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득의 허상-
아무리 많은 숫자를 동원해도 가장 많다는 사실을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는 “하늘만큼 많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늘은 보이는 것만도 크지만, 헤아리려고 하면 끝이 없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하늘만큼 많다”라는 말에 실감했을지 모르지만, 철들고 나서는 그런 말을 아예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무시해 버린다.
예를 들어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하늘만큼 사랑한다고 답하는 것은 그 사랑이 진심이 아니라고 오해받기에 딱 걸맞다.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정답일까? ‘하늘만큼’을 실감하지 못하는 철든 사람들이 고안해 낸 정답은 “내가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것인 듯하다. 모든 것을 무한정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끝에 강구된 타협안이 그 같은 대답일 것이다. 그 대답은 어느 한쪽이 살아 있는 동안은 사랑을 얻고 있다는 실감이 서로에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것은 살아 있는 양만큼 많이 사랑을 얻고 싶다는 욕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것과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을 얻는 양에서나 질에서 서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네가 죽을 때까지”라고 답하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사람들의 영악한 이성은 그 말에 대해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든 네가 죽을 때까지 든 자기가 얻고자 하는 사랑의 양이나 질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테지만, 내가 죽고 나서도 그 사랑을 계속 얻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욕구가 “내가 죽을 때까지”보다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더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하늘만큼 많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늘만큼 많이 얻기를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에 기인한다. 이 문제를 더 따져보면, 얻는다는 사실, 소위 획득이라는 사실이 어떤 물건을 꼭 붙들고 있는 것과 같은 실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래서 말로써는 획득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동원한다. 가능하면 비싸고 귀한 물질을 주고받음으로써 사랑의 획득을 보장받고 실감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랑을 확실하게 획득했다고 장담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다.
더 고상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글을 쓴다. 기발한 단어와 구구한 문장으로 진솔한 감정을 쥐어짜 내어 미사어와 수식어로 교묘하게 정성스러운 글씨로 옮겨서 보여준다. 하지만 문장과 글씨가 누구에게나 똑같은 감정이나 뜻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획득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험준한 산을 애써 올라가 탁 트인 정상의 바위에 사랑한다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 두면 그 획득은 바위마냥 견고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그런 정성들을 숱하게 보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한낱 무의미한 낙서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 이름의 당사자에게도 그것은 불신의 빌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왜 하필이면 여기에 새겼느냐, 이왕이면 좀 더 크게, 아니면 좀더 반듯이 새길 것이지 하고 은연중 무성의를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획득이 쉽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사랑 자체에서 찾기 일쑤이다.
사랑은 어쨌든 마음의 문제인 만큼, 사랑하는 마음에 저마다 불순이나 불성실이 있는 탓으로 그 사랑이 부실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생각이 상식적으로는 옳은 듯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는 감촉과 같은 물질적인 양태가 없이 마음만으로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은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도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처럼 붙잡을 수 없는 관념이 획득은 항상 충족되지 않은 허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명예의 획득도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제 유식학의 관찰을 적용해 보면, 문제는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획득이라는 개념에 있다. 우리는 분명히 뭔가를 얻고 있고 또 얻기 위해 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얻는다는 것은 정신만으로도 성립되지 않고 물질만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많은 재산을 획득한 사람들이 엄연히 이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로부터 많은 재산을 획득한 사람이 자신의 획득에 만족하여 더 이상 얻기를 포기한 예는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많이 얻으려 애쓰며, 또 그렇게 얻는 데는 남보다 일가견을 가진다.
획득은 마음에 의존해서 잠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획득도 허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정신도 물질도 아닌 것-
우리는 보통 세상의 모든 현상을 정신 아니면 물질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의 어느 하나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 중에는, 잘 생각해 보면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글씨 즉 문자 같은 것이 그렇다.
여기에 ‘승석’이라는 글씨를 썼다. 이 글씨가 물질인 양 보이는 것은 순전히 글씨의 색깔과 이 색깔이 스며든 종이 때문일 뿐이다. 글씨를 표시할 필기도구와 종이가 없다면 ‘승석’이라는 글씨는 물질적인 형체로도 표시될 방도가 없다.
