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 곳간

(64)
莊嚴한 法의 世界 티끌만큼의 분별도 버리고 이 문에 들어라, 천재적인 문장가이자 크게 깨침을 얻으신 ‘소동파’라는 분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부처의 설법인데, 저 푸른 산이 어찌 법신부처의 몸이 아니랴 (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라고 했습니다. 어제까지는 시끄럽고 듣기 싫은 물소리인데 깨치고 나니까 부처님 말씀처럼 들리며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묘한 자연의 모습이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만고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도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있으며 시주님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오손도손하게 살고 있는 집이 진정한 불국토(佛國土)라는 것입니다. 이 법계(法界)의 모든 것이 바로 부처요, 부처님의 법문이고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뜻입니다. 그것은 물을 마신사람만이 물의 도움을 알듯이 깨달은 사람만이 오직 느낄 ..
茶의 香 고요함은 禮을 낳고 움직임은 香을 빚는다 앉았다 일어섬은 한바탕이요 놓고 잡음이 不二의 가부좌 甘露三昧가 태곳적 그 마을길에서 만나 스스로 우아하듯 은은한 차 맛이 法身을 적신다 다소곳함이 비운 마음 그릇에 차 빛깔로 가득하니 공간과 사람 함께 평화롭다 -()-
인연을 알면 행복이 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무량한 공덕을 쌓은 인연의 응공(應供) 때문이다.사람이 가진 응공에는 부모, 국가, 동포, 스승, 자연 등 다섯 가지 응공이 있다.이것이 바로 인과의 법칙이며 알게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불교의 효사상은 연기법에 의해 그 은혜를 알고, 알아서 갚는 사상이다. 지은보은(知恩報恩)의 사상이다.나의 생명을 있게 한 일체중생의 은혜를 알아서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효다.부모에 대한 응공과 함께 국가, 동포, 스승, 자연에 대한 은공도 알아야 한다.5천 년 조상이 갈고닦은 그 공부가 우리 몸에 녹아 있어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이것이 국가의 응공이며,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고 더불어 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음을 아는 것이동포에 대한 응공이다. 혼자서..
누가 내것 만들어 주는게 아니다 지금 여기 법당이 있습니다만 법당도 꼭 사찰에 있는 법당만 법당이 아니라 각자 자기 몸뚱이가 바로 법당입니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상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법당일 수밖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라면 변소 간도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인 셈이죠. 법당에 와서 절을 할 때 ‘ 아, 저 부처님 모습이 내 모습이고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이니 모두가 둘이 아니구나’하고 마음을 둥글려서 한다면 일 배를 올린다 해도 삼천배 못지않습니다.이런 마음의 이치를, 이렇게 시원하고 광대무변한 이치를 여러분 모두가 알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어서 우주 바깥도 한 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문지방 너머도 한생각, 천리만리도 한 생각, 지구..
선근공덕! 업은 행위다. 신구의(身口意)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그대로 업이 되어 존재 속에 업력(業力)을 남긴다.그 업력은 잠재적인 어떤 세력이며 에너지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가인연의 때를 만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그것이 바로 인과응보의 법칙이요, 업인과보의 법칙이다.그렇듯 한 번 지은 업은 반드시 받아야지만 소멸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업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법구경]에서는 말하고 있다."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이처럼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 스스로 받아야 끝이 난다. 그러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불교에서는 분명 수행을 통해 업장이 소멸된다고 했는데업장은 그것을 받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 ..
마음을 비우라!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인생이란 고난과 어긋남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도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욕망을 하나라도 더 채우기 위해 언제나 마음이 조급하다.생각은 머리 속에서 얽히고 설켜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평온한 마음을 거의 가지지 못한다수많은 말과 행동으로 업을 짓고 그 업은 다시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그와 같은 사람의 굴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아,어찌 해야 좋은가!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고 느낄 때 명상을 통해 다시 삶의 지평으로 올라올 수 있으니 바로 그때 下心하라.마음을 비우라, 그리고 명상하라 그러고도 남은 바람은 조용히 기도하라 그렇게 一念三昧에 들어가라.간절함은 삼매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간절..
