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계가 그냥 텅 비어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 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하면 그 텅 빈 것을 아는 것은 따로 어떤 형상이나 자성을 가지고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 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앎과 텅 빔이 둘이 아니고 텅 빈 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살아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앎은 허공과 같이 텅 비었기 때문에 더럽혀질 수가 없다. 허공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봐야 더럽혀질 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 몸 안팎 따로 없이,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앎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앎이 나무에 있다. 산을 보면 그 앎이 산에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텅 빔 그 자체다. 그리고 그 텅 빈 앎은 어느 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안팎을 다 투과한다. 천지가 그냥 텅 비어있고 그러기에 주와 객 나와 세상을 동시에 포섭한다.
수행의 묘미!!
분명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떤 이는 또 관념으로 머리로 이해해서 나에게 따질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있다’고 하냐고. 없는 채로, 텅 빈 채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반대로 텅 빈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상으로 붙잡고 나서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어떤 대상이나 목표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사실 둘 다 문제이다.
생각 속에 갇혀 이해의 수준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항상 텅 빈 마음과 그 텅 빈 마음을 경험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자꾸 이분화(二分化)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텅 빈 마음을 관념으로써 ‘내’가 얻으려고 하거나 텅 빈 마음을 경험하고 나서도 ‘내’가 남아 있다고 오해한다.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오해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후, 의식이 다시 깨어 주・객을 포섭하는 앎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상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기 때문 무자성, 무아임을 바로 아는 앎은 연기(緣起)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연기해서 일어났다고 하면 그 앎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 깨달음은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텅 빈 앎은 세상에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텅 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것이 수행의 엄청난 묘미 그 앎은, 그 텅 빈 마음은 부처도 알 수 없다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시자에게 빗장을 잠그라는 도리도 여기에 있다. 선불교의 ‘선(禪)’자를 파자해 보면 왼쪽에 ‘볼 시(示)’와 오른쪽에 ‘홀로 단(單)’으로 이루어졌다. 즉, 선은 혼자밖에 볼 수 없다는 말 삼계(三界) 안에 그 텅 빈 앎만 홀로 있다
우리의 시선은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밖을 향해 헐떡이다가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상황과 대상에 끌려, 또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너무 긴장하여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굳어지는 순간에 허둥대며 곤경에 빠지곤 한다.
((스스로 돌이켜 비추어 보라))
그렇다면 어이할 것인가? 그럴 때는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밖으로 향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 것을 선에서는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그대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스로 돌이켜 비추어 보라 다른 데서 구하지 말고 그대 몸과 마음이 조사님이며 부처님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주변으로부터 나를 자극하는 어떤 말을 듣는 순간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순간, 그 말과 상황에 사로 잡혀 허둥대거나 안절부절 말고 자신을 조용히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돌이켜 자신을 비추어보면 이리저리 날뛰던 마음이 멈춘다. 우리 내면에는 때 묻지 않는 부처님 성품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진리 그 자체 본래 모습 신령스러운 당체라고도 한다. 선에서는 우리 모두 본래 성불해 있다고 선언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보는 순간, 본래 부처님 자리에 들어서게 되므로 감각의 부림이나 온갖 장난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성가신 소리, 정신 나간 소리, 화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불같이 달아오르거나 맥 빠진 사람처럼 의기소침해진다. 시비와 선악, 호오와 미추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혼비백산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렇게 허둥대면서 자신의 학대하고 남을 원망하며 녹슬어간다.
((그 경계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그러나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자신의 따스한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내면에 간직된 보물 영원히 녹슬지 않는 금덩어리가 자신임을 보고 그 순간 경계의 파도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 내면을 직시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그 고요한 마음속에서 활로를 모색한다.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출렁거리지 않고 세상을 차분하고 명징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어렵지 않다. 자신을 돌이켜 보기면 하면 된다. 돌이켜 보는 순간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난다.
반문문성(反聞聞性)
소리를 듣는 성품을 다시 들어보라는 의미다. 소리를 듣고 있는 나를 다시 돌이켜 비추어 본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는 나가 있고 그 어떤 소리를 듣는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나가 있다. 노래하고 소리치는 나가 있고 그렇게 노래하고 소리치는 나를 돌이켜 보는 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는 나는 외부 조건에 따라 오락가락 반응하는 나이다 겉마음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나를 돌이켜 보는 나는 오락가락하는 나가 아니다 내면에서 파릇파릇하게 숨 쉬고 있는 진정한 나이며 본마음이다. 그 본마음을 찾는 것이 선이다.
