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가을 자각하라!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실처럼 불자란 아름다운 이름이고,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아름다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잠깐 더 부언하면 송아지나 말이나 개도 오식(五識)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귀로 듣는, 코로 냄새 맡는, 입으로 맛보는, 몸뚱이로 촉감을 느끼는 이런 다섯 가지 알음알이는 짐승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근이 하자고 하는 대로 감정 따라 산다면 그것은 짐승도 다 하는 일입니다. 다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오식에 더해 의식이라는 육식(六識)이 있어서 나 자신을 바로 알려고 애를 쓰는 것, 불자라고 하면 이러한 육식을 뛰어넘어 제7 말나식을 길들여서, 제8 아뢰야식, 즉 내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내 인생의 그림을 그립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내 마음 화선지에 내 일평생 그려온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각자가 한 번 돌아보십시오.
그런데도 잘 살려고 애를 쓰면서도 번뇌 망상이 하자는 대로 감정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느라고 보낸 시간이 더 많지, 내 마음 농사짓고 내 부처의 양식을 보태는 시간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서 사람 몸 받기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아버지 정충과 어머니 난자가 만날 때 2억대 1의 경쟁을 뚫고 단 한 생명만이 어머니 난자를 따라서 자궁 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났으니,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시험보다도 사람 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 현대 과학이 알아낸 논리입니다. 그토록 어렵게 사람 몸을 받아서 여러분이 과연 눈 감고 죽을 때 내가 한평생 걸어온 발자국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다면, 6식과 7식과 8식을 넘어선 삶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고 감정, 번뇌, 망상이 하자는 대로 운명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았다면, 눈 감을 때 정말 천추의 한이 맺힐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내 잠들어 있는 마음의 영혼을 깨우고, 일어나 설치고 돌아다니는 번뇌를 잠재워봅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 망상을 움직이는 감정의 세계가 붙을 수 없는 자리, 즉 식이라는 이름이 끊어져버린 제9 백정식(百淨識)에 우리 자신을 회향할 수 있을까?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이 나(我)랄 것이 없음을 관하고 부처님 보기를 걸림 없이 하며, 중생을 교화하려고 법을 연설하여 그로 하여금 부처님 법에 한량없는 즐거움과 청정한 신심을 내게 하며, 모든 이들을 구호하되 고달프거나 싫은 생각이 없다.
고달픈 생각이 없으므로 모든 세계에서 중생이 성취하지 못하였거나 조복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그곳에 나아가 방편으로 교화하여 제도하되, 그 가운데 중생이 가지가지 음성과 가지가지 업과 가지가지 집착과 가지가지 시설(施設)과 가지가지 화합이며, 가지가지로 헤매고 가지가지 업을 짓고 가지가지 경계요. 가지가지로 태어나고 가지가지로 죽는 것들을, 큰 서원으로 그 가운데 편안히 있어서 교화하되, 그 마음이 변동하거나 퇴전치 않게 하며, 잠깐이라도 물드는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무슨 까닭이냐. 집착함이 없고 의지한 데가 없으므로 자기를 이롭게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함이 청정하고 만족함이니, 이것을 보살 마하살의 일곱째 집착 없는 행이라 합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