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아름다웠으면 죽음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생사불이(生死不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상천도를 잘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천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는 벽을 허물어버릴 때 조상의 벽도 허물어지면서, 나와 조상은 한 허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 융이나 칼 야스퍼스 등의 서양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있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나는 태어났다. 그러나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예로부터 진시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현대의 학문으로는 아직껏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죽음이여 어서 오라. 내 기다리고 있노라’하는 자세를 갖게끔 하는 철학,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는 철학은 여전히 요원한 실정입니다.
그럼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는가? 부처님께서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아름다웠으면 죽음 또한 아름다워야 되고, 삶을 아름답게 장엄하려고 애를 썼으면 죽음도 아름답게 장엄을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돌아가신 조상들의 죽음 또한 남아 있는 후손들이 아름답게 장엄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먼저 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도는 괴로움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요, 피안으로 옮겨 가려면 맺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 조상님들의 맺힌 마음은 어떻게 해야 풀어지는가?
돌아가신 부모형제나 조상님들에 대해 맺혀 있는 ‘나’속의 서운한 마음이나 한 많은 마음들을 턱 풀어버릴 때 영가들의 마음도 같이 풀어집니다. 마치 집의 문을 닫아놓았을 때 안과 밖의 구분이 생기지만 , 문을 활짝 열고 벽까지 허물어버리면 안과 밖 모두가 한 허공이 되듯이, ‘ 나’라고 하는 벽을 허물어버릴 때 조상의 벽도 허물어지며, 나와 조상의 벽이 허물어지는 그 자리가 바로 극락의 문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천도를 하려면 먼저 나 자신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방법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럼 나 자신의 벽을 허물어버리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로 알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정녕 진짜는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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