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불성(眞如佛性)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그런 법어(法語)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衆生)이 본 산 그대로 산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에 가려서 실제적(實際的)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미처 못 보며, 또한 일체(一切)의 존재(存在)의 본성품(本性品)도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법어는 우리 중생이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우리 중생이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의미(意味)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고마문령(藁馬聞鈴)처럼 따라 가면서 그대로 공부하는 성문승(聲門乘)이 있고, 또는 스스로 명상(暝想)을 하여 인연(因緣) 따라서 깨닫는 연각승(緣覺乘)도 있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實相) 그대로를 믿고 닦아 나가는 보살승(菩薩乘)의 법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법 가운데서 참선(參禪)하는 법이 가장 최상승(最上乘)의 법이며 바로 불도(佛道)의 정문(頂門)입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도 최학도(最學道)라고 했듯이 우리 불자(佛子)가 배우는 공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배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신미(辛未)년 삼동(三冬) 결제(結制)를 즈음해서 최학도(最學道)를 공부하고자 많은 스님들이 모였고, 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최학도인 선(禪)에 대한 간절한 서원(誓願)으로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비단 우리 불교(佛敎) 문중(門中) 뿐만 아니라, 고도로 문명(文明)이 발달된 오늘날의 세상에는 불교 외에도 많은 종교(宗敎)가 있고 또 종교 외에도 가지가지 수련법(修練法)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 수련법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체계(體系)를 세워 놓고 각기 자기 수련법이 제일 수승(秀勝)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때에 이 참선법(參禪法)이 어째서 가장 수승한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우리 공부에 대한 바른 체계가 없으면 그냥 그 쪽으로 따라가고 맙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추운 날씨에 이렇게 참여하신 여러분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참선법이 가장 수승한 성불(成佛)의 지름길이고, 이른바 최학도(最學道)이며, 성불(成佛)의 정문(頂門)인 것을 아실 수 있도록, 아니면 어렴풋이 짐작이라도 하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일대시고(一代時敎)라!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49년 동안 설법(說法)을 하셨습니다. 45년 설도 있으나 49년 설을 더 많이 주장합니다. 그런 설법 가운데서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하는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방편설(方便設)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年度)로 따지면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12년 동안에는 우리 중생 차원(次元)에서 상식적으로 보고 느끼는, 있다 없다, 그런 차원에서 하신 법문(法門)이 초기(初期) 법문, 즉 초기 근본불교(根本佛敎)의 법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 만중생(萬衆生)의 본성품(本性品)과 현상(現象)을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방편(方便) 법문(法門)을 하신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문(法門)은 그 속에 모든 심심 미묘(甚深微妙)한 뜻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 중생들은 그냥 문자(文字)나 말만 집착(執着)해서 부처님의 초기 경전을, 있다 없다에 관해 말하고 또 일반 세간적(世間的)인 윤리(倫理), 도덕(道德)의 차원을 말하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초기 법문은 우리 중생의 그릇 따라서하신 법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도의 법문은 기독교(基督敎)나 유교(儒敎)나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즉 악(惡)을 피하고 선(善)을 행하라든가, 행복을 이해서 우리가 노력한다든가 명상(暝想)을 조금 한다든가 하는 정도의 그런 법문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衆生)의 그릇이 조금 익어진 때는 부처님이 금생(今生)에 나오신 뜻이 그냥 세간적(世間的)인 범주(範疇), 일반(一般) 윤리(倫理) 도덕적(道德的)인 범주에 멈추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사실 그대로를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제법공(諸法空)의 공도리(空道理)를 말씀하셨습니다.
