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하는 것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마음공부 수행하게 하는 것도
또는 견성이나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해오(解悟)나 혜오(慧悟), 견성(見性), 돈오(頓悟)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도
그 누가 있어서 해오하게 하거나 견성하게 하거나 돈 오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자신이 수행 정진하게 하고 일심 일념 수행 정진하게 하기도 하고,
방일하거나 게으르게 하기도 하는 것도 그 자기가 하는 것뿐
오로지 마음밝혀 辛丑年 새해에도 부지런히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고통의 경계는 없다
대부분의 종교는 괴로움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하다가 점점 깊어져
그 괴로움을 어찌하지 못하는 단계가 되면 그 괴로움을 외면하거나
무작정 신에게 의지해버리는 것으로써 적당히 괴로움과 타협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괴로움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 괴로움을 소멸해버릴 때까지 괴로움의 문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바라보게 하고
집중하게 하고 수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불교가 가진 가장 큰 힘입니다.
그만큼 치열한 종교입니다
불교는 피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불교를 접한 사람이라면 어떤 것도 피하지 않고 뚫고 들어가
그것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마음에 대해 포기하지 말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마음을 한시도 놓치지 말고
노력하여 그 완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석가세존께서 성도 하신 것도 괴로움과 타협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입으로 내뱉는 말은 내 마음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구업(口業)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욕설이 방송과 SNS에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이 방송에서 욕설을 해 화제가 되고 있고,
구독자가 40만에 이르는 한 유튜브에서는 방송진행자가
한 장애인을 비하하고 욕하는 장면을 생중계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스마트폰용 카카오톡에서는
청소년들의 욕 대화가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합니다.
더욱이 충격적인 사건은 수업시간에
서로에게 욕을 해보라고 시킨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이 일로 경찰 조사를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본 종의 제2대 종정 대충대종사님께서는
“말은 마음의 꽃이다. 차라리 말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모르지만,
일단 말을 내뱉으면 그 결과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옛사람들도 “말은 내면의 거울이요,
인품을 담는 그릇이다.”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언어습관은 곧 그 사람의 인품과 직결됩니다.
불교에선 흔히 삼업(三業)을 기본교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몸으로 짓는 것을 신업(身業)이라 하고
말로 짓는 것을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것을 의업(意業)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 삼업을
얼마나 올바르게 단속하고 다듬느냐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입으로 짓는 구업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거짓말하는 망어(妄語)입니다.
둘째가 사람 사이와 관계를 이간질시키는 양설(兩舌)입니다.
셋째가 욕설과 남을 험담하는 악구(惡口)입니다
. 거친 말과 남을 헐뜯는 험담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이간질 등은
건강한 사회를 해치는 대표적인 악구(惡口)에 해당합니다.
넷째는 이치에 어긋나는 궤변을 늘어놓는 기어(綺語)입니다.
이들 4가지 입으로 짓는 구업은
단순히 사람의 감정만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야기하게 되면 살상을 부르게 되고,
위화감과 갈등을 조장해 나라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람은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태어난다.”며
함부로 구업을 짓지 말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과 관련하여 사람에겐
네 가지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새를 비유해 말하면, ‘구시라’는 소리는 좋은데 모양이 추하다고 했고,
‘새매’는 모양은 좋은데 소리가 좋지 않고,
‘올빼미’는 소리도 추하고 모양도 추하며,
이에 반해 ‘공작새’는 모양도 좋고 소리도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네 가지 부류가 있는데
첫째, 얼굴은 잘 생기고 행동은 점잖으나
법(法)을 외우지도 못하고 받들지도 않는 사람은 모양은 좋은데
소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몸은 비록 허름하고 행동거지는
뛰어나지 못하나 항상 법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스스로 받들어 행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소리는 좋은데 모양이 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계행(戒行)도 지키지 않고 법을 듣지도 않으며
혹 들었다 해도 바로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양도 추하고 소리도 추합니다.
넷째, 행동거지도 뛰어나고 얼굴도 단정하며 법을 항상 받들어 행하고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부끄러워하며 고쳐 나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양도 좋고 소리도 좋은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소리’란 ‘말’을 의미합니다.
착한 말을 하도록 사나운 말에 대한 허물을 지적하면
스스로 고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거칠고 사나운 말이 판치는 시대에 착한 말을 씀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불자들이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매 순간이 참된 명상의 시간
세존께서는 이 생에서
갖기 어려운 것이 네 가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몸을 받기 어렵고, 두두 번째 바른 법을 만나기 어려우며,
세 번째 바른 법을 가진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네 번째 진리를 깨우쳐 부처가 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중 세 가지를 가진 행운을 얻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고, 한국에 계신 많은 선지식들로부터
올바른 법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
깨닫는 일만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직 모를 뿐
누군가 서울을 찾아왔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혹은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만약 질문을 받은 사람이 “모릅니다.”라고 답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기 전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왜 오셨나요?
