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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입으로 글로 저울질 하지말라!

입은 도끼요. 혀는 칼날이다. 이곳에 와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다 해당되니 짓지 말라!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우주의 주인공 됩니다” “다겁생 익힌 업장 벗어나야 본심 나타나지요” “법왕법(法王法)이 여시(如是) 니라.” 이 회상(會上)에 대중이 모인 뜻은 법왕의 법(法王法)이 이와 같다”는 뜻에 계합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만사천 법문의 요지가 “법왕법 여시(法王法 如是)”라고 하는 말씀 안에 있는 것으로, 모든 대중들의 신령스러운 근본인 그 마음에 대한 표현인 줄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나 이 경지는 번뇌에 파묻혀 사는 대중들의 지금 생각으로는 조금도 알 수 없으며 대중들의 이 알지 못하는 바를 부처님께서 격외(格外)로 보이신 바, ‘격외(格外)’라고 하는 것은 다자탑 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坐)하신 소식, 영산회상 거 염화(靈山會上 擧염花)하신 소식, 곽시쌍부(槨示雙趺)하신 소식입니다.

이것은 <선가귀감(禪家龜鑑)>첫머리에 나오는 ‘여기 한 물건’에 대한 것으로, 모든 중생들이 너무나 모르므로 ‘한 물건’에 대해 억지로 이름해서 ‘한 물건’이다, 억지로 이름해서 ‘부처님’이다, 억지로 이름해서 진리다 합니다. 또는 선가(禪家)에서 심월(心月)이다 하는 등 갖은 명사 다 붙였지만, 이 신령스러운 근본 자리에는 그런 명사도 붙지 못하는 절대적인 것이 됩니다. 그럼 모든 중생들의 상태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자기에 대해서 모두가 아는 생각이 먼저 앞서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내 마음은 내 몸속에 있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다”는 그런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나니 그것을 일러 “알 식자 마음 심자 ‘식심(識心)’”이라 하며, “아는 척하는 마음”그것을 망식(妄識)이라 합니다.

그 식심의 경계와 본심의 경계가 나타나니, 본심(本心)은 부처님 경지의 마음이요, 식심(識心)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부처님 법을 제외하고는 전부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49년간 설법은 바로 네가 다겁생래에 익힌 업장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속이는 버릇이 그렇게 크니까, 그걸 알아듣는 자세가 되도록 하라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 이 지구상에서 불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체하다가 거꾸러지는 종교입니다. 항상 번뇌망상에 놀아나는 겁니다. 번뇌망상에 놀아나면 그것이 전부 生死요, 생사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겁니다. 어깻짓 춤추는 도깨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스님네들이 도깨비가 되지 말라 하셨잖습니까.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들아 대낮엔 도깨비가 없어요. 고래(古來)로 대낮에 도깨비에 홀렸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두운 저녁에 가서 도깨비에 홀렸지요. 그래서 이렇게 욕설을 하신 겁니다.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들아, 대낮같이 밝아 있는 그 마음을 가지고 왜 도깨비짓을 하느냐”그 말씀이지요. 대낮같이 밝아 있는 자기 마음만 요달(了達)하면 되는데 자기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아는 체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 아는 체하는 제 기분에 들떠서, 제 흥에 겨워서, 흥분해서 아는 체하고 막 풀어 내놓다 보면 제가 저를 속이고 남들을, 듣는 이를 속이게 되니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그 버릇을 고치라는 겁니다.

부처님 49년 설법(說法) “아는 체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마음은 망령스러운 마음이다” 망령기가 있다는 말이요, 미쳤다 그 소리입니다. 미친 마음은 1초에 6만 3천 번을 뛰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거의 전부요, 그렇지 않은 이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너 나 할 것 없이 들뜬 사람들이 지구상에 모여서 산다. 그 생각이 쉬면 사왕천(四王天)에 올라가고, 조금 쉬면 도리천에 올라가고 조금 쉬면 야마천(夜摩天)에 올라가고 그렇게 해서 욕계(欲界) 육천(六天)을 올라가며, 색계(色界) 십이천(十二天)을 올라가며, 무색계(無色界) 4천(四天)을 올라가고, 그래서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등의 성문(聲聞) 4 과를 올라가는데 수다원은 부처님 법을 의지해서 들어간 경계로 무색계천 경계에도 안 되는 색계 십 이천경계 중에 색구경천(色究竟天) 근처에 간 수행력이지만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수다원에 들면 다시는 더 물이 들지 않게 됩니다. 다시 퇴전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수다원과를 딱 정해 가지고 그 후 정진해서 부처님이 되고 만다.