22년 반야설(般若設), 즉 49년 설법(說法) 가운데서 22년 동안이나 공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 것인가? 우리는 그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소중한 내 몸이 원래(原來) 공(空)이다. 국민학교부터 대학(大學)까지 공부한 소중한 내 관념(觀念)도 공(空)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허무(虛無)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상지혜(實相智慧)에서 볼 때에는 공(空)인 것입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大師)가 도(道)를 깨닫고 법희선열(法喜禪悅)에 넘쳐서 지은 노래인 증도가 가운데서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하고 각 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그런 것이 분명히 실재(實在)하게 보이지만 깨달은 뒤에는 이 대천세계(大千世界),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든 세계가 텅텅 비어서 보인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뜻을 우리 중생들이 쉽사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모르면 우리 불자님들은 그저 있다, 없다, 나다, 너다 내것이다, 네 것이다 하는 차원(次元)에서 머물다가 맙니다. 따라서 번뇌(煩惱) 해탈(解脫)을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다 해탈(解脫)하고 모든 번뇌(煩惱)를 다 멸진(滅盡)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삼계(三界)를 해탈하는 가르침입니다. 번뇌에서 해탈해야만이 참다운 자유(自由)가 있고, 참다운 행복(幸福)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인간론(人間論)이고 또한 바로 행복론(幸福論)입니다. 본래적인 인간(人間)의 참다운 자기(自己)를 아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가장 최상(最上)의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맛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번뇌(煩惱)에 구속(拘束)되어서 해탈(解脫)을 못하면 참다운 자유(自由)와 참다운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衆生)의 본(本) 근성(根性)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공(空)이라는 그런 공도리(空道理)를 모르면 우리 중생심의 차원(次元)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선(僞善)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자기가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자기가 살고 싶을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도덕(道德)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제법공(諸法空)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차원에서 위선(僞善)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성자(聖者) 외에는 위선가(僞善家)의 범주(範疇)를 못 벗어납니다. 성자(聖者)는 우주(宇宙)의 참다운 실상(實相)을 깨달은 분입니다. 내 마음의 본체(本體)가 무엇인가. 우주의 참다운 본 모습이 무엇인가. 참다운 실체(實體)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을 깨달은 분이 성자입니다. 우리가 남의 글을 본다 하더라도 깨달은 분상에서 쓰인 글은 조금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분들은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면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시비(是非)를 미쳐 못 떠납니다. 이와 같이 2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이 보는 이것은 다 비어 있다고 반야사상(般若思想)을 말씀했던 것인데, 그냥 비었다고 하면 우리 중생은 잘 납득(納得)을 못합니다. 어째서 비어있는 것인가? 무든 것은 인연생(因緣生)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결합(結合)되어 있는 것이 순간(瞬間), 찰나(刹那)도 머물지 않고 변화(變化)해 마지 않습니다. 인연생(因緣生)이고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시간적(時間的)으로 보면 항상(恒常)이 없으니까 무상(無常)이요, 궁 간 적(的)으로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공(空)이요,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은 다행히도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다 증명하였습니다. 물리학이라 하는 것은 물질(物質)의 도리(道理)를 체계(體系) 있게 공부해서 밝힌 것으로 바로 과학(科學)입니다. 그런 물리학이 모든 것은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비어 있다는 도리를 증명(證明)했습니다. 즉 말하자면 모든 것은 제로(zero)로,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증명을 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같이 철저히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하다는 반야사상(般若思想)의 도리를 과학자(科學者)도 다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그치지가 않습니다. 만약 이것도 저것도 다 비어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으며, 그야말로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 비어 있거니 무슨 행복(幸福)이 있으며 선악(善惡)은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그 공(空)에 그치지 않고, 모두는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며, 인연(因緣) 따라 모아져도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하기 때문에 바로 무상(無常)이요, 따라서 공간적(空間的)으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공(空)이요. 이런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입니다.
그러나 그 참다운 실상(實相)은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것 같이 있는 것만도 아니고, 또는 반야사상에서 말하는 그런 비어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본 것이 비어 있는 것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충만(充滿)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初期) 불교(佛敎)에서 있다, 없다, 좋다, 궂다와 같은 차원만 공부한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全部)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산은 저런 푸른 산이고, 물은 저런 영롱(玲瓏)한 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근래(近來)에 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런 도리를 그렇게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의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있는 범부심(凡夫心)에서 보는 것이지 청정(淸淨)한 불안(佛眼)이나 혜안(慧眼)으로 보는 안목(眼目)이 아닙니다.