((차별·분리의 아픔·경계는 없다))
우리는 회광반조를 통해서 그 진정한 나와 만난다. 그 고요한 순간, 그 정적의 순간에 나는 너와 세상과 하늘과 함께한다. 거기에 차별과 분리의 아픔과 경계는 없다. 바로 그 자리에 서면 우리는 소란스러운 외부 경계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상황에 깨어 있게 된다. 어떤 소용돌이에도 함몰되지 않고 호수처럼 맑은 정신으로 숨 쉬게 된다. 화두를 들 때도 회광반조하는 방법이 “이 뭣고” 할 때 “이 뭣고” 하며 묻는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나를 돌이켜 보며 도대체 “이 뭣고” 하면서 묻는 이놈은 무엇인가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화두 의심을 지어간다. 나를 움직이는 이놈, 과연 이 당체는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일으키는 순간, 그 순간 모든 판단과 생각의 작용이 사라지고 무념, 무아의 자리에 동참한다. 바로 그 자리에 모든 경계와 시비를 떠난 본래 모습을 엿보게 된다. 바로 돌이켜 비추어보는 그 자리가 부처와 조사의 자리니 달리 다른 데서 찾지 말라고. 밖의 어떤 조건에 있든 허둥대지 말고 돌이켜 자신을 비추고 자신을 보고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명징하고 투명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파도가 자고 비바람이 멈출 것이다.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선명하게 밝아지는 것도 회광반조라 말하기도 하나보다. 회광반조란 그렇게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밝은 생명자리다
‘마음이라는 것을 두고 보면 중생과 부처가 차별이 없는 하나’라는 흔히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중생의 ‘한 마음’은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창고, 이 창고에는 두 가지 마음이 들어있는데 하나는 참된 마음, 즉 진여심(眞如心)이고 나머지 하나는 끊임없이 생겼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생멸심(生滅心) 진여심은 다른 말로 지혜 심이라고도 하는데, 밝고 깨끗한 본래 마음으로 절대 변함이 없는 부처님의 마음 반면 생멸심은 다른 말로 수연심(隨緣心)이라고 해서 환경과 대상에 따라 변하는 마음 그런데 이 마음은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 우리를 중생이라 부르는 까닭은 생멸심에 사로잡혀 자주 마음이 오고 가는 탓 불교는 수행을 통해 이러한 생멸심을 다스리고 진여심을 드러내 지혜롭게 살도록 하는 종교이다
마음의 독성을 제거하는 수행 버섯은 색깔이 곱고 예쁘장할수록 독성이 강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독버섯이라고 그런데 그 독버섯도 독성을 제거하는 방법만 알면 일반 버섯보다 훨씬 영양가 풍부한 좋은 음식이 될 수 있다고, 즉 극약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약도 되지만 반대로 사람을 살리는 약도 될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녹차를 만드는 과정 속에는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다. 녹차 잎은 온갖 것을 다 잘 먹는 흑염소조차 먹지 않을 정도로 독성이 아주 강함 그런 녹차 잎을 300도가 넘는 뜨거운 솥에 볶고 다시 꺼내 비비는 과정을 아홉 번씩 한 후에야 비로소 독성이 빠진 맛있는 차를 즐길 수 있다. 그렇게 만든 녹차 잎을 차로 우려내고 남은 찌꺼기를 보면 상처 하나 없이 푸른빛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성을 제거하니 그렇게 훌륭한 생명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임 우리 이 마음에도 독성이 있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욕심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싸우고
온갖 나쁜 일을 하는 것이 다 마음에 담겨 있어 그러니 마음에 있는 이 독성도 녹차 잎에서 독성을 뽑아내듯 제거해 버려야 한다
마음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야 불법에 든다!
부처·보살의 사랑을 장차 일체중생에게 널리 보급해 그들이 행복을 느끼며 살도록 해야 하보니다. 살아있는 불교, 생활하는 불교를 믿어야 하보니다. 학문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든 사랑이든 상(相)을 갖고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마음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즉일(多卽一)이요 일즉다(一卽多)’입니다.
모두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법문을 수없이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 하나만 잘 다스리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생로병사 등 인생에 있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 찌꺼기입니다. 우선 불법(佛法)을 믿는 정신자세가 바로 불법을 바로 알게 되면 무한한 광명이 나타나고 모든 재앙이 소멸하보니다. 운명과 팔자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겁니다.
