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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헤아리고 계산하는 분심을 버려라

 

내것은 하나도 없다
머리로 사랑분별하는 애착을 버리고
가슴으로 안아주는 자비로움을 주세요
오직 섬김과 희생으로 봉사하세요_()()()_

분별심을 버려라!!! 

‘법을 설한다는 것은 법을 설한 것이 없으므로 법을 설한다’

〈금강경〉에는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름이 설법이다’라는 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을 결정하거나 행동할 때

남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때로는 새로운 느낌을 받아서

그 영향으로 결정을 하기도 하고 남의 말을 참고로 결정을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은 들은 것도 없고 느낌을 받은 것도 없다.

나 자신에게 이미 법이 있기 때문에 굳이 남으로부터 들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무명이라고 한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개발할 줄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배워서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지만

본래 마음에 있었던 지식을 개발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다.

법회를 참석하고 상호 간에 이야기를 하는 것도 결국 내 마음을 열어보는 것이며

내 마음을 부처님 앞에 와서 비추어 보는 것이다.

시주님들에게 ‘마음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이 많아서 수심이 가득하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서 힘들다’라고들 대답한다.

부처님은 사성제 법문에서 인생을 고(苦)라고 했다.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과거의 사람도 현재의 사람도 현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요즘 IMF를 지나오면서 가정이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우울하고

마음이 어두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어느 때든 어느 곳이든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음을 많이 느낀다.

불교를 공부하는 우리는 다른 이치로 생각을 해 보아야 하겠다.

 

마음의 번뇌망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분별심을 갖게 되고

그 분별심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 분별심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불안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객관적인 경계를 초월할 줄 알면 힘든 것은 없고 불안한 것도 없는 것이 된다.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이 실물이 아닌데,

실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항상 자기 마음을 쉴 수 있어야 한다.

쉰다는 것은 어떤 의식에서 풀어지는 것이고, 관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항상 현실문제 객관 문제에 의식이 가 있다 보니

나 자신의 근본이 어떤 것인가라는 부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일체유심조, ‘만법유심’이라는 경구가 있다. 마음 하나를 새롭게 먹으면 되는데,

타성에 젖어 있는 관념에 벗어나기가 힘들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음 하나 다스리면 우리는 우리의 관념에서 벗어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죽이는 신행 방법으로 우선 참회를 해야 한다.

감나무에 감이 열렸다고 생각하지만 인연법, 연기법으로 생각해 볼 때

감나무 스스로가 감을 열게 할 수는 없다. 감나무의 열매가 열릴 때까지는 땅이 있어야 하고

적당한 비가 있어야 하며, 공기와 햇빛 등이 있어야 한다.

감을 열게 한 주체는 감나무가 아니라 어디에도 없고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모여진 가운데에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불법의 이치를 통해서 인생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명상적인 수련을 통해서 자기의 내면세계를 한번 더 간주해 보면

생의 모든 의미도 달라지고 인생의 새로운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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