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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살 행!



내 나이가 올해로 여든 훨씬 넘었는데 참 부끄럽고 덧없군요. 이 늙은 몸이 누구의 것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몸이란 것은 자꾸자꾸 갈아 입는 옷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고 보면 살기를 몇 해 살았느냐가 그리 중요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데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 영원 불멸의 영혼을 위해 다음 옷을 어떤 걸로 준비했느냐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 난득 남생 난득 불법 난득’이란 말도 있지만 인간의 몸을 받았어도 축생의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의 옷은 축생이고 축생의 몸을 받았어도 인간 될 업을 지으면 다음 생의 옷은 인간이란 것이 윤회의 이치 아닙니까.

이 몸은 헛것입니다. 다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영혼은 있으니 그를 바로 아는 일이 우리의 숙업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라고도 하고 영혼 정신등으로 말하기도 하는 그놈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마음이라 해도 그 본래면목이 아니고 영혼도 정신도 다 그 이름일 뿐이지 그 실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자성(自性)이라 말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름이 무엇이건 그건 중요할 것이 없다. 다만 그놈의 실상을 알아내는 일이 절박할 뿐, 그 절박한 숙제를 풀기 위해 불교를 믿어야 하는 겁니다. 불교는 지혜와 신통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과 제불보살은 지혜와 신통의 선생님들입니다.
지혜는 우주법계의 근본이 되는 자성을 아는 것이고 신통은 그 지혜를 통해 우주법계를 살피고 누리는 즐거움의 행(行)들입니다.

나의 주인은 바로 나일 뿐입니다. 나라고 하는 주인이 지극한 지혜를 얻으면 신통의 경지에 이르러 십만 억 국토의 모든 모습을 두루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만억 국토라는 어마어마한 세계에는 이 사바계보다 험난한 곳도 있을 것이고 더 아름다운 곳도 있을 것이지만 지혜의 마음으로 그 세계를 관하면 미추의 분별도 없어집니다.
그러니 십만억 국토가 하나로 보이고 하나 속에 십만억 국토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어야 지혜를 증득할 수 있는데 그것을 위해 수행정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를 얻길 원한다면 내가 아미타불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러한 서원을 세워야 하고, 다음으로 아미타불의 행을 하면 됩니다.
내 몸 안에 이미 제불보살의 모습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아미타불을 원하면 아미타불이 될 수 있고 문수보살을 원하면 문수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고 그 행을 받들어 행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중생의 모습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떤 행위를 하며 살아가지만 그 행동이 지극한 원행(願行)일 때 착실한 과보를 받아 불보살의 길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이웃과 잘 지내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극락세계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한 업이 불법을 닦은 이의 원행이 아니면 극락에 머무는 시간은 짧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원행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과 여러 보살님들의 가르침과 서원을 알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라는 원력을 갖춰야 합니다. 원력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원행은 그 믿음의 실천인 겁니다. 이 나이 든 납자에게도 큰 서원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서원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질겁을 하기 일쑤여서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이 몸을 벗고자 하는데 그냥 눕거나 앉아서 죽음을 맞아 옷을 벗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 내 몸에 불을 댕겨 이 육신의 허상을 태움으로써 부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갚을까 합니다.