타락(墮落)이 없다. 그래서 성류(聖類)라고 하는 겁니다. 성인류(聖人類)에 든다고 해서 성류라고 한다. 그러면 외도(外道)는 무엇이냐? 비비상천(非非上天)까지 올라가도 도로 미끄러지고 도로 미끄러지고 하게 됩니다. 왜? 제 고집이 있어서 산돼지 고집을 가져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생각이 좀 쉬었다고, 아는 경계가 좀 나타났다고 거기에 전도(轉倒)가 되어가지고 부처님 말씀도 안 듣는 겁니다. 그러다가는 도로 미끄러져서 지옥에 가서 처박히는 거라고 부처님께서 가르 치신 겁니다. 비유를 들자면 부처님 법을 따라 수다원과를 증득(證得)하는 것이 유리컵을 다섯 개 갖다 놓고 장마통에 시뻘겋게 뒤집힌 물을 컵 하나에 담아놓고 하루 종일 있다가 저녁나절에 보십시오. 맑게 가라앉았지요. 부처님이 보시고 80% 가라앉은 것, 이것을 옆의 컵에 “맑은 물만 옮겨 담 아라”하셔서 부처님 말씀 따라 옮겨 담았습니다. 또 하루를 두고 하여 네 번 옮겼어요, 이건 암만 흔들어도 뭐 가라앉을 것이 없으니까 깨끗하지요. 그런데 외도들은 가라앉은 여기에, 찌꺼기와 같은 안다는 생각에 집착이 되어 가지고, 가라앉은 맑은 것만 옮기라고 해도 곧이 안 듣고 그냥 이걸 처억 던 버릇을 안 버려서 흔들어 출렁거리면 도로 뒤집히고, 도로 처박히고, 그래 서 지옥에 도로 처박히면서도 부처님 말씀을 안 받아들여요.

자기 아는 체 하는, 말하자면 다시 출렁거려 들뜬 마음이 앞서 가지고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산돼지라. 산돼지 잡아다 집에서 길들여 보십시오. 아주 애 먹지요. 모든 중생들이 산 돼집니다. 여러분들도 산돼지 고집 가졌다간 큰일 나요. 그래 부처님께서는 너희도 나와 같이 이렇게 해봐라. 그럼 나와 똑 같이 되는 니라. 온 우주의 주인공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따로 내 몸이라고 여겨 집착할 것이 없느니라. 온 우주가 내 것이므로 부처님이 천백억 화 신을 나타내신 겁니다. 부처님은 임의자제하는 몸을 가지셨는데 거기에 비한다면 여러분들은 갖추지 못한 불구자요, 장애자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성한 것 같지만 다 장애자이니, 장애자로 먹고 사시니 장애자분 들 깔보지 말고 조금씩 시킬 일 있으면 시켜서 같이 살도록 해야 돼요.

시주물건(施主物件)의 모든 것, 여러 곡식으로 지은 주식과 부식의 나물, 양 념, 차담으로 잡숫는 것, 물 마시는 것, 속가 신자들이 먹는 동식물류의 식품 류인 모든 것을 먹는 것은 이 몸 안의 많은 중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먹 어야 합니다. “그걸 관(觀)하고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몸 안의 중생들이 죽으니까, 자비스러운 뜻으로 대(大)를 위 해서 소(小)를 베푸는 뜻으로 살기 위함이며, 바른 것을 위해서 삶으로써 부 처님 법을 위해서 삶으로써 옳은 일이 되는데, 부처님 법만을 실천하면 옳은 일이 돼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죄(罪)가 돼요. 그렇지 않으면 죄(罪) 안 짓고는 못 산다고 여러 경전에 말씀이 나타나 있어요.