질량의 세살 질량의 세상 눈에 보이는 현상인 색의 세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 세계인 공의 세계가 서로 맞닿아 불가분의 관계라는 부처님 가르침 또한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하나하나 증명되고 있습니다. 색(色)은 물질에, 공(空)은 에너지에 비유한다면 물질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물질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과학자들은 에너지 불멸의 법칙과 질량 불변의 법칙, 이 두 가지를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등가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E=mc²이라고 하는 방정식을 만들었습니다. E는 에너지이고 m은 질량이며, c는 광속을 말합니다. 즉, 에너지와 질량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절대적으로 동등하여 서로 바뀔 수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만들어져 있으며 에너지가 응집..
모르쇠 이 세상에는 자기의 사랑 분별 따위로는 따져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병으로 얻어지는 가장 큰 공덕이라 하겠습니다. 예부터 병으로 인하여 참된 신앙에 눈 뜨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죄악이 소멸되지 않는 한, 신앙이 없어지지 않듯이 병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한, 신앙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인간의 존속하는 한 생명을 아끼고 죽음의 공포 에서 벗어나려는 애절한 싸움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을 바로 돌려야 할 점은 흔히 병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대개 병이 신앙으로 해서 쾌유되었다는 효과가 따라붙게 마련이지만 본래 생겼다 가 언젠가는 없어질 이 몸에 들고 나고 하는 병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병이 나았거나 아니거..
침 묵 누구의 부탁도 바램도 없어지만 微塵의 業報에 깨어난 울음소리 말라 바스라진 理性의 향기는 불 꺼진 창문의 문틀에 박혔습니다 뫼시고 거느린 사이 어느덧 不感입니다 大地의 소리는 침묵뿐이어늘. . . . 허공에 젖는 손이 밤새밤새 떨었습니다
내 고약한 버릇(편무풍설야최잔) 절집에서 “달리 특별한 것을 구하지 말라!”지루함을 견디는 것도 큰 공부입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시련이 없어도 깊은 상처를 입는다[便無風雪也摧殘, ]”라고 삶이 아무리 무상할지라도 우린 사랑해야 합니다. 꿈과 환상, 고통과 슬픔은 끊임없이 얼굴을 내밉니다. “한가함이 가장 큰 고통이다”라는 선가(禪家)에서 ‘물 긷고 장작 패는 일상도 그대로 신묘한 도’라고 한 것은 인간의 삶이란 것이 결국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인데, 무료함을 달래면서 심연을 메워가는 역정임을 간파한 것 진정한 삶의 즐거움은 이 일상에서 중생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 바로 회향에 있습니다. 남을 향한 따뜻한 마음 이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서 다양한 문화권의 뛰어난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폭 넓게 알아..
팔랑개비 삶 모두 다 떠돌이 世上살이 더러 외로운 날들엔 누구를 기다릴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서툴기만 한 世上인데 맨몸으로 버틴 삶이 서러워 괜스레 눈물을 흘리고 生이 고달파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모두 다 제멋에 취해 우정이나 사랑으로 멋진 포장을 해도 때로는 서로의 필요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는 우리들 텅빈 가슴은 생채기가 찢어지도록 아프다. 만나면 하고픈 이야기가 많은데도 생각하면 더 눈물만 나는 世上살이 가슴을 열고 욕심도 없이 사심도 없이 같이 웃고 울어줄 그 누가 있을런가? 인파 속을 헤치며 슬픔에 젖은 몸으로 홀로 웃어도 보고 흐느껴 울며 생각도 해보았지만 살면서 살아가면서 몹시도 외로운 날들엔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다.그러나 산에 오르면 무상을 즐기며 돌아올 땐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고개 숙여 ..
