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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과연 누구을 위해 부단히 찾아가는 길인가!



문제가 생기면 삶은 우리의 행동에 그 답을 묻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하고 그러나 결과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반문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지? 그러나 우리가 부딪치는 삶의 문제는 포기할 수도 없고 풀지 않을 수 없기에 풀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존재를 제약하는 필연성이 모든 당위(當爲)의 근본 우리는 살아 있는 동물인 까닭에 행동을 전혀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용된 선택의 자유는 행동과 비행동(非行動)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행동 사이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는 행동할까 행동하지 말까 하는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그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은 행동을 전혀 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달리 행동하겠다는 판단인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삼고 이루어지도록 행동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생물학적 사실에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 응무소주(応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고 머무름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의미 행하되 집착을 가지지 아니하면 행해도 행함이 아니라는 의미 그것이 바로 무위(無爲)는 행하지만 집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물은 속성에 따라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물은 낮은 계곡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높은 정상에서도 솟아나가도 하죠! 때로는 분수처럼 위로 솟구쳐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물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물은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이 집착을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 무위를 버리고 유위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따지고 에고와 교만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탐욕이요, 어리석음이요, 시시비비 하는 마음이다. 무위(無爲)란 전연 행동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무위란 그 행위에 집착을 부어넣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사무심(於事無心) 어심무사(於心無事) 일을 당해서는 마음이 없고, 마음속에는 일이 없다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마음 자체는 깨끗하다고 합니다. 왜 본래 깨끗한 마음에서 무명(無明)이 현행하는지요?
우리는 보통 시간을 계속되는 직선 상태로 보고 있어서 '과거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라거나 '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어떻게 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재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삶이라는 의미는 언제나 현재로서, '현재에 우리 삶 전체가 열려 작용'합니다. 이것을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만 깨끗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근본은 언제나 깨끗하기 때문에 본래가 변해서 무명(無明)이 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본래의 흐름'입니다. 무명(無明)이란 하나 된 세계를 분별하여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작용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열린 것 가운데 제 모습을 키워 가는 힘이 있습니다.
본래는 깨끗한 마음인 열린 세계의 관계에서 이것과 저것의 모습이지만, 지금 우리는 이것과 저것의 모습만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나 똑같이 깨끗한 마음인 열린 세계에서 제 모습만 키워 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모양은 다를지라도 상황은 항상 같습니다. 따라서 '왜 무명이 현행했느냐'라는 과거의 시점에 대한 질문이 지금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금 우리들은 왜 분별하는가'라고 생각하는 이 순간이 바로 깨끗한 마음에서 무명(無明)이 현행하는 시점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분별과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무명의 현행이 왜 깨끗한 마음의 창조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분명해지면 바로 무명(無明)이 명(明)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명이니 무명이니 나누고 있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부터 현재로 이동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언제나 모양이 다른 현재에서만' 살아갑니다. 본래 청정한 상태에서 모양의 다름만을 보는 무명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삶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현재가 바로 본래청정입니다. 과거에 청정해서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니고 현재가 바로 청정입니다.
'청정인데 왜 청정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생각의 일어남에 집중하면 자기 스스로 이해됩니다. '청정인데 왜 청정이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그 생각이 일어난 순간을 맞춰 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논리적인 의미로 파악하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파악하려면 금방 이해되다가 다시 의문이 일어납니다.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 또 이해가 안 됩니다. 논리적 파악의 근거인 분별은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가 없다.
그 생각이 일어난 순간을 꿰뚫어 보기만 하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흐르는 청정,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청정이 지금 여기의 현재로 살아나서 '분별 그 자체가 청정인 것'을 확실히 봅니다. 그 순간 '청정인데 왜 청정이 아닌가'라는 문제가 풀립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청정을 무명으로 만드는 힘인 줄 알고 집중해서 보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서 가지가지 차별이 파생됩니다. 이와 같이 한 생각이 일어난 순간을 확실히 겨냥하여 꿰뚫어 보는 힘을 기르면 '왜 청정이고, 청정이 아닌가'를 알게 됩니다. 꿰뚫어 보는 힘이 지혜로서 청정함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청정이었는데, 지금은 청정이 아니냐'라는 물음조차도 변계소집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변계소집성을 통해서 알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순간순간 왜곡이 흐르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정확한 대답일지라도 바로 왜곡되어 버립니다.
삶 자체가 항상 현재라는 말에 공감하지만,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 관념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가르침의 의의가 없을 만큼 시간 자체가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종자나 업의 흐름은 분명히 과거가 있고, 흘러가면 미래가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라는 말은《유식 30송》가운데 '항상 폭포수처럼 흐르는 식의 전변(轉變)'이란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전이숙이 다하면 후이숙이 생한다'라는 관계에서도 전후의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란 곧 식의 변화'입니다.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은 동일찰나에 일어납니다. 한 찰나에 종자가 현행하고 이 사이에는 시간이 전제되지 않습니다.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도 마찬가지입니다.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는 것이 시간의 의미로서 파악되기 쉽습니다. 전찰나 종자가 후찰나 종자에게 자기 힘을 상속시키면, 후찰나 종자는 과거 종자가 가진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이런 종자의 흐름을 통해서 또한 미래를 연상해 냅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있는 것 같고 미래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보입니다.
그러나 후찰나 종자가 전찰나 종자를 상속하지만, 전후찰나 종자의 모습은 변화되어 서로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삶 자체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종자의 현행이며 동시에 종자의 상속'입니다. 그런데도 종자가 가진 힘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추상하는 내용을 가지기 때문에, 전찰나 종자와 후찰나 종자가 시간선상에서 하나의 의미인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앞의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훈습관계에서는 시간이 개재되지 않지만, '종자생종자'에서는 종자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유추를 동반하기 때문에 현행에서도 시간을 설정하게 됩니다.
매 순간의 삶인 현재를 종자의 흐름으로 보면 전찰나와 후찰나로 생각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시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종자가 전찰나를 기억하고 후찰나를 추상하는 힘에 의해서 전후의 연속적인 실체를 설정하여, 찰나생멸의 존재를 연속적인 삶으로 바꿔 버립니다. 기억과 유추로써 시간을 만드는 종자의 이런 힘을 명확히 보지 못하면, 매일 과거·현재·미래의 구조 속에서만 삶을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흐름을 명확히 보게 되면 과거를 기억하거나 미래를 추상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순간순간에 살아 있게 됩니다.