독심(毒心)을 다 떠나버리고 번뇌(煩惱)를 다 여의여버린 부처님 눈, 성자(聖者)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봅니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시는 그런 안목에서는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법성(法性)의 산 법계성품(法界性品) 그대로 산이란 말입니다. 물도 그냥 물이 아니고 법성(法性) 수(水)입니다. 법성(法性) 산(山)이요, 법성(法性) 수(水)요. 실상(實相) 산(山)이요, 실상(實相) 수(水)란 말입니다. 현대(現代)의 병(病)은 무엇인가? 유물주의(唯物主義) 병입니다. 내 몸도 물지이고, 다이아몬드도 물질이고, 산(山)도 물질이고 다 물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물질 이것이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데서 연원(淵源)되기 때문에 공산주의(共産主義)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유물주의적인 제도(制度)는 설사 인간의 간혜지(幹慧智)로 이모저모 변용시킨다 하더라도 오래 못 갑니다.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간 뒤에 봄이 바로 오겠습니까? 응당 겨울이 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 우주의 법(法) 도리 그대로입니다.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시각(視覺)이 짧아서 우리 중생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바로 못 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絶對)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대체로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제법(諸法)이 허망(虛妄) 한 것인데 공 도리를 모릅니다. 연기법(緣起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공도리(空道理)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상(思想)은 법계연기(法界緣起)입니다. 우주의 실상(實相), 우주에 충만해 있는 끝도 갓도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인연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합니다. 잘나나 못나나 어떤 동물(動物)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 이루어진 파도(波濤)가 똑같은 물이듯이, 법성에서 이루어진 일체(一切) 존재(存在) 모두가 그대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도리입니다. 돌이요, 나무요, 사람이요 다 다르지만 성품(性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 성품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衆生)은 상(相)밖에는 못 봅니다. 현상(現象)밖에는 못 봅니다. 현상은 실재(實在)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 요 공(空)이란 말입니다. 참선(參禪)은 어떠한 것인가?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께서 설사 유루적(有漏的)인 간단하고 쉬운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가상(假相)을 떠나고, 가짜 이름(假名)을 떠나서 실상을 증명(證明)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와 같이 유루적인, 있다 없다 하는 유물주의적(唯物主義的)인 사고(思考) 방식(方式)을 떠나야 합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원래 실상에서는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가상(假相)에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공(空)도 그냥 공(空)이 아닙니다.
허무한 공(空)이라 하면 인연(因緣) 따라서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요. 진여불성(眞如佛性), 우주의 본성(本性)은 바로 내 마음의 본성(本性)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닌 하나의 정신(精神) 아니겠습니까. 생명(生命)입니다. 우주는 어떻게 형체(形體)가 되어 있던 지간에 하나의 생명체(生命體)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고 하지를 않습니다. 공간성(空間性)이 있는 물질이라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대소(大小), 장단(長短)이 있겠습니다마는 물질이 아닌,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이 없는, 그러한 순수생명(純粹生命) 자리는 여기 있고, 저기 있고, 또는 생겨나고, 소멸되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도리가 그냥 방편설(方便設)로 우리한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宇宙)의 실상(實相)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선공부는 이래저래 방편설 다 제해 버리고서 심즉시불(心卽是佛),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당체(當體) 그대로 부처이고, 꽃 그러면 꽃 그대로 부처입니다. 우주의 실상 그 자리, 불성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두워서 못 볼 뿐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천파만파(千波萬波)의 파도(波濤)라든가, 수십억 개 되는 거품 모두가 다 그대로 물이듯이, 이 현상계(現象界)에 이루어진 삼라만상(森羅萬象), 하늘에 있는 모든 성수라든가, 일체 존재(存在)가 그대로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믿고 하는 공부가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입니다.