남섬부주 이 지구상의 주위 환경은 숨만 쉬어도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중생이 공기 중에서 코로 해서 빨려 들어가며, 가지가지 일로 죽게 되 거나 싸움하게 하니 죄가 됩니다. 싸움판을 벌렸으니, 아수라판을 벌렸으니 죄가 됩니다. 여러분은 싸움시키기를 좋아하는 아수라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수라도 되고 천사도 되고 별거 다 됩니다. 아수라 마음 내어 실천하면 아수라 되고 별거 다 되는 겁니다. 왜냐? 공기 중에 있는, 많은 가만히 있는 중생들을 몸 안으로 들이 몰아가지 고, 안에 있는 방어균하고 싸움을 시키니까 아수라 아닙니까?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을 잠시도 못 버려서, 일체 모든 것에서 내니, 너니 하는 생각을 떠나지 못하여, 이 몸뚱이에 꽉 집착을 해서, 나로 삼아서 내게 해가 되는 것은 남이라고 해서 제 몸 편에만 들어서 응원하니, 응원하는 게 싸움시키는 것입니다. 삿된 입지(立志)로 사니까, 살려하니까, 아수라 아닙니까. 그런데 아수라 귀신이 어디 나? 모두들 그럽니다. 그래 부처님 법에 입지(立志)를 세우신 분들도 공기 중에 있는 많은 균들이 침입해 오는 유행병균, 감기로 인해서 유행병이 많이 있지요? 그때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시면 뜨거운 물에다 소금을 타 가지고, 양치질 을 하셔서, 방어하는 균들을 도와주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외세에 밀려 가지고 많이 앓게 되므로, 바른 생각 내는 공부를 못하시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병원 의사분을 찾아가셔서, 주사도 맞고 치료를 받으셔서, 외세를 쫓아내어 아픔을 고치 쳐, 공부해 가시라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장수멸죄경’에서 건강에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여러분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주변에 사는 한량없는 수의 귀신이 있는데, 천상 세계로 올라갈수록 죄를 적게 짓고 사는 환경이 되어 있으며, 극락세계 환경은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셨습니다. 또 부처님 가르침은 서방정토 극락세계 구품연대를 졸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앞에 축원하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상품상생 돈오무생 <頓悟無生> 법인지방원 <法印之發願>- 문득 깨달아서 태 어남이 없는 법인을 발원하나이다." 나지 않는다면 어딥니까? 내 마음이 온 법계에 가득 차서 생사가 본래 없는 그 이치를 증득하기를 원 하는 겁니다. 그것이 참으로 극락세계입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라는 것도 여러분이 모자라는 것을, 그런 깨닫는 수행의 환경에 가서, 모든 것을 수학(修學)한 연후에 졸업을 하고서야 임의자제하는 이런 분상(分上)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복을 자기가 찾아 쓰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법화경>에 “이 사실, 곧 이 실상(實相)을 아느냐? 모르면 못 경험했으면 이 깨달음을 경험하여라”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경계의 사실은 어떻습니까? 자기 마음이 자기 몸 안에 있다고 하고,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 혀, 몸, 생각에 끄달리는 사실을 실상이라고 여기고 산다 그 말 입니 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일러주신 계목(戒目) 곧 법로(法路) 법도(法道) 경 (經)에 따라 자꾸 그릇을 크게 해서, 온 법계를 다 집어삼키셔야 합니다. 뭘 집어삼키느냐. 본래 갖추어지신 건데. 마음에 대해서 사무치는 말을 해 놓았느냐? 전부 잘못 가르쳤습니다.

전부 들뜬 귀신의 소립니다. 아는 체 하는 마음이 앞서있는 소리를 했다 그겁니다. 그러니 여기 한 물건이라는 것도 한 물건이라 하면 억지로 갖다 지은 말로 이름을 지어 붙인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고 말씀하셔서 화두로 하셨잖 아요. 이게 바로 일러주신 말씀인데 여러분이 못 알아들으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아보려니 아득하지요. 알아보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탁 놓고는 “에이 모르겠다”하면서 모른다고 합니다. 화두를 놓아 버리세요. 팽개쳐 버리세요. 모르신다고 하시면서··· 모를 땐 어떤 것이 모르는 것이 있는가 문제를 찾아보고 알려고 하셔야 되는 데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을 완전하신 선생님이 문제를 완전하 게 내주셨는데도 내 팽개쳐 버리시면 되겠습니까! 바로 일러주신 말씀인데 여러분이 안 들으십니다.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라 이것도 공안입니다. 여러분이 이 뜻에 계합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본바탕을 바로 찾아 가지시는 겁니다.