그 대답 역시 “모릅니다.”일 것입니다.
누구도 부모님께 메시지를 보내
“저는 한국에 태어나고 싶으니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말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 뱃속에서 나와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살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모두 바보입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바보가 되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나는 어디서 오고, 왜 왔으며, 무엇을 하러 왔는가?
또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원대한 물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6년 동안의 수행을 거쳐,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이 컵 안에 들어있는 것을 미국 사람은 ‘워터(Water)’라고 하고,
한국 사람은 ‘물’, 중국 사람은 ‘스웨이’, 스페인 사람은 ‘아쿠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워터입니까, 물입니까? 혹은 스웨이입니까, 아쿠아입니까?
만약 물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물’이라는 말에 집착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워터’라고 답한다면 영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지요
. 미국에 가서 목이 말라 아무리 물을 달라고 외친 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침내 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내가 필요한 물이다.”라고 말해도 그들은
“이것은 물이 아니라 워터입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엔 물은 없고 오직 워터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모두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 워터건, 물이건, 아쿠아건 이것들이 가리키는 바는 다 한 가지입니다
. 단지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행복이란
여러분은 언제 행복을 느끼십니까?
아마 내 마음대로 일이 이루어질 때 행복이 밀려들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롭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다 떠나서
끝까지 행복한 것을 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이일 체고(離一切苦) 득구 경락(得究竟樂)’이라고 하며
줄여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처럼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된다면 괴로울 게 없습니다.
더울 때 ‘시원해져라’고 하면 시원해지고,
추울 때 ‘따뜻해져라’고 해서 따뜻해지면 정말 살맛 나겠죠.
그런데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을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누군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란 말씀이죠.
가장 따뜻한 마음, 이를 불심(佛心)이라고 하는데
우리 모두가 이 마음을 가지고 있디
그런데 우리는 한눈을 팔고 있디
나보다 잘생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왜 잘생긴 것인지는 생각지 않고
우선 입부터 삐죽거립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 안 좋은 점이 먼저 보입니다
불심은 학문적·이론적으로 아무리 잘 이해하고 있어도
현실에서는 적용이 잘 안 됩니다
더우면 당장 짜증이 나거든요
그런데 경전에는 부처님이 짜증 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짜증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부처님 마음을 얘기하면서
현실에서는 당장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눈초리가 올라가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된소리가 나옵니다
아무리 안 해야지 안 해야지 다짐을 해도 그렇게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처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행복은 저절로 오는데 그게 힘이 듭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처럼 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부처가 되는 길
중생 심이라는 것은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것과 같다.
색깔이 있는 안경을 끼고 보면
자연히 모든 것이 그 색깔로 보일 수밖에 없다.
술 마시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 중에
원래부터 술 잘 마시고 담배 피우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잘못된 업의 놀음에 이끌린 것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죽어가면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리 자신을 갈고닦아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도를 해서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무엇이든 반드시 이룰 수 있고 안 되는 것은 단지
우리에게 신심과 용기 그리고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고 신심으로 행하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부처가 되는 빠른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심 불급 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이라는 것을 두고 보면
중생과 부처가 차별이 없는 하나’라는 얘기이다.
흔히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중생의
‘한 마음’은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창고
이 창고에는 두 가지 마음이 들어있는데 하나는 참된 마음,
즉 진여심(眞如心)이고 나머지 하나는
끊임없이 생겼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생멸심(生滅心)
. 진여심은 다른 말로 지혜 심이라고도 하는데,
밝고 깨끗한 본래 마음으로 절대 변함이 없는 부처님의 마음
반면 생멸심은 다른 말로 수연심(隨緣心)이라고 해서
환경과 대상에 따라 변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
우리를 중생이라 부르는 까닭은 생멸심에 사로잡혀 자주 마음이 오고 가는 탓
불교는 수행을 통해 이러한 생멸심을 다스리고
진여심을 드러내 지혜롭게 살도록 하는 종교입니다.
나쁜 사람도 부처라고 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을 뒤집으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통쾌한 이 의미를 일상적인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흔히 평상심을 도라고는 말하지만,
항상 물들고 오염된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뽕잎을 두고 비단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테지만,
뽕잎에는 비단의 성품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뽕잎을 먹은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서 목숨을 버려야지만
비단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비단에는 뽕잎의 모양도, 누에나 고치의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그것들이 모여 새롭게 태어났을 때
비단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 거짓말과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과연 저 사람도 부처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마음 바탕은 매한가지입니다.
본래 뽕잎에 있는 비단의 성품이 똑같듯
일체중생의 마음에 있는 근본 자성의 진여,
즉 밝음은 똑같다는 말, 그렇기 때문에 ‘평상심이 곧 도요,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해서
‘모든 생명이 다 부처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업을 잘못 지어서
그 과보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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