이것이 중국(中國)을 통해서 들어온 이른바 조사선(祖師禪) 도리(道理)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마음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닫아 놓고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고 이렇게 걸림이 있는 공부는 참선 공부가 못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또는 하나의 곤충과 내가 둘이 아닙니다. 인류사회(人類社會)는 20세기의 문명사회(文明社會)까지 이르렀습니다마는 현대와 같은 고도 산업사회는 그저 물질(物質)을 많이 만들고 자기가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모두가 물질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것은 한계(限界)가 있기 마련이라서 내가 많이 소유(所有)하려면 저 사람은 적게 소유해야 되므로 결국은 싸우고 맙니다. 따라서 유물주의(唯物主義) 사상에 입각한 자본주의(資本主義) 또는 공산주의(共産主義) 기타 그런 주의들은 결국 우주의 진리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해악(害惡)과 더불어서 붕괴(崩壞)되고 맙니다. 인류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한두 번 시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까 앞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옳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자유 경쟁을 하고 소유(所有) 관념(觀念)을 끝도 갓도 없이 확대해 간다면 그것 역시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주의, 생명주의(生命主義), 즉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 성공도 하고 마음도 편하고, 드디어는 해탈(解脫)을 하게 됩니다. 살생(殺生) 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淫亂) 한 짓 하지 말라 등의 부처님 계율(戒律)도 그냥 부처님께서 도덕적(道德的)인 차원을 위해서 덕목(德目)으로 시설(施設)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로 보아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니까 진여불성(眞如佛性) 도리에 따르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함부로 해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저것 가지 이파리 다 제(除) 해 버리고서 근본(根本) 줄기와 뿌리만 가지고 하는 공부, 이것이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따라서 중국(中國)을 거쳐 온 조사선(祖師禪) 도리는 부처님 법문(法門) 가운데서 꼭 거쳐야 하고, 가장 발전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께서도 '내 법문(法門)은 본체(本體)를 안 여윈다.' 하셨습니다. 상(相)에 걸리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고, 무(無) 자를 하고, 어떠한 화두(話頭)를 든다 하더라도 본체를 떠나버리고 그냥 의단(疑段)만 품어서는 그것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參禪) 이것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敎)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주만물(宇宙萬物)은 오로지 불심(佛心)뿐입니다. 중세(中世) 데카르트나 다른 철인(哲人)들이 물질(物質) 따로 마음 따로 이른바 물질과 정신(精神)의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서구(西歐) 문명(文明)은 대체로 물질과 정신 양원론(兩元論) 또는 창조주(創造主) 하나님한테서 우리가 섭리(攝理)를 받는다는 두 가지 사상(思想)이 지배(支配)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 우주(宇宙)를 지배(支配)한다.' 하는 식의 서투른 말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 성경을 우리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되어 있단 말입니다. 다만 유태교(猶太敎)나 또는 구교(舊敎)의 사상(思想)을 주로 확대시켜서 말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만약 하느님이 우리 사람 떠나서 대상적(對象的)으로 하늘 어디인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기독교(基督敎)는 그야말로 형편이 없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또 능(能) 하지 않음이 없다는 이른바 범신론적(汎神論的)으로 되어버려야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다운 진리(眞理)가 됩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우리 밖의 저 하늘에 계시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벌(罰)을 주고, 종말론이 있어서 천구백 어느 해에 천지 우주가 다 파괴(破壞)가 되어 기독교(基督敎) 믿는 사람만이 휴거라고 제도를 받고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식의 가르침이 20세기 이렇게 문명시대(文明時代)에 나와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어쩌다가 금생(今生)에 다행히 부처님 법(法)을 만났습니다. 부처님 법(法)은 무가정(無假定)의 원리(原理)입니다. 이것저것 다 들어 있습니다. 과학(科學)도 가장 참 과학이고, 철학(哲學)도 가장 참 철학이고, 종교(宗敎)도 가장 참 종교입니다. 따라서 참선(參禪) 공부할 때는 먼저 신(信)이 앞서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본체(本體)를 본, 법성(法性) 자리를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본체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하겠습니까?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여기 있고, 저기 있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불성이 아닙니다. 우주는 진여불성, 불교는 진여불성 일원론(一元論)입니다. 우주(宇宙)는 불심(佛心)뿐입니다. 불심 이외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연기법(緣起法) 따라서, 법계연기(法界緣起) 따라서 우주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생겨나고 다른 것이 이루어지곤 합니다. 