인과의 씨앗[업]은 썩지 않는다 [1] 인과는 당신들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죄[업], 그 업을 받지 않고서는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썩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법문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다.내 짐을 지지 않겠다면,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내가 되받지 않는다면, 누가 받을 것인가.좋은 말이든 나쁜 일이든, 내 짐을 내가 지지 않겠다면, 누가 대신 져 줄 것인가.대신 밥 먹어 주고 대신 잠자 줄 수 없듯이, 대신 똥 누고 대신 아플 수 없듯이, 내 짐을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철칙이다.한 치의 에누리가 없는 인과의 법칙이다. 누가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찾고, 아무리 다라니를 외어도 자작자수의 법칙엔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
(語默一如) 자주 부탁드리는 말씀이지만 불자들은 남을 건너다보면 안 되며, 건너다보지 마십시오.남을 건너다보면 언제나 실망을 하게 되어 있고, 남을 건너다보면 언제나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언제나 근본 불성(佛性)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사찰의 입구에 있는 산문(山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此入門者(차입문자) 莫存知解(막존지해) 이 문에 들어오는 자는 지해[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깨달음의 집안, 부처님의 집안인 불교 문중에 들어오고자 하면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 분별의식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쉬운 이야기 같지만,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뜻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뇌나 망상을 두지 말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보다 한 단계 ..
허공과 같은 마음 우리들이 우선 생각을 허공 같다고 하는(허공이 내가 허공 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을 비유하기를 허공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허공을 비유해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허공 안에 우주가 건립되어 있고, 우주 그 안에 지구가 있다 하고 지구 가운데 만물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공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입니다.이 허공과 같은 큰 마음이 본래의 마음인데 거기서 바깥의 허공 가운데 지구라든가 지구를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태양을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아니면 어떤 별을 나라고 매달린다든가 이렇게 그 허공 가운데 있는 어느 부분 하나를 붙잡아서 자기라고 매달릴 것 같으면 물론 자기가 아니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착각입니다그 가운데서 일체경계가 환상인데 고요한 깊은 ..
我[나] 나!나와 남을 가르면 마음에 독이 생겨요. 편견 놓고 대하면 둘 아닌 하나지요. 먼저 ‘불교는 철학인가 종교인가?’ 하는 해묵은 질문을 말머리로 삼아 보겠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불교라는 종교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지도 모르겠습니다.불교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입장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불교를 철학과 등치시키는 것은 종교의 생명이라 할 실천력을 거세시킬 위험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 할 때, ‘종(宗)’ 자를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종’은 뿌립니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우주와 사물의 실상, 즉 본질을 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아는 것에서 철리가 나오는 것, 그리고 그 철리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이예요. 그러나 이성과 오관으로 따지는 철학은 인간의 이율배반 의식 위에 서..
견성에 머물지 말고 백척간두진일보하라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합니다. 하루저녁에 초가집 열 개를 지었다 부순다는 이야기가 있듯 말이죠. 그 번뇌 망상이 꺼졌다 일어났다 하는 자리를 한번 되살펴 보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한국불교는 간화선입니다. 화두를 들어 그 꺼졌다 일어났다 하는 생각을 끊어버립니다. 여러분이 참선하면서 번뇌, 망상 일어난다고 걱정하는데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화두를 들어버리면 번뇌 망상은 다 꺼져버리게 돼 있습니다. 화두를 의심하고 있는 그 당처를 잘 잡고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일심으로 가다 보면 그런 생각으로 뭉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때가옵니다. 한 시간이 갔는지, 두 시간이 갔는지, 몇 시간 갔는지 모르는 그런 때가 훌렁 지나갑니다. 그런 때 결판이 납니다...
