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던 당시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신은 없다”라고 딱 잘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무신론적인 종교입니다. ‘화엄경’을 보면, 수많은 신들이 있고 법당에 신을 모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 자가당착이고 절대모순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신과 다른 종교 내지는 다른 분야에서 말하는 신과 어떻게 다르냐.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신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신은 ‘마음의 변형’입니다. ‘내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신입니다. 간단한 해석이지만 여타의 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의 조상은 어디냐. 바로 내 마음입니다. 신의 원류, 근원지는 어디냐. 바로 이 마음입니다. 신의 창조주는 누구냐. 바로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신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단연 앞선다고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경전에서 보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 니라”, “ 일체가 마음이 지은 바니라”고 했고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시기를, “마음밖에는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마음’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바로 이 마음입니다. 불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요, 마음을 잘 깨쳐 가는 종교입니다. 그것을 실현하신 역사적인 인물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그분은 바로 몸소 실천해서 피나는 체험을 통해 체득해서 깨달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0.1%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해서도 안됩니다. 종교는 생명입니다. 부처님 당신이 직접 뼈저린 체험을 통해서 하신 말씀에는 조금도 허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의 대전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교·신앙은 허수아비에 가사장삼을 씌워놓은 것과 똑같습니다. 종교에 있어 믿음이란 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한지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믿는 것은 여러분들이 부처님을 믿는 것이 철석 같아야 됩니다. 쇠망치로 두드려 부셔도 끄덕 없이 견고한 신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까닭에 모든 것은 나요, 인간이요, 모든 것은 내 마음으로 귀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불교에서 인간적인 면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고 얼마 후 자신을 낳고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만나러 도솔천에 갔다 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해서 설법을 해주셨는데, 그 내용은 ‘위모설법경(爲母說法經)’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먼저 어머니께 달려가 마음을 편히 해주시고 우주와 인생의 근본과 인간이 살아가는 길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적인 대효자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은혜가 가장 깊은 분이 누구입니까. 부처님도 아니요 또 신들도 아닙니다. 자기를 낳아서 길러 주신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이 세상 무엇보다 가장 위대하신 분이요, 자신에게는 가장 은혜가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은중경(恩重經)’에서 부모를 위해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부처님 말씀대로 게으르지 말고 다해야 될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자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믿는 신심이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도리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두 번째 선언은 인종·계급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바라문(Brahman:사제자)· 찰제리(Kshatrya:무사)·폐사(Vaisya:농민·상인 등의 서민)· 수다라(Sudra:노예)의 카스트제도가 굳어진 계급의 사회였고, 인도인들은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반상 구분보다 철저하고 삼엄한 계급사회에서 사람의 사유와 행동양식에 의해서 천하고 귀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지언정 원래로부터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절대 평등’을 주장하셨습니다. 경전에 개유불성론(皆有佛性論)이 나옵니다. 유정뿐 아니라 무정, 산하대지까지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평등론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신분에 차별 없이 똑같이 계를 주었고 왕족인 아난타보다 천민 이발사인 우바리에게 먼저 계를 주었습니다. 평등이란 말을 인권에서 많이 부르짖지만 이는 조건부 평등이요 미완성 평등입니다. 절대 평등은 오직 불교 밖에 없습니다. 절대 평등의 굳건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불교입니다.
세 번째는 무명(無明)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명은 지혜광명이 없는 캄캄한 곳, 캄캄한 경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그 무명으로 인해서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 어두운 세계에서 억겁 다생을 윤회하는 그 인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것은 달의 허물이 아니라 구름의 허물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바로 그대로 그 자리에서 달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칩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우리 중생에게 비치지 못하는 것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본래 부처란 말이 여기 있습니다. 번뇌망상만 제거하고 무명만 철저하게 타파하면 바로 그 자리가 부처입니다
항상 인연을 소중히 사유하시고, ‘인연’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갖도록 ‘인과’라고 하는 것은 우리 불교 교리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떠한 원인 에 의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들여야만 하겠습니다. 불교는 어느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요, 마음을 찾아서 깨쳐가는 수행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입니다. 이 마음 하나만을 주장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다, 숙명이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운명과 숙명은 우리 에게 절대적인 존재요, 우리는 그 속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늘 거기에 구속받고 거기 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만 되는 운명적인 존재인가?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확 바꿔야 합니다. 운명론을 능히 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교 교리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 길들여져서 질질 끌려 다니고,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자기 일생을 그와 같이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불교는 운명과 숙명을 끌어안고, 산산이 때려 부수어서 다시 창조하고, 또 개조하고 이렇게 해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이 마음 하나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2500년 전 이 세 상에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선언하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 는 ‘일체유심소조’라고 간단하게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중생계는 인연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때문에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가 져야 합니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인연이요, 하나는 좋지 않은 인연입니 다. 그런데 우리는 더불어 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인연을 맺되 좋은 인연을 맺고 살 아야만 마음도 편하고 서로 도움도 받고, 고민도 없고, 고통도 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지 않은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도 짊어지고 끙끙거리면서 가 야만 되느냐? 운명론을 믿는 사람은 아마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악한 인연, 좋지 안 은 인연을 확 때려 부수어서 창조하고, 또 바꾸고 그래서 좋은 인연으로 정립해서 회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노력하면 됩니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게 보통 우리 업 많은 중생들의 생각입니다.