글씨로 표시되는 ‘승석’이라는 이름이 물질은 아니라면 그것은 정신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승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승석이라는 이름이 정신일 수는 없다. 그 이름은 정신이 아닌 어떤 물건에도 붙일 수 있다. 내가 만약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면, 사람들은 그 별을 ‘승석’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유식학에서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면서 어떤 형상을 형성하는 요소들을 불상응행(不相應行)이라고 분류하다. 불상응행이란 마음의 기능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어떤 현상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듯이다.
이 같은 요소로서 첫째로 열거되는 것이 획득, 즉 득(得 )이라는 요소이다. 불상응행이란 쉽게 말하면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한 무리의 존재를 일컫는다. 이것들은 오직 마음과 물질에 의존하여 실체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실제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 자체로는 실체도 아니고 독자적 기능도 갖지 않으면서 임시로 존재하는 가짜의 현상일 뿐이다. 이런 임시적 존재를 불교에서는 가법(假法)이라고 한다. 물질의 특징은 다른 물질과 같은 공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또 유식학에서 심 와과 심소라고 불리는 정신의 특징 어떤 대상을 느끼거나 아는 작용을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획득은 물질이 아니다. 한편 획득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갖지는 못한다. 백만 원의 획득이 스스로 그 이자 소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획득한 사람이 그 돈으로 이자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획득 자체는 정신이 아니다.
유식학에서는 불상응행에 속하는 요소들로서 ‘득’을 비롯한 24종을 열거한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이고 주요한 개념들이다. 방위(方)와 시간(時)과 수(數)와 같은 개념도 여기에 속하고, 단어(名身)와 문장(句身)과 문자(文身)와 같은 요소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전의 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의 교리 연구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별개로 독립해 있는 존재로 간주했다. 즉 재산의 획득은 ‘득’이라는 실체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은 그런 요소들의 독립적 존재성, 즉 실체성을 이제까지 생각해 본 사실에 의거하여 인정하지 않은 데에 특징이 있다.
유식학은 이처럼 모든 것을 단순히 마음 작용으로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상 세계를 면밀히 관찰하여 정시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면서 인간 세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를 분석해 냈다.
-마음으로 짓는 인과-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사태를 목격한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무너질까 봐 불안에 더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모두들 그 사람의 황당한 불안을 우스갯거리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안고 있는 불안이나 걱정은 그처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 확실한 근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 불안이나 걱정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하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상념으로 귀착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생각의 원인이 반드시 실제의 사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경우와 같은 부질없는 걱정을 기우(杞憂)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사람의 터무니없는 걱정을 기우라고 일축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근심 걱정이 기우일 수 있다는 사실은 별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듯하다. 자신의 그것에는 그럴 만한 원인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긴 원인이 없는 근심 걱정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점에서는 기 나라 사람의 걱정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걱정과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걱정의 차이는 그 원인이 실제로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데 있겠지만, 그 걱정이 엄연히 나를 괴롭히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보면, 실재했던 원인이든 마음으로 지어낸 원인이든 어떤 결과를 낳고 변화를 초래하기로는 동일한 힘을 지닌다.
기우를 낳는 것과 같은 원인은 어떤 마음이 다른 마음을 낳은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원인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원인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나팔꽃 씨는 봄이 되어야만 반드시 땅속에서 싹을 틔운다. 그러나 마음으로 짓는 원인은 그렇지 않다. 유치했던 어린 시절에 간직했다가 잊어버렸던 어떤 생각이 노인이 된 먼 훗날에도 그대로 연결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몇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다시 보게 되면, 그동안 그 친구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변했을 수도 있음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때의 인상으로 그 친구를 대하게 된다. 또 이제 같이 늙어 가는 나이로 졸업 후에 처음 만난 초등학교의 은사는 말썽꾸러기였다는 그때의 생각으로 전혀 달라진 나를 대한다. 고국이 아닌 외국에서 만났더라도 그렇게 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마음으로 짓는 원인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지더라도 직접 연결되어 구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진즉 고향을 떠나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든 한 노인에게 어느 날 문득 어릴 때의 염원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림으로만 보았던 이국의 어느 바닷가에 가서 망망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는 염원이었다. 고향에서의 그 염원은 진즉 잊혔다. 이제 불현듯 그 염원을 떠올린 노인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처럼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원인이 반드시 눈으로 목격했거나 실제로 발생했던 사실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거나 발동하는 상념들이 더 강력한 원인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해 왔다. 이 같은 마음 작용을 포괄적으로는 원인이라고 분류할 수는 있지만, 그냥 원인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그렇게 이해하는데 그치면, 원인이라는 것이 너무 복잡 다양하고 모호해짐으로써 원인을 규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인을 그 역할에 따라 분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교적 사고의 독창성과 진가는 바로 원인에 대한 각별한 이해에 있다. 이 이해는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근간을 형성한다.