따라서 물질이 아닌 우주의 정기(精氣)인 진여불성이 우주가 되고 무엇이 되고 했기 때문에 설사 상(相)으로 해서 사람 같은 상을 나투든, 산(山) 같은 모양으로 있건 그런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산 그대로 바로 불성이고 사람 바로 그대로 불성입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요, 또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요,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의 돈오(頓悟)에서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바로 부처라는 것은 사람만이 바로 부처란 말이 아닙니다. 어떠한 것 당체(當體), 책상(冊床)이면 책상 모두가 다 그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못 볼 뿐입니다. 중생이 못 본다 하더라도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위시한 무수한 성자(聖者)들이 다 사실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을 먼저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먼저 신(信)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흐리멍덩한 눈으로 해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 따르면 우주 이대로 진여불성이요, 이대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요, 이대로 광명(光明)이 충만한 광명의 세계요, 이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더러는 경(經)에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 밖에 있다고 하나, 이것은 우리 중생이 하도 잘 모르니까, 미개(未開)한 시대에 그렇게 말씀하셔야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같이 모든 물질이 다 비어있고 물질의 근본이 에너지(Energy)뿐이라는 대명천지(大明天地) 과학문명(科學文明) 시대에 와서는 그런 법문(法門)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저 공간(空間) 세계에 극락세계가 있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식(識)이 맑은 정도에 따라서 맑은 식이 사는 색계(色界)도 있고, 무색계(無色界)도 있습니다. 가장 맑아서 천지우주의 본래적인 진여불성과 같은, 맑은 식이 사는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마음이 참말로 맑아서 한 점도 티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에서 바로 극락의 행복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몸이 저 공간(空間) 속에 몇만 리 성층권(成層圈)에 있으나, 자기권(磁氣圈)에 있으나 또는 전리권(電離圈)에 있으나, 공중 높이에 있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으나, 어디에 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식이 얼마만큼 맑은가에 따라 인간정도 같이 맑으면 이 대기권(大氣圈) 속에서 고생만 하는 것이고, 더 맑으면 그때는 저 공거천(空居天)이라는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시불(本來是佛), 즉 본래 부처이니 무루지성(無漏智性) 본 자 구족(本自具足), 즉 때 묻지 않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지성(知性)을 원래 갖추고 있으니까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바로 부처요, 심작시불(心作是佛), 즉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단 말입니다. 상(相)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허망(虛妄) 한 것이지만 본성품(本性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석가모니의 지혜(智慧) 요, 예수의 지혜요, 공자의 지혜요, 무량(無量)의 지혜를 우리가 갖추고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신앙(信仰)은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본래(本來)는 어느 것과도, 진여불성(眞如佛性)과 비교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 불성(佛性)입니다. 불성 차원(次元)에서는 나나, 너나 여기 지금 우리에게 다 불성이 있습니다. 이 공간(空間)이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공간은 산소나 수소 등으로 채워져 있는 공간인데, 산소나 수소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여불성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나를 위해서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서 남을 구박(驅迫)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 열어버려서 자타(自他)가 없고, 천지 우주에 참말로 있는 것은 공간성(空間性)도 시간성(時間性)도 인과율(因果律)도 초월(超越)한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라고 생각해야 비로소 참선(參禪)하는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만이 마음을 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염불(念佛)을 하던 주문(呪文)을 하던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명상(暝想)이나 모두가 부처님 공부는 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중생(衆生)이 모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이래저래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참뜻은 시간성, 공간성을 또는 인과율을 떠나버린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있습니다. 법계(法界), 법성(法性), 여래장(如來藏)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러한 법계(法界) 도리(道理)를 확실히 믿고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런 때는 화두(話頭)를 들어도 좋고, 염불(念佛) 해도 무방하고 또는 주문(呪文)을 해도 무방합니다. 저는 지금 조실(祖室) 입장에서 이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회상(會上)이 하나 이루어졌고, 이제 나이도 제일 많고 참선도 오랫동안 했으니까 하나의 회(會)의 어른인 회주(會主)의 입장이지 저는 조실(祖室)이 아닙니다. 조실(祖室)이라는 것은 불심(佛心)을 사무쳐 깨달아서 행해상응(行解相應)인 동시에 명행족(明行足)이라! 밝아서 우주(宇宙)의 모든 것을 다 훤히 밝힌단 말입니다. 또 행(行)도 다해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한단 말입니다. 삼명육통을 다 하는 것보고 명행족이라고 합니다.
