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이롭게 하면 나가 편해요!
요즘 세상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수행자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산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올 사람은 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한결같이 묻는 것이 ‘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겁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네가 싫어하는 거 남한테 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을 못해줄망정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한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한테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이 나를 원망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하나는 남이 잘못하는 것 무조건 용서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 보면 밤잠을 잘 못 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드는 것은 정해진 수순입니다. 잘못하긴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괴롭고, 병은 나한테 생기니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그렇게 말을 해 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그렇게 쉽게 말씀을 하시느냐고, 그렇지만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남을 용서하는데 돈이 듭니까? 노동력이 듭니까? 뭐가 힘이 들어 어렵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무조건 용서하면 됩니다. 용서는 곧 한 사람을 제도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참으면 안 됩니다. 그냥 털어버리면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것도 어차피 꿈속인데, 집착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도 미워하는 사람이 밉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올라오면 그 생각을 일으키는 너는 전부 잘하기만 했느냐고 스스로 되물어보세요. 사람마다 부처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이 바로 부처입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알고, 안에 있는 부처님이 알아서 잘못을 뉘우치고,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한다.
그리고 부처님과 선지식만 스승이 아닙니다. 잘못하는 사람도 스승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깨우치게 해 주니 더 큰 스승이지요.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지옥이지만 좋은 것이든 미워하는 것이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처처가 극락입니다. 나가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에 가도록 마음을 써야지 부처님한테 애걸복걸 빈다고 극락에 보내주지 않아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넘쳐나는데 세상은 왜 이리 갈등과 반목이 많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만 사랑을 합니다. 입으로 아무리 먹는다고 얘기를 해도 배부르지 않듯,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해서 부부 사이에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자주 말해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그러지만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가식입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부모가 자식한테 하듯 무조건 베푸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거짓말로 사랑하는 겁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겁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가식적인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존경에서 출발합니다. 존경하는 사람은 배신을 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왜 내 배우자를 존경해야 하는지 한번 따져볼까요? 단순 계산을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구 인구가 64억이라면 굉장한 경쟁을 뚫고 부부가 된 것 국회의원이 되는 일보다 대통령이 되는 일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부부가 되었단 말입니다. 지구상에서 남녀로 태어나 둘이 부부가 될 확률이 이렇게 귀한데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자식도 사랑한다면 인격적으로 존중해 줘야 합니다. 그 아이한테 맞게 해 줘야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부모 욕구불만을 채우는 도구로 자식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부 마음눈이 어두워서 그렇지 우리 모두가 우주에서 제일가는 ‘스타’입니다. 요즘 스타 보러 간다고 소리 질러가며 야단들인데 그건 자기 속에 있는 사리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사방으로 남의 사리 보러 다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세상 사람 전부가 스타입니다. 자기한테 맡겨진 배역을 잘 소화하면 스타가 됩니다. 거미, 지네, 두 발 짐승, 네 발 짐승, 땅 속, 물속, 하늘에 사는 짐승도 많은데 사람 몸 받아서 온 것만 해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이 됐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사람 몸 받았을 때 잘 살아야 합니다. 요즘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진정한 웰빙은 지금 이 세상 잘 살아서 팔자 운명을 뛰어넘어 팔자다 하고 가만있으면 그건 바보예요. 불교는 제 성품을 봐서 부처 이루고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제정신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종교는 이 세상 사는데 바르게 잘 살라고 나온 겁니다. 종교에도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맹신과 광신이 아닌 제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행하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불법의 가르침! 온화한 말과 밝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십시오. 나는 당신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남을 이롭게 하려는 원을 세우시고 그렇게 하면 남을 위하는 일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게 바로 극락입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불자들아!
현대사회는 참으로 복잡다단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과 생활에 필요한 장비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인간관계 역시 복잡다단하게 얽어져 툭하면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요즈음 힐링 프로그램이 높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본의 아니게 쉽사리 몸과 마음이 지치는 일이 많고 이를 고치기 위해 힐링에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점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책들이 주로 명상서적이나 심리학 종류들입니다. 이러한 책들은 현대인들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는 데 기여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은 목표를 향해 뚜렷하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활달한 기운을 유지케 하면서 창의력을 높여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란 뜻대로 쉽지가 않습니다. 내나 마음을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답보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이 힐링이며 힐링과 관계된 공간 및 프로그램에 의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힐링(healing)’은 치유를 뜻하는 영어로서 불교의 가르침과 매우 가깝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의미하듯 불교는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한다.
