할 때 ‘ 아, 저 부처님 모습이 내 모습이고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이니 모두가 둘이 아니구나’하고 마음을 둥글려서 한다면 일 배를 올린다 해도 삼천배 못지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이치를, 이렇게 시원하고 광대무변한 이치를 여러분 모두가 알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어서 우주 바깥도 한 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문지방 너머도 한생각, 천리만리도 한 생각, 지..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는다!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고 자기보다 남을 생각해야 보살입니다. ”사람마다 다 갖고 있는 마음 닦으면 일월보다 밝게 살 수 있어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무엇이든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사람의 마음에 만약 형상이 없다고 한다면 어둡고 밝은 것이 어떤 인연과 거래가 있다고 할 것이냐 궁금하기 한량없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으로 인해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애로가 쉽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기가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잘못하면 벌은 받는 것이지 다른 누가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주듯 복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는 것도 누가 다른 사람이 떠밀어 주듯 받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을 잘못하면 스스로 벌이 되는 것이고 행동을 잘하고 마음을 잘 ..
자비로우신 부처님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자비로우신 부처님 가장 어두운 곳을 밝은 빛으로 먼저 밝히려는 심정으로. 호흡하기 어려운 곳에 미묘한 향으로써 정화시키는 마음으로 한줄기 향을 사릅니다. 사바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인연들 중. 하고많은 중생 두루 굽어 살피시사. 각기 맡겨진 분량의 그릇대로 쓰임 받고 벅찬 환희 심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들의 인생. 삶, 계획, 모두 주관해 주시고 경영해 주소서. 하루, 하루 나아지는 과정이 되어가고 있사오니 부처님 전에 영광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돌보시고 이끄시고 지켜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스스로 팔정도의 부처님 크신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삶을 개척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받아들이고 확신하면 그 사람은 부처님 말씀의 테두리에 알 맞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인과의 씨앗[업]은 썩지 않는다 [1] 인과는 당신들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업], 그 업을 받지 않고서는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썩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법문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다. 내 짐을 지지 않겠다면,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내가 되받지 않는다면, 누가 받을 것인가. 좋은 말이든 나쁜 일이든, 내 짐을 내가 지지 않겠다면, 누가 대신 져 줄 것인가. 대신 밥 먹어 주고 대신 잠자 줄 수 없듯이, 대신 똥 누고 대신 아플 수 없듯이, 내 짐을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철칙이다. 한 치의 에누리가 없는 인과의 법칙이다. 누가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찾고, 아무리 다라니를 외어도 자작자수의 법칙엔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
매일 나를 바꾸는게 인과응보! 무소구행(無所求行)의 삶! 대가를 구하는 바가 없이 선행을 하면서 세상을 살라입니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하지 말고 행하라는 말이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 탐욕과 집착은 계속 업을 쌓기 때문에 아무리 공덕을 베풀어도 소용이 없다. 공덕 복덕을 베풀더라도 영원히 불생불멸한 근본 그 자리에 앉아서 공함을 알고 베풀어야지, 그 이치를 모르고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 만유는 공하여 항상 함이 없으니 집착함이 없어야 삼독에서 벗어나, 그러고 나면 칭법행(稱法行)이라.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본래의 마음, 성품의 근본자리, 선악시비와 공덕 복덕을 다 떠나 불생불멸, 부증불감, 선악도 끊어지고, 시비도 끊어진 영원한 진여자성의 자리에 앉아서 살라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억천만사가 떠오..
운명의 수레바퀴! 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나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 론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
업생(業生)에서 벗어나 원생(願生)으로! 우리가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게 되면 생사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중생은 업생(業生), 업대로 삶을 살게 되지만 참선 잘한 도인은 원생(願生), 원력을 세운 대로 살게 된다. 겉보기에는 우리가 똑같이 살아가는 인생이라 하지만 차별이 생깁니다. 섭생은 업에 끄달려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저금통장에 있는 돈 까먹듯이, 과거에 지은 대로 금생에 받아서, 또 금생에 지은 대로 내생에 흘러가는 것이 바로 업생, 업에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 분들은 업성에서 벗어나 원생을 살게 됩니다. 원생은 서원, 원하는 바에 따라서 태어나고 서원을 세운 대로 살아갑니다. 큰스님들 중에는 돌아가실 때 ‘내가 다음 생에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들에게 불법을 전파하리라’라..
헌신과 섬김 떠올리면 은근한 깨우침과 감동으로 가슴을 적셔주는 말들이 더러 있다. 헌신이라는 말도 그 하나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우리들의 관계를, 나아가서 우리의 사회를 훈훈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덕성이다. 헌신이라 음미해 보면 해볼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다소곳해지며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이다. 다소 성글거나 서둘렸던 마음을 다잡아주며 커다랗게 마음을 넓혀주는 마음이다, 다 주고도, 다 놓고도, 다 바치고도 가장 넉넉한 마음이게 하는 말인 듯싶다. 누군가를 (獻身的)으로 사랑해 본다는 일,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섬겨오는 일, 어딘가에 헌신적으로 몰두해 본다는 것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그 자체로서 지고한 행복이요, 아름다움이요, 품격이기에 말이다. 헌신적이게 되..