불심(佛心)을 사무쳐 깨닫고서 명행족까지 해서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아는 것과 행(行)하는 것이 다 같아 버려야 조(祖)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달마스님 말씀에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올 삼동(三冬) 동안에 공부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 자리! 본래 부처자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해오(解悟), 이치(理致)로 알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해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 못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닦고 닦아서 증오라! 불성(佛性)을 증명(證明)하는 그런 깨달음이 되어야 참다운 깨달음인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탐욕심(貪慾心)도 번뇌(煩惱)도 어리석은 마음도 뿌리를 뽑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량(無量) 부사의(不思議)한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진여불성은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삼명육통(三明六通) 무량(無量) 신통(神通) 지혜(智慧)를 다 갖춘 그 자리, 그렇게 믿어 버려야 그렇게 됩니다. 초기(初期) 경전(經典)에 나와있는, 부처님께서 더러는 중생들이 교만할 때는 당신 몸을 하늘로 나투셔서 하늘을 걷고 날으시는 등의 일들이 동화(童話)에서난 나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안 믿는 분들한테 알려드릴 길이 없어서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당시 정통(正統) 조사(祖師)는 모두가 다 중생이 말을 안 들으면 그냥 신통지혜(神通智慧)를 갖추셔서 몸으로 보여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중생들의 마음을 다 조복(調伏)시킨단 말입니다. 그런 지혜(智慧)가 우리한테도 분명히 다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추고 우리가 참선(參禪) 공부나 염불(念佛) 공부를 한다면 그런 도리(道理)에 걸음걸음 가까워집니다. 그와 같은 우리 중생(衆生)들이 무엇 때문에 있지도 않은 그림지같은 물질(物質) 때문에 다투고 싸우겠습니까? 또 권력(勸力)이나 감투 같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유루(有漏)라 하는 유물주의(唯物主義)에 병(病) 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병(病)들 때문에 사회(社會)가 혼란스럽고 도덕(道德)도 피폐(疲弊)되었으므로 그 병을 고치려면 그저 윤리(倫理)를 바르게 한다거나 남한테 베풀라는 식으로 해서는 이렇게 총명(聰明)한 시대(時代)에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근본(根本) 뿌리에서부터 인생(人生)의 바른 가치관(價値觀)으로써, 내 생명(生命)은 원래(元來) 물질(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내 사는 집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고, 내 재산(財産)이나 내 권리(權利)나 모두가 다 역시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려야 비로소 자동적으로 사회(社會)는 평등(平等)이 되고, 평화(平和)가 되고, 자유(自由)스럽게 됩니다. 우리 습관성(習慣性)이 금생(今生)에 나와서 배운 것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집에서 배운 것이나 학교에 가서 배운 것이나, 대학(大學)까지 배웠다 하더라도 모두가 있다, 없다 하는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 범위 내에서 배웠습니다. 사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는 철학(哲學)하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못 배웁니다. 