불경에서는 안락한 마음을 얻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덧없는 생각들을 끊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넉넉하고 안락하리라. 무엇이 덧없는 생각인가? 육신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좋고 나쁜 느낌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보고 느낀 생각들이 덧없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 주변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머리를 깎는다거나 침대를 바꾸거나 새 옷을 사 입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마음을 조절하려고 고생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로지 마음을 스스로 고요하게 가질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즉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시장터에 있어도 평안하지만, 마음이 번다한 사람은 외딴섬에 홀로 있어도 고요함을 얻을 수 없는 법입니다.
옛사람들에서도 마음이 맑고 순일하면 뜻하는 바를 성취했고 반대로 어둡고 조급하며 혼란스럽게 마음을 움직인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이렇다 할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 몸의 본체는 고요하나 내 몸의 작용은 느끼는 것이 많다. 고요할 때 보존하여 물처럼 담박하니 움직이면 살피되 낌새를 잘 살펴라. 어둡기 쉽고 혼란스럽기 쉬우니 언제나 조심하고 사사로운 취향과 욕심을 끊고 온갖 잡념을 없애라.
혹독한 관리가 조사하듯 샅샅이 살피고 무엇 하나 남기지 말고 촘촘한 빗자루로 먼지 쓸 듯 하라. 오랜 시간이 지나면 공부가 깊어져 나의 참마음과 참모습을 되찾으리라.” 안정복은 또 마음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눈과 귀와 손과 발과 입도 경계해야 할 내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눈에 대해선 “바르게 함을 보면 반드시 밝게 하고 악함을 보면 반드시 어둡게 하라. 올바르지 않은 색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나니 너의 눈을 거두어들여 밖으로 내달리게 하지 말라, 귀에 대해선 “선한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귀를 세우고, 악한 소리를 들으면 귀머거리가 되어라. 음탕한 소리는 참마음을 해치나니 너의 귀를 거두어들여야 정신이 안으로 가득하리라.
특히 입에 대해 안정복은 “말로 마음이 드러나니 길흉, 선악이 여기서 드러난다. 음식으로 몸을 기르나니 장수와 요절, 삶과 죽음이 여기에 달려 있다. 이로써 성인은 말을 삼가고 음식을 조절하나니 마음을 맑히는 요지로다. 사람들은 흔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안일한 마음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쪽으로 마음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설혹 발목을 붙잡고, 우울과 강박증이 내 심신을 옥죄며, 희망보다 절망의 깊이가 더해진다면 불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사회학자가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종교활동으로 맺어진 관계와 심리상태가 일반인에 비해 긍정효과를 더 높게 발휘한다고 합니다. “조용한 곳만을 찾는 이는 마치 검은 산 밑에 있는 귀신 소굴에서 사는 것과 같다. 시끄러움과 조용함에 끄달리지 않고 고요함을 잃지 않는 것만이 진정한 마음 공부인이다”
{경책 하고 덕목으로 삼아 가슴에 담아 가라, 무시로 들락거리는 인간들은 새기거라} 진실로 건강하고 활활 발발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마음을 잘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의 요체는 다름 아닌 마음공부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은 마음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_()_
참 보시는 기쁨 주는 것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은 기쁨이다!
그 기쁨은 사랑을 통해서나 물질적 소유를 통해서 아니면 종교적 희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온다
“인간에게 가장 큰 보시는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환희지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환희지 보살이 필요한 시대라고 봅니다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아닙니까
참선을 통해 우리는 낙을 얻을 수 있지만 세속에서는 오욕을 통해 낙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가 왜 좋은 것일까요? 진실로 나를 볼 수 있으면 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기쁨이 아닌 자연스러운 법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에 맞는 참선, 즉 수행을 해야 합니다. ” 인간의 전부는 사랑과 희망이다
바람같이 흐르는 세월을 붙들 수도 없고 떠나가는 인연을 붙들 수도 없을 때
인간은 가장 처연한 밑바닥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랑과 희망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올린다
그 속에 기쁨이 있다. 삶은 번뇌다 동천(冬天)엔 그리움이 산다
때론 하늘을 이고 때론 땅을 딛고 그 속에 그리움이 산다 겨울 가고 봄 온다
시퍼런 바다 위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중생의 아픔이다
‘불법(佛法)’이라는 마음공부!