-인연과 연기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잘된 일의 원인을 이해하여 같은 결과 또는 보다 나은 결과를 얻고자 하고, 잘못된 일의 원인을 파악하여 나쁜 결과가 되풀이되는 사태를 예방하고자 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지식이 형성되고, 그 관계를 잘 활용하는 데 삶의 지혜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하여 이해해야 할 원인이 ‘이 결과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듯이,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시비를 가리다 보면 사태는 전혀 바라지 않은 상태로 악화되기도 한다.
시비를 가리는 일은 곧 원인을 끌어내어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밝히는 것인데, 이 같은 인과의 연결에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일쑤이다. 그 이유는 인과의 연결이 다른 방식으로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 또는 그 결과를 초래한 다른 주요 원인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에 있다. 봄이 되면 담장 밑에는 여러 가지 풀이 돋아난다. 새싹이 돋는 것은 봄이라는 원인 때문이라고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새싹이 돋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언제나 봄이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겨울에도 봄과 같은 날씨에는 간혹 매화나무에 꽃이 피기도 한다.
그러므로 새싹이 돋아나는 원인이 반드시 봄인 것은 아니다.
담장 밑에 돋아난 풀 중에는 나팔꽃도 있다. 그런데 나는 나팔꽃 씨앗을 심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팔꽃이 다른 씨앗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리는 없다. 내가 씨앗을 심은 적도 없고 다른 사람도 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나팔꽃은 지난해에 떨어진 씨앗에서 나왔을 것이다. 나팔꽃은 오직 나팔꽃 씨라는 원인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결과의 원인을 오직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원인에서는 오직 한 가지 결과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하나뿐인 원인만으로는 결과를 낳지 못하므로, 생성과 변화와 소멸의 현실에서 보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팔꽃 씨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고, 봄과 같은 온도와 습도와 햇볕 등의 다른 원인이 있을 때, 씨는 싹과 줄기를 내어 꽃을 피우게 된다.
다른 원인이 갖추어졌더라도 나팔꽃 씨가 없을 경우에는 결코 나팔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원인에는 필수적인 것과 보조적인 것, 또는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어떤 사태에 대해 직접적이거나 필수적인 원인만을 고려하거나 거기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어렵고 복잡하게 된 것은 간접적이거나 보조적인 원인이 거의 무수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이 간접적인 원인들을 잘 헤아려 냄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사태의 진상에 더욱 접근할 수 있으며, 그릇된 결과를 피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직접적이거나 필수적인 원인을 인(因)이라고 하고 간접적이거나 보조적인 원인을 연(緣)이라고 하여, 세상의 모든 변화가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인연에 의한 세상의 이치를 연기(緣起)라고 표현한다.
연기는 단독의 직접적인 원인에 의해서만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경우의 ‘연’은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 조건 또는 발단으로서 작용함을 의미한다. 씨앗이 적당한 온도와 습도와 햇볕 등에 의해 발아하여 꽃과 열매를 맺을 때, 씨앗과 온도와 습도와 햇볕 등이 모드 ‘연’이다. 다만 씨앗을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조건이라는 의미에서는 ‘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예로 든 기우의 경우에는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하나의 발단 또는 조건이 되어, 해와 달이 떨어질 수도 있다든가 땅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다른 생각과 걱정을 결과로 초래했다.
여기서 앞의 생각은 뒤의 생각이나 걱정에 대한 ‘연’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연’이 일으키는(起) 것이라고 파악하는 연기의 이치는 타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통 ‘연’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세상의 모든 것은 그러한 연들 이 이리저리 결합한 조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연들의 결합 또는 조작에 의해 성립된 모든 것을 불교에서는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연들의 결합이나 조작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무위법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 이유, 원인이 되는 연들은 무수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학에서는 그 연들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즉 인연, 등무간연, 소연연, 증상연이 그것이다.
다만 유식학의 관점에서는 주요한 기능을 발휘하는 연들 이 모두 마음 작용의 범위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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