그러기에 승려(僧侶)가 되어도 있다는 생각을 절대로 못 떠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못 느끼고서, 반야사상(般若思想)을 왔다 갔다 한다 하더라도 공부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과거 전생(前生)에 사람으로 있다가 도는 다른 동물(動物)로 있다가, 천상(天上)에도 있다가 또는 보살(菩薩)도 더러는 되었다가 이렇게 돌고 돌다가 금생(今生)에 왔는데 금생에 또 나쁜 버릇만 많이 배웠습니다. 나쁜 버릇만 많이 심어 놓아서 그 습관성(習慣性)을 떼자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습관성(習慣性)을 뽑아버리기 위해서 기도(祈禱)도 모시고 참선(參禪)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敵)하고 싸울 때 집중적(集中的)으로 공격(攻擊)해야지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 하면 결국은 적이 다시 세력(勢力)을 만회(挽回)해 가지고 덤벼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번뇌(煩惱)하고 싸울 때도 집중적으로 번뇌를 조복(調伏)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삼동결제(三冬結制)나 백일기도(百日祈禱)를 합니다. 공부하는 우리 스님들, 얼마나 소중한 스님들이십니까. 오호사해위상객(五湖四海爲上客)이라! 출가(出家)한 분들이 모든 인간(人間) 존재 가운데서 상객(上客)입니다. 재가(在家) 불자(佛子)님들께서는 우리가 공부를 잘못하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하나의 아만(我慢)이 아닌가?라고도 생각하시겠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냥 스님네가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온갖 오욕(五欲)을 뿌리치고 스님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삼동(三冬) 동안 또 여름동안 3개월씩 될수록 산문(山門)도 안 나가고 오직 부처님을 지향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 하는 나쁜 습관성(習慣性)이 별로 많지 않아서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런 습관성이 짙은 업장이 무거운 중생(衆生)들은 할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出家) 스님들 가운데는 설사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다 오호사해위상객(五湖四海爲上客)입니다. 중생 가운데 상객(上客)입니다. 우리 출가한 상객들이 이번 삼동 결제동안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상(最上)의 도리(道理)인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 바로 부처이고,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즉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원래 셋이 조금도 차이가 없는 도리를 증명해 보이도록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우주(宇宙)는 오직 부처님 일원주의(一元主義)입니다. 오직 불심(佛心) 일원주의(一元主義)입니다. 물질(物質)은 중생(衆生)이 잘못 보아서 상(相)을 보고 물질이라 하는 것이지, 순간순간 변화(變化)해서 마지않는 그런 것이 물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상(相)이 변화(變化)하는 것이지, 본질(本質)이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물질은 없다는 생각을 우리 스님네는 꼭 하시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재가 불자님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 의지해 나올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중음계(中陰界)에서 식(識)으로 헤매다가 부모님 연(緣) 따라 우리가 태중(胎中)에 들어가서 이렇게 인간(人間)이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 우리 식(識)은 식(識)대로 갑니다. 우리 몸은 그대로 지(地)는 지(地)대로, 수(水)는 수(水)대로, 화(火)는 화(火)대로, 풍(風)은 풍(風)대로, 산소(酸素)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지고 맙니다.