일없는 이가 귀한 사람 사람은 저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이 법입니다.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심지 않고 남이 심은 것을 빼앗으려 해도 안됩니다.저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깨닫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심은 대로 거두는 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뿌려야만 거둘 수 있고 더 많이 땀흘려 노력해야만 탐스런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는 곳에성공의 꽃이 필 수 없고 행복의 열매는 열리지 않습니다.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 보람있는 것, 가치 있는 것은 노력의 산물이요 땀의 결과입니다.노력 없이는 지금의 시련을, 고통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는다! 복은 스스로 지은만큼 받고 자기보다 남을 생각해야 보살입니다. ”사람마다 다 갖고 있는 마음 닦으면 일월보다 밝게 살 수 있어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무엇이든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사람의 마음에 만약 형상이 없다고 한다면 어둡고 밝은 것이 어떤 인연과 거래가 있다고 할 것이냐 궁금하기 한량없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의 마음으로 인해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애로가 쉽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기가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잘못하면 벌은 받는 것이지 다른 누가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주듯 복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받는 것도 누가 다른 사람이 떠밀어 주듯 받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을 잘못하면 스스로 벌이 되는 것이고 행동을 잘하고 마음을 잘 ..
헌신과 섬김 떠올리면 은근한 깨우침과 감동으로 가슴을 적셔주는 말들이 더러 있다. 헌신이라는 말도 그 하나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우리들의 관계를, 나아가서 우리의 사회를 훈훈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덕성이다. 헌신이라 음미해 보면 해볼수록 마음이 낮아지고 다소곳해지며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이다. 다소 성글거나 서둘렸던 마음을 다잡아주며 커다랗게 마음을 넓혀주는 마음이다, 다 주고도, 다 놓고도, 다 바치고도 가장 넉넉한 마음이게 하는 말인 듯싶다. 누군가를 (獻身的)으로 사랑해 본다는 일,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섬겨오는 일, 어딘가에 헌신적으로 몰두해 본다는 것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그 자체로서 지고한 행복이요, 아름다움이요, 품격이기에 말이다. 헌신적이게 되..
이것도, 저것도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속에 갇혀 있습니다.그리고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전부인 줄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그러다가 그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 갈 때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 ‘내 것’, ‘내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인연 따라 잠시 왔다 스쳐 가는 것을 애써 잡아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그렇게 스스로 울타리를 쳐서 ‘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빠져버립니다.내가 스스로 만든 ‘나’에 집착합니다.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네가 아니야 그 울타리만 걷어차고 나오면 무한한 세상이 다 네 것이야.”지금껏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습니다.그리고 ‘내 것’을 많이도 늘려놓았습니다. ‘내 것’을 늘리는 일, 그것이 우리네 사는 일상입니다.우리네 한평생 살림살..
업장소멸이란!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
모두가 한 생각에 있다 지옥과 극락 한 생각에 있어,  지금 우리는 인간이야말로 극악극선의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아침 한 나절에 저렇게 혼란에 빠지고 수만의 인명 이 살상될 수 있다는 현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의 이면에는 국가적인 이해관계와 인종적인 적대감 등등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문제는 죄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희생된 것인지 조차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간은 한 마음을 펼치면 선으로 향하고 한 마음을 돌리면 악으로 향하는 존재입니다. 선과 악이 항상 함께 인간의 마음자리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하고 수행을 잘해서 선한 마음을 많이 꺼내어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
번뇌망상이 본래 어디있느냐, 너희가 만든것이지 無相으로 爲宗하고 無住로 爲體하고 妙有로 爲用이라.공부에 대해서 말한다면 상이 없는 것으로 전체를 삼고, 주함이 없음으로써 체를 삼고. 마음의 용심하는 것으로 용을 삼으라 했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그러기도 하고 혹은 손가락을 척 내밀기도 하고 혹은 이렇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가리키기도 하는데 그것이 다 한 물건을 가리키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모든 스님네의 공부하는 방법이지요. 이 세상물건은 모든 것이 그늘이 있으면 양지가 있고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듯이 상대가 있는데 이 물건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뭐라고 입만 열면 한방 망이 맞아야 하지요. 말이 안 통하는 겁니다. 언어도단이고, 말 길이 끊어진 자리지요...
