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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선 연

 

보시는 相 낼 일 아닌 마땅히 해야 할 일”  대승불교의 핵심은 나눔에 있습니다. 그것은 법(法)이건 물질이건 간에 모든 것을 중생의 바른 이익을 위해서 나누는 일입니다. 육바라밀의 제1바라밀이 베푸는 것인데 이것의 전제가 서지 않고서는 제2, 제3 바라밀의 실현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대승의 발심은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도 그 지혜마저 나누는 것이 대승적인 수행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공성을 체득하는데 있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 요인이란 바로, 나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해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나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리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이기심의 집착으로부터 떠나 이타적인 상생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나누는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최초의 수행이며 최후에까지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보시는 수행이며, 베푸는 일은 자비의 사회화이며, 또한 지혜로운 행동이어서 업의 장애를 녹여 선주(善住)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인 것입니다. 베풀어야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물질이나 정신의 속성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내 것이 될 수도 없으며 영원하지 않은 인연기멸의 법칙 속에 머무는 것들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본래 공한 것인데 그 여타 존재도 똑같은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유할 수 있는데,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엄격히 말해서 내 것이 될 수 없고 또한 내 곁에 머물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남과 나눈다는 것은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닐 본래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되는 일입니다. 수없이 변해가는 과정 속에 그것들과 만나고 헤어지는데 나쁜 곳으로 세상 중생들이 해로움을 보는 쪽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이 보시입니다. 이는 또한 방생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따라서 보시는 상내고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며 당연히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이들이 보살이고 부처님이듯이, 이 분들이 행하는 행이 모두 인간 특수성이 아니라 본래 보편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푸는 것은 인간 본래 모습이며 이를 행하지 못한 것은 ‘나’라는 욕망 때문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베푸는 이유는 받는 이나, 주는 이, 그 베푸는 물질이나 정신이 모두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무주상보시의 수혜자는 법을 듣건 재시를 받건 환희와 감사로 행복할 것이고 또한 그런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비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점점 나은 곳으로 가게 되고 주는 이도 또한 상없이 주면 그는 욕심을 덜게 되고 주변에 선연(善緣)들이 많이 모여 그의 삶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정신적 에너지나 물질적 에너지이건 그것이 좋은 일에 쓰이고, 중생의 삶은 번거롭지 않게 하는 데 쓰인다면 아마도 물질이나 정신공해들도 없어 질 것입니다. 이제는 불교가 본연의 대승적 발심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이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하고 불교 본연이기도 합니다. 이제 추석이라는 명절 기분으로 느끼는 화려함 속에서도 그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늘진 곳을 관찰하는 것이 관세음이며 보살심의 시작입니다. 주변에서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살펴보고 그들을 위하는 마음을 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