세간의 일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세간에서는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재능이나 소질이 있거나, 학벌이 좋거나, 건강하거나, 그런 특별히 남들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뭐든지 더 잘 이루어내고, 성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불법 마음공부는 머리가 똑똑한 것과도 아무 상관이 없고, 특별한 자질이나 재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남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꼭 필요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 공부에서는 전혀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공부를 잘해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고, 일을 잘해야 진급도 하지만, 이 마음공부에서는 그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조건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님 법을 배우는 공부는 특별한 능력 갖추지 않아도 갈증 나면 물을 찾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가능 그렇다. 누구나! 바로 당신 말이다. 여기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깨달음을 근기가 수승한 수행자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왔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공부에 대한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다.
결가부좌를 오래 해야 하거나, 장좌불와 수행이 필수인 것도 아니고,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것도 아니며, 3000배, 1만 배 절 수행을 능숙하게 잘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전생부터 닦은 것이 있는 사람이 더 유리한 것도 아니다. 그 어떤 재능이나 능력, 치열한 수행력이나 극기, 높은 근기나 업장소멸 따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마음공부에는 그 어떤 자격도 필요치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진리에서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는 세계가 저 높은 곳에 따로 있어서 열심히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수행하며 노력해야지만 다다를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깨달음’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바로 깨달음이다. 내가 나를 찾고 있는 것일 뿐이다. 불이법이기에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색즉시공이란 말에서 보듯이 여기가 바로 거기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어디를 갈 것인가? 갈 필요가 없다면 가기 위한 노력이나 방법도 필요치 않다. 그렇다, 이 마음공부는 특별한 방법이나 특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공덕을 갖춘 뒤에, 준비가 된 뒤에 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 이 글과 마주한 바로 당신이야말로 금 이 주어진 생에서 이 공부를 시작하고 끝마칠 바로 그 사람, 참사람이다.
지금 눈앞의 바로 이 글자를 두 눈으로 볼 수 있고, 보고 듣고 느껴 알 수 있는 정도의 당연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자라면, 그 삶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누구나 조건은 완벽한 것이다. 이 마음공부는 반드시 깨닫겠다는 간절한 보리심, 알고 싶지만 알지 못함에서 오는 답답함, 반드시 이 본성을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목마름,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마음공부이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갈증이 심해지면 간절히 물을 찾는다. 물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보리심이요 발심이다. 물은 누가 찾을까? 목마른 사람이 찾는다. 물을 찾는 것에는 특별한 노력이나 자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목마름만이 필요할 뿐이다. 말 그대로 일체유심조, ‘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마음공부도 이와 같아서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발심, 보리심만 있다면 깨달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은 충족된 것이다. 이 공부는 길 없는 길이다. 특정한 정해진 깨달음의 방법이나 수행은 없다. 물론 역사 속에서 다양한 수행과 방편이 무수히 설해지긴 했지만 그 모든 방편은 목마른 사람을 물가까지 오게 하는 것일 수는 있을지언정 결정적으로 물을 들이켜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발 보리심이 가능케 하는 것이다.
마음만 간절하면 이 우주 법계가 알아서 이끌어준다.
그래서 깨달음은 내가 깨달음으로 가는 게 아니라, 준비된 자에게 진리 쪽에서 먼저 찾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절 인연이다. 발 보리심, 깨닫겠다고 하는 간절한 목마름, 그것이 시절 인연을 불러온다. 그러니 깨닫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다만 갈증과 답답함과 꽉 막힌 의심 속으로 뛰어들어 그 막막한 벽에 갇혀 있는 채로 버틸 뿐이다. 당신은 준비된 자인가? 목이 마른가?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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