종자(種子)를 인연(因緣)이나 습관(習慣)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종자는 보편적으로 늘 같은 결과를 낸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종자는 하나의 인(因)으로서 주변의 연(緣)에 따라 과(果)가 다르며, 이 과(果)는 곧 다음의 인(因)이 됩니다. 인은 어떤 일을 만들어 내는 전체 구조 가운데 하나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이 인에 '무엇이 작용하고 있느냐〔緣〕'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물이라는 연(緣)이 없으면 씨가 나지 않지만, 너무 많아도 썩어 버립니다. 씨가 반드시 싹이 트는 것이 아니며, 싹도 돌연변이 등에 의해서 다를 수도 있습니다. 종자의 성질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계나 중생계가 대체로 비슷한 결과가 되는 것은 주변의 연(緣)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종자를 인(因) 또는 경향성, 습관력 등등으로 그 일면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당은 극도로 집중된 상태에서는 칼 위에서 춤을 춰도 발이 베이지 않습니다. 칼 위에 사람이 서면 베인다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무당의 기운〔因緣〕이 바뀌어 칼에 베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종자가 반드시 같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순간에 관찰력을 집중하면 삶의 내용이 바뀝니다. 만일에 종자가 항상 같은 결과를 낸다면, 정신집중의 깨어 있음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행(現行)에서는 보편적으로 같은 연(緣)을 주기 때문에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되어, 결정론 또는 숙명론으로 오해되기가 쉽습니다. 여러 가지 관계 속에 놓이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삶들을 인과(因果)라고 합니다. '반드시 이 인(因)으로 했으니까 이 결과를 낸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내게 하는 종자들의 힘이 작용했지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종자의 내용이 바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돌연변이조차도 당연히 인과관계인데, 인과관계를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이렇게 나오지 않았다'라고 결정론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을 달리하면 당연히 생각을 뛰어넘는 결과가 옵니다. 심본 증설(心本證說)에는 본래 깨달음 아닌 것은 깨달아질 수 없다는 논리가 뒤에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실제로 그것만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삶에서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것은 '나는 나, 너는 너'입니다. 저 사람의 아픔을 내가 잘 느끼지 못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잘 느끼지 못합니다. 저 사람의 기쁨은 저 사람의 기쁨이고 내 기쁨은 내 기쁨이지, 기쁨과 슬픔의 교류가 적나라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연기(緣起)라고 하는 말 자체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우리가 연기라고 하는 것을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여러 사람이 이렇다 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쓰는 언어는 추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옛날에 비해서 지금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고 속에서 교육받고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뿐만 아니라 연기(緣起)라는 말도 추상성을 바탕으로 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분별된 언어이므로 실상을 바르게 가리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연기나 깨달음이 연기나 깨달음이라는 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수행을 통해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본증설은 논리성이 아니라 깨닫고 보니까 본증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무명과 본래청정'을 이야기할 때도 그랬습니다. 반증이란 증득했다는 언어 쓰임이지만, 실제는 '삶의 본래적 흐름'이란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깨쳐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깨침만이 진실한 삶인 것입니다.