화마의 고통은 잠시이고 부처님 세상에 태어나는 즐거움은 영원할 것이니 주저할 일이 아닙니다. “그대와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 곳에 모아 서쪽을 생각하라,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고 눈이 있는 자는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지는 해를 똑똑히 바라보라. 그리고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는 해가 마치 서쪽하늘에 매달아 둔 북(鼓)과 같음을 보도록 하라, 해를 보고 난 후에도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그 모습이 한결같이 보이도록 하라.” 내가 소신공양의 원을 공개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나 혼자 몰래 하다가 산불이라도 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0여 년 전 개운사에서 한 노스님이 칠성각 앞에 장작을 쌓아 놓고 소신을 했는데, 손상좌가 급히 노스님을 끌어내려 원을 이루지 못하고 화상만 입는 모습을 보았기에 혹 나도 생각지 못한 방해를 받을까 염려됩니다. 또 소신이 확실히 되지 않으면 다시 다비를 해야 하니 번거로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소신공양을 공개하여 내 간절한 서원이 이뤄져 불보살님 은혜를 갚을 수 있길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이 허망한 몸뚱이를 태워 공양함으로 수많은 중생들이 기쁨을 얻고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합쳐지고 사회도 안녕하고 헐벗고 괴로운 사람이 없어질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뜻을 모르고 상좌들이나 신도님들이 자꾸 말려서 큰 일입니다.
그래도 나는 서원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도 몰래 혼자라도 이루고 말 것입니다.
현행법에 의하면 내 행동이 가당치 않은 것임을, 부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니 누구도 방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 경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부처님은 인간의 삶을 자업자득(自業自得), 즉 내가 해서 내가 받는다. 이것이 인과(因果)입니다. 자업자득은 유심소현(唯心所現)의 인과, 유심소현은 내 귀에 들리는 것, 내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는 것은 내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 경험에 의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꽃은 무엇이냐 하면 내 마음이 만들어 낸 작품, 강아지가 보는 하늘은 강아지의 생각이 하늘을 보는 것이고, 노인이 하늘을 보는 것은 노인의 생각이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생각은 그 사람이 행동하고 경험했던 것이 만듭니다. 그것을 업식(業識)이라고 합니다. 업이 인식을 만드는 것, 자신의 경험대로 세상을 보고 자기 경험대로 인생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오직 마음이 나타낸 것, 그래서 원효 스님은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셨고, 중국의 육조 스님은 “저 앞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오직 내 마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유심소현입니다. 천지만물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천지만물이 없어져도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이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는 깨끗하고 청정한 진성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상락아정, 부처님은 이것을 불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업자득은 유심소현의 인과입니다.
불자가 기도를 하려면 자업자득ㆍ유심소현이라는 인과를 믿고 불생불멸ㆍ상락아정을 믿고 해야 합니다. 우리 몸이 생로병사를 겪어도 항상 즐거운 상락, 변하지 않는 법성, 진아, 더럽혀지지 않는 청정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그렇게 믿고 기도하면 죄업은 소멸되고, 공덕은 증득 되어, 기도는 공덕 성취와 죄업 소멸입니다. 불교의 기도 방법은 첫째, 칭명(稱名) 기도입니다. 즉,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 “약사여래불~약사여래불~”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존함을 늘 부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예경, 공양, 회향입니다. 이처럼 이뤄진 공덕을 나 혼자 가지면 생사업(生死業)인데 이를 이웃들에게 회향하면 무진공덕을 깨달음으로 돌아갑니다. 음식을 많이 만들어 나 혼자 먹지 못하면 썩게 되지만 여러 사람과 나눠 먹으면 생명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혼자 가지면 그냥 없어지고, 그것이 끝나면 괴로워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공양하고, 보시하고, 회향하면 그것이 무진공덕으로 변화를 합니다. 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나쁜 것을 소멸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바로 일상정진 기도입니다. 우리 중생의 모든 허물이 아만(我慢)에서 생깁니다. 아만은 나만 인정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것, 여기서 죄업이 발생하고 허물이 생겨나게 됩니다. 모든 대상을 공경하면 일체의 죄업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하심(下心)하는 예경 기도가 중요합니다. 절하는 것은 무진업장이 소멸되고, 공덕이 쌓이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실상이 있습니다. 본성으로 돌아가 생로병사의 실상으로 예배하는 것,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절을 많이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예경 기도를 자꾸 하면 그 가운데 한없는 기쁨과 안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들은 기도를 하면서 축원을 해야 합니다.

“복덕은 성취되고 죄업은 소멸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복덕성취, 죄업소멸의 축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회 축원입니다. 불교의 기도 가운데 참회는 수행도 되고 기도도 됩니다. 중생들은 어리석고, 남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내가 만들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모 탓, 팔자 탓, 시대를 잘못 만나서 등등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어리석어서, 그리고 내가 잘못된 업을 많이 쌓아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게 않겠습니다’라고 참회하면서 참다운 자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하고 보내야 합니다. 나의 잘못을 참회하고, 욕심을 비우고 지혜를 쌓아 항상 참회하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신심 축원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장애가 생기는 일이 있고, 이뤄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를 한다고 전부 다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이뤄진다면 자업자득과도 맞지 않습니다.

과거세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질 사람이지만 기도를 통해 그 사람의 죄업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나의 죄업에 대해 기도했기 때문에 이만큼 죄업이 작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 차를 타려고 뛰었는데 못 탔습니다. 근데 차가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들은 주변에 외호신장이 다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그 일이 나쁜 일이 것 같으면 불보살님이 미연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깊은 믿음입니다. 그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신심이 있어야 올바른 기도가 됩니다. 장애가 있는 것은 내 죄업 때문에 장애가 있는 것, 한결같이 마음공부 열심히 하고 실천하십시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