지금 이러한 우리 몸은 전생(前生)이나 내생(來生)에는 분명히 없습니다. 이런 도리(道理)는 우리가 알겠지만, 이대로 공(空)인 줄은 잘 모릅니다. 이대로 공(空)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색즉공(色卽空), 즉 물질(物質) 그대로 공(空)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만 열어버려서 제법공(諸法空) 도리(道理)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걸림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공부는 순풍(順風)에 돛단배입니다. 우리 사부대중들께서도 모두가 다 허망(虛妄)하다고 먼저 아셔야 합니다.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어버이 도리(道理)를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게으름 부리고 만다거나 하는 것은 공도리(空道理)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因緣)은 소중한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모든 중생(衆生)이 성불(成佛) 하기 위하여 최선(最先)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실상도리(實相道理)를 순간 찰나도 안 여의고 공부하기 위해서 염불(念佛)이 있고 주문(呪文)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실상도리(實相道理)를 안 여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라는 여하시불(如何是佛) 잇고? 달마(達磨) 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라는 여하시(如何是)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잇고? 본래(本來) 면복이 무엇인가라는 여하시(如何是) 본래면목(本來面目) 잇고? 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도리(道理)를 우리한테 알게 하기 위해서 이래저래 시술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참선(參禪)이 아닙니다. 참말로 알아버렸으면 가만히 묵죠(默照)해서 그대로 비춰 보아도 무방합니다. 본(本) 체성(體性), 본(本)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만 여의지 않으면 염불(念佛) 해도 선(禪)이요, 가만히 비추어 명상(暝想) 해도 선(禪)이요, 화두(話頭)를 의심(疑心) 해도 선(禪)입니다.
참선(參禪) 공부에는 문자(文字)로, 이치(理致)로만 알고, 참다웁게 닦지 않는 문자선(文字禪)도 있고,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밝아 있는가 내 마음이 얼마만큼 공부가 되어 있는가를 모르면서 하는 암중선(暗中禪)도 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참선도 있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는 경계(境界)가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성불(成佛)까지는 단박에 벗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특수(特殊) 한 경우이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의 육 년 고행(六年苦行)이 있듯이 우리 중생(衆生)들이야 말로 오랜 세월 동안 닦고 닦아, 습기(習氣)가 녹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박에 되기는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過程)에서 무수(無數)한 경계(境界)가 나옵니다. 더러는 기쁘고 더러는 부처님 같은 모양도 나오고, 더러는 광명(光明)도 비춥니다. 그런 모양들이 모두가 다 허상(虛像)입니다. 내 몸 스스로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진여불성(眞如佛性)과 하나가 되기 전에는 모두가 허상(虛像)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계(境界)가 오든지 간에 실상(實相)이 아니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별 스승도 필용 jqt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금년 삼동(三冬)에 우리 스님네가 꼭 마음을 훤히 열어버려서, 정말로 습기(習氣)를 녹여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한사코 증명(證明)하실 것을 기원하면서 부탁드립니다. 재가(在家) 불자님들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 행복(幸福)을 위해서나, 또는 나라를 위하는 가장 큰 애국심(愛國心)은 무엇인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근본(根本)도 모르면서, 사회(社會)에 참여하면 된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여도 좋으나, 사회(社會)에 참여를 한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인 본질(本質) 자리, 본성품(本性品) 자리를 깨닫는 데에다가 역점(力點)을 두는 것이 참다운 사회참여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근본적(根本的)인 사회(社會) 병리(病理)를 우리가 제거합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가 사회 참여를 못했습니까? 사회주의(社會主義)가 사회 참여를 못했습니까? 함부로 참여하면 날뛰기만 하고 그것이 아무 도움이 못됩니다. 본질적(本質的)으로 내 자성(自性)이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주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생명(生命)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그 자리를 깨닫기 위해서 나가는 길이면 모두가 다 참다운 사회참여가 됩니다. 설사 선방(禪房)에 있던, 자기 방에서 명상(暝想)만 하고 있던 또는 사회(社會)에 나가서 기치를 들고 여러 가지 자기(自己) 주의(主義)를 표방하고 운동권(運動圈)을 하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우주(宇宙)의 본래(本來) 성품(性品) 자리를 분명히 자기(自己)가 깨달으려고 애쓰고, 또는 만 중생(衆生)을 위해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지닐 때는 모두가 다, 농장(農場)에 있으나 회사(會社)에 있으나 공장(工場)에 있으나 진정(眞正)한 사회(社會) 참여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금생(今生)에 무상(無上)의 대도(大道)를 성취(成就)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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