어떤 것이 불성인가! 선(禪)이란 말이나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말과 단어에 집착하면 본성을 이해할 수 없고, 불성도 얻을 수 없다.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없다’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언어이다. 절대가 아닌 모두 상대적이고 분별적이고 개념적인 생각들이다. 부처는 모든 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그 시대에 살았던 승려들은 경전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단어에 집착해 있어서 부처가 가리키는 즉각적이고 살아 있는 경험을 놓쳤다. 깨달음과 불성에 대해 단지 토론만 했고, 중생이 과연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평만 했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겠구나. 그러면 개도 부처가 될 수 있나?’ 스님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오로지 경전만 읽고 수행은 하지 않아서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개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개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문제로구나. 그리하여 결국 조주선사에게 묻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들의 말과 단어에 집착하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선병(禪病)을 가지고 있다. 조주의 말에서 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도 그것이다. 무(無)란 무엇인가 이 무라는 것이 나와 같은가, 다른가? 또 생각하고 생각한다.  조주선사가 처방한 좋은 약을 써서 오히려 나쁜 병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만공 스님에게 조주의 ‘무’(無) 자 공안에 대해 여쭈었다. 스승님, 조주선사가 말씀하신 ‘무’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요. 아주 쉽다. 선원 뒤 정원에 서 있어 봐라. 거기에 아주 많은 무가 있다. 만공이 얘기한 무란 먹는 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아주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다. 만공은 이 사람에게 무라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무’ 안에서 어떤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라는 것이다. 따지지 말라. 생각하지도 말라. 조주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라. 왜 무(無)인가? 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결코 무를 이해하지 못하며, 본성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무를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시장에 가서 무를 보아라. 많은 무들이 너를 가르칠 것이다. 그것들은 선사들의 가르침보다 나을 것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조주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그러자 조주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가사를 하나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나 나갔다. 아니,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조주선사는 이런 대답을 했는가. 만약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할’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마룻바닥을 “땅!”하고 쳤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이다.’ 혹은 책상 위 연필을 들고 ‘이것은 연필이다.’라고 말해도 그 역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조주선사는 전혀 엉뚱하고 긴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조주선사는 제자가 어떤 특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여기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야. 그런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나. 여기에 감춰진 의미가 뭐지?’ 제자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조주선사는 제자의 이 생각하는 마음을 뚝 자르는 큰 의심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일곱 근이나 나가는 옷이란 있을 수가 없다.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주선사의 말은 무자 공안과 마찬가지로 질문한 이에게 큰 의심을 던져주고 있다. ‘도대체 스승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 보는 이것이야말로 조주선사가 지니고 있는 가르침의 기술이다. 그는 제자들의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말과 단어라는 칼을 사용한다. 생각을 끊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조주선사의 말에만 집착하여 답이 틀렸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면 선사가 이미 당신을 몽둥이로 30방 때렸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불성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할 수도 있다.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일곱 근의 가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모든 형태의 대답들은 불성을 지적하는 데 좋고 나쁘고 가 없다. 이밖에 얼마든지 다른 대답들이 나올 수도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인 유마거사와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거사는 부처님 생전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이다. 한 번은 그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부처님 귀에 들렸다. 부처님은 유마거사의 안부를 묻기 위해 제자들을 보냈다. 많은 승려와 보살들이 유마거사의 집에 모였다. 서로 문안 인사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법거량이 벌어졌다. 누군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이 아닌 것(不二中道)이 무엇입니까? 서로들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려 애썼다.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선과 악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오고 가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위대한 문수보살도 입을 열었다.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아주 훌륭한 생각” 이라며 감탄했다.

마침내 사람들이 유마거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나 유마거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정답이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깊은 대답이었다. 입을 열면 이미 두 개를 만드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다. 불성을 이해하고 싶으면 입을 열지 말아라. 말과 단어는 불성을 표현할 수 없다. 입을 닫으면 나와 우주는 하나가 된다. 둘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침묵하라. 그러면 내가 신(神) 임을 알게 된다.”라고 말한다. 불성도 이와 같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불성을 알고 싶으면 먼저 이 하나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기억하라,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코스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임제선사는 누가 질문만 하면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덕산선사는 방망이로 때렸다. 굳이선사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입을 열면 이미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다. 말과 단어는 거기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어떤 행동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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