我[나] 나! 나와 남을 가르면 마음에 독이 생겨요. 편견 놓고 대하면 둘 아닌 하나지요. 먼저 ‘불교는 철학인가 종교인가?’ 하는 해묵은 질문을 말머리로 삼아 보겠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불교라는 종교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입장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불교를 철학과 등치시키는 것은 종교의 생명이라 할 실천력을 거세시킬 위험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 할 때, ‘종(宗)’ 자를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종’은 뿌립니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우주와 사물의 실상, 즉 본질을 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아는 것에서 철리가 나오는 것, 그리고 그 철리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이예요. 그러나 이성과 오관으로 따지는 철학은 인간의 이율배반 의식 위..
노력한 댓가! 달라지는 삶! 중생의 번뇌는 창공에 구름이 일 듯이 무한 히 일어납니다.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라는 말은 팔만사천이란 숫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많고 많은 번뇌가 무한히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중생들이 팔만사천가지 번뇌를 갖고 있으니, 그 번뇌를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서 많은 교설을 한 것이지, 세존께서는 한 법도 설하신 것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깨달으신 법을 ‘무유정법無有定法’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라 합니다. 법이란 꼭 ‘이것이다’라고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부 하나로 통합니다. 그러니까 천경만 론(千經萬論)이 모르고 보면 말이 다르지만 알고 보면 다 똑같다는 뜻, 그렇게 온갖 번뇌를 소멸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은 모든 것은 누가 던져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
번뇌 망상의 근원 불교수행은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번뇌 망상을 물리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텅 비우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기도는 수행법 중 하나입니다. 세존께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번뇌 망상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를 하는 행위는 결국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서원을 세우고 부처님께 지극히 기도를 할 때, 그 서원은 부처님이 이뤄주시는 것일까요? ‘저 사람은 내 명호를 지극정성으로 부르니까, 저 사람의 서원을 들어주자’ 하며 들어주시는 것일까요? 기도는 내 마음속에 있는 번뇌 망상들, 탁한 부분들을 맑게 해 마음을 밝힘으로써 업장이 맑아지게 되는 수행입니다. 업장은 업으로 인한 장애입니다. 그 장애가 맑아지니 그동안 장애에 의해하기 어려..
원력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만 가지 인연이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려 있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은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따라 고요히 앉아 참 즐거움 배우려나. “우리가 사는 기세 간은 지진, 태풍, 해일 등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 절대로 안전한 곳이 아니다 재앙이 없으면 테러를 비롯해 서로가 투쟁을 해 살상을 일삼는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자비사상으로 남에게 베풀면서 살라는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찰나 찰나 변해가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생명이 있는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면할 길이 없다, 불교는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자리 밝아지면 행복” 한 생각 바꾸면 생산자 요. 마음자리를 다 밝아지게 하고 그렇게도 간절히 행복을 바라지만, 많은 사람들의 현실은 삶이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지 행복은 타고난 마음자리가 영원히 밝아지는 것 나와 상대 둘 아니죠 마음이 밝아지면, 나와 상대가 적중하게 됩니다. 나와 상대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밝아지는 것, 마음, 지혜는 모두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입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시간에도 공간에도 속해지지 않아 생도 다스리고 별도 다스리기 때문에 그 역량으로 대우주를 통솔하고, 그 지혜자원은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종합적으로 생명체 어느 생명이든 시작할때 지혜의 역량이 전체 생명의 원리 원천이 되고 모체가 각자 생명들의 생사요체가 연결돼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
선근 공덕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내면적 동기를 갖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그 계기를 일별 하여 보리심을 발하였다고 하며, 그 보리심은 깨달음의 발단이 되고 불자들이 이상으로 하는 완전한 자유 종자가 되며 궁극에는 이타의 덕성을 함양시켜 밝은 세상을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독(三毒)으로 얼룩진 무한생사의 풍랑 속에서 진정한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밝기를 헤아리기 어려운 등불을 밝히는 것이요 세간의 빛깔에 비유할 수 없는 장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변광명과 무한 장엄자비를 계발하는 일, 이것이 참으로 보리심을 발하는 일이며 출가입신(出家入信)하는 길입니다. 삼독을 여의는 길이 출가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입신의 길이니 참으로 완전히 비우면 만덕(萬德)이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불자님이시여! 불상은 조각이든 그림이든 부처님에 대한 형상이지 부처님은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지혜의 눈을 떠 깨닫고 깨달은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행 할 수 있다면 그가 곧 부처이다 부처님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고 그 어떤 우상도 아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지요 그러므로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고 나와 이웃이 다 함께 지혜롭게 잘 살아가는 마음밭을 닦아가는 길이다 이러한 인격에 귀의하는 것은 곧 본질적인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형상을 모시고 애경 하며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각자 지혜의 눈을 뜨고 저 함이다 부처님 本體인 法身은 宇宙의 대광명이며 모든 衆生의 생명의 根源이다 그래서 無量光 또는 無量壽라고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