향기로운 글 업을 뛰어넘으라!불교에서는 운명이나 숙명 대신에 스스로의 삶을 나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과(因果), 업보(業報) 론에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물론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무 상 수행자가 아닌 시주들은 정신적인 영역은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禪의 세계이기에그 보이지 않는 선의 힘이기 때문이지요산중에서 일상으로 격는 인간적인 담백함으로 다가오는 대자연의 시간은때로는 홀로 남는다는 것그것이 沙門(사문)삶인 것 같아 아련히 서글픔에 격기도 잠시차라리 所有(소유) 모습이 그려진다네가끔 看經(간경) 벽을 향해 火頭를 챙기는 나 자신을 볼 때면 결코 느슨히 할 수 없는 게 수행자의 참모습으로 가닥이 안 잡힐 때 내 가슴은 섬뜩해 하여, 쉽게 안일 속에 안주하려 드는구나 하는   따스한 아래목 방구들짝 생각에 눕고 싶픈 몸이 잠이 쏟아지면,눈을 이불 삼아 잘 정도로 혼침이 온다는 마장과의 싸움 이겨내려는 수행자의 자세산중숲은 늘 비어 있다. 絢爛(현란)으나 열림을 위해 긴 침묵의 시간..
사람들아!!! 남의 허물 꾸짖기 좋아하지 말고 스스로 내 잘못을 되살펴 보라, 만일 이를 알고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근심, 다툼이 영원히 사라진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그 행복은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이 문제는 아마도 인류시원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그러나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사람들은 많은 일을 꾀해왔고 그 결과물이 우리가 맞이한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삶에 대한 욕망과 환상!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보다 밝은 내일을 욕망하는 것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닙니다.이웃집 강아지도 그러하고 밀림의 맹수도, 개천의 물벌레도 마찬가지지요. 그뿐 아니라 한 알의 씨알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긴 가뭄과 장마를 견뎌내는 (오만스러운 인간들에 의하여 억울하..
無盡 功德 생산처가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빈집과거에 집착하면 그게 업이 되고 그냥 뛰어넘으면 도입니다 우리나라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다른 나라처럼 기술이 요요합니까? 마음이 깨어서 삽니까?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삽니까? 물질을 좇으면서 자기 분수 에 맞춰서 살 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정신세계는 언제 돌아다보겠습니까. 미래의 세계에서 본다면 지금 현실 세계가 과거가 되고, 과거의 세계에서 본다면 정신세계가 미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세계와 정신세계가 둘이 아니요, 또는 과거와 현실이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마음으로 다스려 가면서 모든 거를 놓는다면, 크면 큰 대로 다스리고 작으면 작은 대로 다스려서 놓는다면 화목이 오지 않을 수 없고 조화를 이루어서 끝간 데 없이 평..
감사하다는 생각과 말 감사하다는 말과 생각이 운명을 바꾼다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창조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의 진실생명이 반야바라밀인 사실을 관하고 어떤 경우라도 어두운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쇠퇴하고 대립하고 투쟁하고 파괴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언제나 화합하고 성장하고 향상하고 전진하고 평화하고, 원만한 것, 건설적인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노쇠나 쇠약이나 대립이나 투쟁을 생각하고 말한다면 생각하는 힘, 말하는 힘에 의해서 쇠퇴와 파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말은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생각하고 말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바뀌었을 때 환경이 바뀌는 것처럼 어두웠을 때, 불행할 ..
처처가 극락! 남 이롭게 하면 나가 편해요!요즘 세상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수행자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산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올 사람은 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한결같이 묻는 것이 ‘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겁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네가 싫어하는 거 남한테 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을 못해줄망정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한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한테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남이 나를 원망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하나는 남이 잘못하는 것 무조건 용서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 보면 밤잠을 잘 못 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드는 것은 정해진 수순입니다. 잘못하긴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
내 마음 돌아보기 '내 마음 돌아보기' 침묵하고 귀기우리라! 우리나라 사찰에 가보면 팔상전(八相殿)이라는 법당이 있습니다. ‘상’이란 글자는 ‘서로 상(相)’자로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여덟 가지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모시는 법당을 팔상전이라 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팔상도입니다. 인격의 최고를 의미합니다. ‘모니’는 ‘적묵’으로 침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구하는 게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구하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침묵하지 못하는가 하면 마음속에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다 지었고, 만족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