업보를 지닌 중생의 몸에 무엇을 입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가 끊임없이 따르는 이 육신을 가꾸고 닦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헛것이요 실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 마시고 밥 먹고 사는 건 모두 업력의 소견입니다. 전생의 과보로 인해 의식주 문제가 항상 야기됩니다. 불법을 믿고 참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일으키고 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불법이란 실천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이 중요하보니다. 나는 부처님 법을 믿게 되었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합니 다. 사람 사이에 잘 안 맞고 얽힌 것이 있으면 살살 구슬려서 풀어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전생의 업보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음을 잘 다스려 주위 사 람과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주위 사람을 즐겁고 편하게 해야 내가 편안한 것입니다. 저 한강가의 버들꽃이 피었다 지듯 세상이 무상(無常)하다는 사 실을 알아야 불법을 지닐 수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 주소가 어디입니까? 현재 사는 주소도 정신이 없을 땐 잊어버리 는데 아마 더 감감할 겁니다. 살려고 태어났는데 무슨 마음으로 어쩌자고 사 늘었는지 잘 모릅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입니다.
죽더라도 그 까닭을 알고 값있게 죽어야 합니다.
불법은 바로 전하기도 어렵고 바로 알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닌 마음의 보따리를 훌훌 털어내야 법문이 들어갑니다. 마음의 찌꺼기를 남겨 두고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법을 설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법을 설하는 법 사(法師)도 아는 걸 다 비워내야 합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는 법문이 안됩니 다. 아는 건 공부하면 누구나 가능한 것입니다. 법을 설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다 비워놓고 대좌하는 가운데 불법이 있습니다.
마음의 보따리를 비워내야 진정한 발심(發心)이 시작됩니다. 떨어 비우고 나 면 아무것도 없어, 정녕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작년에는 송곳하나 들고 내 땅이라고 찾아가 꼽을 곳이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땅도 땅에 꽂을 송곳도 모두 잃어버렸네!” 이런 경지에 불법이 있으니 다른 소리는 필요가 없다. 비우고 없는 그 자리. 거기에 도리(道理)가 있습니다. 말없는 가운데 도리가 있습니다.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은 이 시방(十方)이 다하도록, 이 세상이 다하도록, 일월이 닳고 허공이 죽는 그 차원만큼 무진장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찾자는 게 불법공부입니다. 불교는 마음 닦는 도리에 대한 가르침(敎) 입니 다. 마음 닦는 불법은 너와 나를 위해 필요합니다.
매사 긍정하는 마음 파동이 곧 극락”!
마음도 굳어지면 분열되면서 부스러기가 생깁니다. 마음이 굳어서 생긴 부스러기, 그것은 아지랑이 같고 연기같이 뿌옇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그것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업(業)이라 말씀하시고 경전에서는 형진(荊塵)이라 칭했습니다. 업은 집착할 때, 욕심낼 때, 화낼 때, 허망된 생각을 할 때, 이렇게 마음이 딱 굳을 때 생깁니다.
촛불이 잘 타다가 바람이 불거나 흔들리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면서 그을음이 나옵니다. 여기 있는 이 책상도 몇 백 년이 흐르면 쩍쩍 갈라지고 부서져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 때문에 경제도 굳는 것입니다. 돈은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심성이 가장 안 좋은 나라가 우간다이고 우리가 두 번째라고 합니다.
한국은 이혼을 가장 많이 합니다. 왜 이혼을 이렇게 많이 할까요.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의 때를 벗는 것입니다. 갈앙회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라고 목마를 갈(渴) 자, 우러를 앙(仰) 자를 씁니다. 농부가 마른땅에 비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갈앙심입니다.‘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긍정해야 됩니다.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투명한 비닐을 뒤집어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어씁니다. 여러분이 십만 겹이나 되는 생각의 비닐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온다는 것은 곧 ‘십 선법을 닦으라’는 말, 경전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물질이 종자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쪼개고 쪼개면 파동 치는 에너지만 남습니다. 그때 묻지 않는 순수한 에너지가 마음의 부스러기 마음의 쪼가리가 바로 생명체입니다. 그것이 계속적으로 생멸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파동 치는 모든 것이 부처로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하는 것은 칭찬을 하고, 못하는 것은 측은한 마음으로 지혜롭게 해결되기를 기원해 보십시오. 염불이라는 것은 모든 부드럽고 연한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부처 같은 마음입니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생각할 때 몸에서 광채가 납니다.
화를 내고 욕심을 낼 때 암이 되고 담이 됩니다. 파, 마늘을 많이 먹으면 암이 예방되고 치료된다는 얘기는 헛소리입니다. 파, 마늘 많이 먹으면 혈액이 잘 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늘을 즐겨 먹으면 여러분들이 화내고 욕심낼 때 생긴 업에 달라 들기 때문입니다. 능엄경에 있디!
달라 들어서 피에 섞이니까 정화되기 위해 피가 빨리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소 요구량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야 삶이 바뀝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바꿔야 합니다. 한 생각 바꾸는데 빠르고 느린 오늘이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법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서 하나라도 실천에 옮긴다고 한다면 지금 이 수행자는 더없이 아름다운 자리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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