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건 다 다릅니다. 당장 밥 한 끼가 없어도 마음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밥은 저절로 들어오게 돼 있죠. 아마도 그 뜻을 잘 모르시는 분도 많을 거예요. 당장 밥 한 끼가 없는데 어떻게 좋을 수가 있나 이러겠죠. 자꾸만 나무를 비유로 드는데 나무를 한번 보십시오.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싹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걱정을 안 해요. 그와 같이 우리도 불성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불성이 나를 형성시켜서 이끌어가고 있는데 왜 주인의 걱정을 내가 맡아서 해야 됩니까? 그렇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 맡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공했으니까 없다, 나는 본래 이미 죽은 거다, 공해서 죽은 거다, 자타가 같이 죽은 거다, 자타가 더불어 같이 나투고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그것 역시 죽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고요하고 텅 비었으니까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게 안과 밖이 텅 비었으니까 그것은 이름도 없는 이름이 아주 찬란합니다. 그래서 ‘이름조차도 없는 그 이름이요’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다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대로가 부처예요. 그런데 차원에 따라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성이나 유전성이나 이런 것을 모두 몸뚱이 속에 인연으로 삼았기 때문에 때가 되면 그게 차례차례로 나오고 괴로움이 생기고 이러죠. 그러나 그러한 것 저러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돌려 본다면 한없이 편안한 겁니다. 왜냐? 오늘 살다가 죽으면 어떻고 내일 살다가 죽으면 어떻습니까? 뭐가 그렇게 두렵고 어렵습니까? 죽는다 산다는 생각을 떠나면 그냥 편안한 겁니다. 먹고살아야 한다, 좀 더 괜찮게 살아야겠다 이런 게 없이 함이 없이 할 줄만 안다면 말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말이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너는 이미 공했다, 공해서 없다, 네가 하는 것도 없고 네가 앞으로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네가 공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온 것도 없고 나온 것이 없기 때문에 갈 것도 없다 이런 말이죠. 이 도리를 알려면 무조건 자기 뿌리부터 믿어야 될 텐데 경전부터 보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이 말해주는 게 아니에요. 이 불성이라는 것은 내 뿌리 내가 믿고 내 뿌리에서 내가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주거나 누가 뺏어가거나 그런 게 없죠. 그런 것부터 알아야 나중에 가서 ‘아, 이게 이런 거구나’하고 경전도 한번 볼 수 있는 거죠. 그때 가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이 고통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시면 간단하죠. 바로 내 뿌리를 내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인 거죠. 믿는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그냥 웃음이 나는 정도죠. 만약에 병이 났다면 이럴 때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죠. 뼈가 부러지거나 뭐가 잘못돼서 꼭 수술을 해야만 될 때에 남의 손을 빌리는 경우가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내가 내 안에서 해결을 할 수도 있죠.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의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고 각자 마음속에 만물박사를 두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약사도 있고 의사도 있고 관음도 있고 지장도 있고 보현도 있고 법신도 있고 다 있거든요. 뭐든지 다 여기서 할 수 있는데 왜 딴 집으로 구걸하러 다니느냐 이 말이에요. 내 안에 보배를 두고서 왜 구걸을 살아야만 되느냐는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도리를 모르는 분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실지로 내가 실험하지 않은 것은 말을 못 하죠. 왜? 말 한마디 잘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게 옳은 줄 알고 갔다가 그 사람이 한데 떨어지면 나까지도 거기 포함돼요. 그러나 그게 무서워서가 아니에요. 나 때문에 괜히 그 사람까지 빠져서 이 한생이면 벗어날 것을 오히려 세세생생을 벗지 못하게 되니 그걸 생각하는 거죠. 이것은 재미있는 일도 아니고 재미없는 일도 아닙니다. 또 맘대로 웃을 일도 아니고 울 일도 아니에요. 여러분 이런 말 많이 들어보셨죠. 물같이 살라 하는 말요. 그리고 바람같이 살라, 구름같이 살라, 산같이 살라 하는 말도 잘 아시리라 믿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살면 좋은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해서 걱정이죠. 본래 인생은 한 생 살기가 바람같이 사는 거예요. 그것을 일깨워 드리기 위해서 한발 떼어놓으면 한발 없어진다고 늘 얘기하잖아요.