지금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냉엄하게 사정없이 비판을 하고 다른 이에게는 관 대하게 이해하고 용서하십시오. 내가 조금 양보하고, 조금 하심하고, 내가 조금 상대 방을 이해하고. 이렇게 하면 능히 좋지 않은 인연이 좋은 인연으로 술~술 뚫려서 좋은 인연이 됩니다. 이게 바로 나쁜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바꾸는 작업의 하나가 됩니 다. 부처님은 우리를 늘 안고 계십시다. 부처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는 청개구리와 같은 마음을 가 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전부 안아서 끝까지, 이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그 대자비심을 발휘해서 고통이 다 없어지고 행복하게 살 때까지, 성불할 때까지 이끌어 주십니 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부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뭐 좀 하다가 안 되면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도 소용없다’하고 맙니다.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 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하보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잡념망상으로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신심과 원력과 정성을 다 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 니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살을 에는 마음으로 피 눈물을 흘려가면서 하는 그 기도 말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데 가장 무서운 적이 뭐냐? 바로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것, 이 게으름을 망치로 때려 부수어 서 다 내쫓아야 하보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단히 담금질하는 것. 이것을 ‘절차’하고 ‘탁마’한다고 합니 다. 담금질해서 아직 미완성 자리를 완성되게 만드는 것도 자기 마음입니다. 누가만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아무도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옛날 스님들은 공부하다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멍이 들어서 피 가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와 같이 졸음을 떨치면서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하는 그 정신, 그 신심. 이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도는 내가 뭔가를 갈구하고, 소원할 때 그것을 이룩케 하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도, 주력도, 108 배도, 간경도 모두가 기도의 개념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기도, 수행 전 체를 개념으로 하는 기도를 지금 나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향에 맞는 것을 하나 잡아가지고 꾸준히 하되 게으르지 말고, 정성을 다 해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꼭 성취됩니다.
여러분,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두견새는 모든 새들이 다 잠이 들 고, 모든 짐승들이 잠이 들고, 사람마저 잠이 들고, 천지가 적막하고 오직 달빛만이 밝은 야삼경, 열두시나 한 시경 그때 웁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 보면 너무나 애 절하고 너무나 간절합니다. 무슨 원이 있어서 무슨 한이 있어서, 모든 것이 잠든 적 막 한 이런 밤중에 홀로 저렇게 우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참을 울다가 또 흐 느끼며 웁니다. 울다가 목에서 피가 맺히고 그 피가 올라왔다가 다시 넘어갑니다. 피 맺힌 한이 있어서 그렇게 밤새도록 웁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저 두견새와 같이 한번 해보세요. 간절하게 두견새가 우는 그 마음으로, 낭떠러지에서 밑을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외 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그러한 마음으로, 생사를 걸고 선방에서 일주일, 한 달, 석 달 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 하는 마음으로, 철야기도를 일주일 또는 열흘 쉬지 않고 하 는 그런 마음으로, 장좌불와 하는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배가 부르면 나태 해지니까 밥을 한 끼만 먹고 그 졸음을 쫓아가면서 일일일식으로 기도하는 마음, 공 부하는 마음. 그런 지극한 마음으로, 그런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극치가 뭐냐.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종지를 다 얻고, 깨쳐서 모 든 것을 다, 아무 구애 없이,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성인이 된다 그 말입니다. 기도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돈이나 건강, 애들 입학하는 것 같은 소소 한 것들은 조금만 하면 다 이뤄집니다. 그 대신 기도할 때 아주 정성을 다해서 하십 시오. 어느 스님이 운문문언(雲門文偃,?~949)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 입니 가?” “마른 똥막대기니라.”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 답했느냐, 여러분은 그 도리를 한번 깊이깊이 참구해 보십시오.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에서 이뤄지고, 불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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