인(因)이 업종자로서 잠재적인 가능성이며 그것이 어떤 연(緣)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과(果)이면서
또 하나의 업이 되는데, 수행이란 인연(因緣)에 맞는 과(果)로 넘어가는 과정을 바꾸는 것입니까? 수행은 인(因)에 대해서 연(緣)의 작용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인 인(因)과 연(緣)의 만남에 따라서 과(果), 즉 다음 인(因)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인연의 흐름을 일상적인 삶과는 다른 깨달음으로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因), 즉 전체적인 어떤 가능성은 반드시 연(緣)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까? 매 순간마다 인과 연은 계속 만나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편적으로 비슷비슷한 작용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는데, 갑자기 '깨어 있음'이라는 새로운 힘을 던짐으로써 삶의 내용이 크게 바뀌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항상 여러 가지 주변상황에 휩싸여 흘러갑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잠깐씩 '이것이 변계소집성이고, 사실은 의타기성으로 가야 되는데'라는 생각을 순간순간 하는데, 이것으로 인해서 실제로 깨어 있는 의식이 되는지요? 앞에서 상(想)과 행(行) 사이의 흐름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어남이 변계소집성이므로 의타기성으로 가야 되는데'라는 욕(欲) 심소의 일어남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정념(正念) 수행이 동반되어 의지작용〔行〕을 바꿔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항상 제대로 되면 수행(修行 : 의지작용을 닦음)이 잘된 사람입니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도 다시 분별에 휩싸여서 흘러가는 것이 중생인데, 아직 복덕(福德)을 구족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덕이란 자기 자신에게 귀의처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귀의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덕이 부족한 것은 업의 흐름이 자타의 분별만을 증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생사(生死)를 완전히 내버릴 정도의 강한 충격이 일지 않으면 인연(因緣)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삶의 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ㅠ있는 고(苦), 즉 고성제(苦聖諦)가 인연(因緣)의 흐름을 바꾸게 합니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됐습니다.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 됩니다.

고(苦)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런 삶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삶의 특성이 고(苦)이며, 고(苦)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면 그 흐름을 억제하는 것이 무리입니까?
그 사람에겐 무리입니다. 고통이 일어나도 당연한 줄 알아서 바꾸려는 의지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생사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않았으면 그 길로 흘러갈 뿐입니다.
그런데 고(苦)에 대한 자각은 본인 스스로 일어나기도 하고, 가르침을 통해서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실 누구나 고(苦)를 자각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고(苦)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자증분과 증자증분에 의해서 고(苦)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고(苦)의 자각과 고(苦)로부터 벗어남이라는 두 가지를 같이하지 않으면, 고(苦)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이제 내면의 자각과 부처님의 가르침인 수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여긴 것이 그렇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고통받는 것이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고(苦)로부터 벗어남이 본래모습임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여겼던 것에 대한 사회 자각운동이 아직은 유위(有爲)의 단계이지만 요즘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달리며 사는 생활 가운데에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실천하기 쉬운 방법은 무엇입니까?
삶 자체에서 계속해서 자각을 일으켜야 됩니다.《금강경》에서는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아니다〔卽非], 내가 허망분별에 속고 있다'라고 관(觀)하라고 합니다. 고통의 생각이 일어나든 즐거운 생각이 일어나든,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 '바로 아니다〔卽非觀〕'로 여겨 마음을 평정하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또 외연(外緣)을 가끔씩 바꿔 주면서 지속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마침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에 들게 됩니다.

세존의 말씀에 "너의 원수가 바로 너임을 알라"는 말을 보고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원수인 아(我)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왔습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 넣고 있는 아(我)의 허망성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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