바람같이 없어진다고도 했죠. 지나간 것은 이미 과거가 돼 버렸으니 없고 앞으로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고 그냥 현재 묵묵히 걸어갈 뿐이라고요. 우리가 사는 것도 고정된 게 없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이 한 가지만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것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것을 바꿔서 돌아가면서 말을 하고 마음을 내니 그 마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마음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살면서 이 도리를 모른다면 한생을 그냥 헛되게 사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밥 잘 먹고 돈 잘 쓰고 옷을 잘 입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세계가 어떻게 사느냐도 우리 마음에 달려 있어요. 우리 마음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하고 마음을 내면 그렇게 돌아가죠. 누구나 잘 되는 걸 좋아하지 못 되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리 국운이 없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국운을 있게 만드는 것도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전에는 너무도 사람들이 모르는 게 많아서 불로 재앙을 받고 물로 재앙을 받고 바람으로 재앙을 받고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마음으로 재앙을 받게 돼 있어요. 그리고 마음을 뺏기고 살고 마음을 잡아먹고사는 시대가 됐다는 얘기죠. 어떤 사람이 참 분하고 속상해할 때 옆에서 말 한마디를 해서 가라앉혀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때 상대는 액운을 면할 수 있거든요. 만약 그것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왈칵 생각대로 다 나와버린다면 보이지 않는데서 액운이 따르는데 그 액운을 없애주는 것도 멋있는 일 아닙니까. 우리가 돈이 있다고 해서 돈으로만 하는 것이 보시가 아닙니다.
무심 보시 즉 공심의 보시, 그러니까 무주상 보시라고 해도 되죠. 우리가 어떤 불쌍하고 딱한 상황을 만났을 때 ‘참 안 됐다,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내도 무주상 보시가 되는 거죠. 물질이 있으면 주고 없으면 무주상으로라도 해야죠. 그러면 무심으로 했던 그 무주상이 그대로 이어져서 그 사람을 돕게 됩니다. 나는 다 겪어보고 하는 얘기예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아무 말없이 여러분한테 100%를 다 대신해드린다면 여러분은 여기서 벗어나질 못해요. 정말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있기 때문에 부딪힘이 있어 공부할 수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그 가난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더 잘 알게 되는 것 아닙니까. 부자로 살 때도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서로 돕고 함께 하는 마음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다시 가난으로 떨어지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가 있죠. 가난하고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마세요.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픈 일들이 어디 한두 건입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안 보이는 자기 뿌리한테 다 맡기고 ‘너만이 길을 찾아가게 할 수 있고 ,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고, 너만이 지켜주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 그래도 애들은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하잖아.’하고 관할 수 있는 마음이 아주 필요할 때입니다. 계율이라고 하는 것이 오계니 십계니 250계니 하지만 단 오계도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계율 숫자를 넘어서 전체 계율을 지킬 수가 있어요. 불쌍한 사람이 파는 물건 사 줄 수 있는 마음, 누가 아프면 마음 내줄 수 있는 마음, 그런 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이며 계율을 지킨다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지킬 수 있으며, 지킨다는 말없이 지키는 것이 되죠. 곧 보살행이죠. 공심으로서 바로 공의 보시를 하는 것이고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씨를 똑같이 보살들이 받아서 행한답니다. 보살들이 정각을 이룬다 또는 응신으로서 무주상으로서 부처님의 가피를 갖는다 이러는 것도 전부 그런 마음씨에서 오는 거죠. 어떤 사람의 마나님이 죽어 전부 우는데 그 영감님만 ‘참 좋구나!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하고는 춤을 덩실덩실 추니까 전부 미쳤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선관선녀가 착 내려와서 꽃을 뿌리면서 모셔 올라가거든요. 그만큼 볼 수 있다 이런 거예요. 심안으로 불안으로 또는 법안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즐겁게 춤을 추는 거죠.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때는 죽는 것도 죽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처럼 올라가는 거니까요. 아니 승진이라면 표현이 너무 얕은데 그럼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할까요.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하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은 사자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데려가지만 마음공부 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데서 벌써 알고 지금 말로 하면 좋은 차로 모셔가요. 굳이 방편으로 말하자면 법륜마크나 만(卍) 자가 딱 붙어 있으니까 그걸 보고는 그냥 ‘아이고 오셨습니까?’하고 모시고 가는 거죠.
이렇게 좋은 법을 소홀히 듣지 마세요. 우리가 사는 것이 진짜 그러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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