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도 꼭 사찰에 있는 법당만 법당이 아니라 각자 자기 몸뚱이가 바로 법당입니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상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법당일 수밖에요.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라면 변소간도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인 셈이죠. 법당에 와서 절을 할 때도 ‘ 아, 저 부처님 모습이 내 모습이고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이니 모두가 둘이 아니구나’하고 마음을 둥글려서 한다면 일배를 올린다 해도 삼천배 못지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이치를, 이렇게 시원하고 광대무변한 이치를 여러분 모두가 알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어서 우주 바깥도 한 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문지방 너머도 한생각, 천리만리도 한 생각, 지구 바깥도 한 생각, 한 생각이라는 것은 빛보다 빨라서 한 찰나에 나고 들 수 있는 거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이 세상에 형성되지 않았다면 어찌 상대가 있고 생활이 있고 부처님이 계신 줄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과 여러분이 둘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겠습니까. 부처님의 마음으로써 수없는 보살이 탄생을 했고 보살의 이름이 탄생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프면 여러분의 불종이 즉 말하자면 주장자가 약사가 돼주고 의사가 돼주고, 또 때에 따라서 명이 짧으면 칠성이 돼주고 좋은 데를 못 가면 지장이 돼주고 이렇게 찰나찰나 나투어 여러분 마음속에 다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네들을 찾아오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법당에 오지 말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만 명이라 할지라도 또 만 명의 영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주인공의 한마음에 집어넣는다면 몇이나 되겠습니까. 부처님이 이 허공에 꽉 차 있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꽉 차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응신으로 나투어 화하고 있습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인간까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마음 아님이 없고, 내 모습 아님이 없고 내 생명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항상 부처님께서는 응신으로 나투어 화해 주십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어느 모습으로 됐을 때, 어느 것을 봤을 때, 어느 마음으로 됐을 때, 내가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한다고 하겠느냐, 내가 있다고 하겠느냐, 내가 부처라고 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찰나찰나 고정된 게 없이 지나가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 없고, 할 것이 없고, 내가 함이 없이 했다고 하신 겁니다. 여러분이 여기 오실 때도 한 발짝 떼놓으면 한 발짝 없어졌고 한 발짝 떼놓으면 한 발짝 없어졌습니다. 묵묵히 떼놓을 뿐이지 무엇을 내가 떼어놨다고 하며 어떤 발자국을 떼어놨을 때 내가 내 발자국을 떼어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뒷 발자국 쳐다볼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떼어놨다는 생각도 없이 앞으로 또 한 발짝 나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생활이 전부 그러합니다.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갈 뿐이니 집착에서 벗어나 놓고 가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그만 회사를 경영하는데 공장에 기계가 자꾸 고장이 나고 열심히 납품을 해도 수금도 되지 않고 아주 힘들었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하길래 “그게 당신 회사가 아니라 바로 당신 주인공의 회사니 주인공이 다스리게 모든 걸 맡겨놓으세요.
당신은 물질세계에서 물질로서 뛰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는 바로 참 당신이 뛰는 거예요. 그러니 참당신이 현실에 물질적인 당신하고 같이 수레바퀴 돌아가듯 같이 돌아가야만 서로가 상봉을 하는 것이며, 같이 여여한 것이며, 같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며, 같이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것이며, 같이 찰나찰나 나투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당신은 현실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보이지 않는 당신에게 맡기고 심부름만 하세요.” 그랬더니 지금은 그 기계가 고장도 안 나고 회사도 잘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자기 자불의 시봉자가 돼야만 하겠죠.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시봉 자죠. 항상 내가 했다는 게 있고 내가 내세울 게 있고 내가 한다고 하고 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용납을 안하십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세상 허공을 다 한데 합쳐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는 그 자체가 바로 있는 것이죠. 부처님이라는 이름도 이름일 뿐이지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가 아닌 데서 부처가 있는 것이지, 부처라고 내세운다면 그건 이미 부처가 아니죠. 여러분도 생활하면서 아시겠지만 돈도 생명이 있고 컵 하나에도 생명이 있고 모든 일체 만물만생에게는 다 생명이 있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말을 하는 것도 한마디 한마디 하는 대로 연방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말이라는 것은 말로 떨어져서는 부처님께서도 용납 안 하시지만 진리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과 뜻과 행이 똑같이 한데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말이라야 공법의 수레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닥치죠. 모두 영계성이나 유전성이나 세균성 인과성 업보 성 이런 데서 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다 대처를 하시렵니까.
그래도 찰나찰나 공해서 돌아가는 걸 아시는 분들은 좀 낫죠.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것은 단순히 한 집안의 우환이나 병 고액 난을 막기 위해서만은 아니죠. 세세생생 생사에서 벗어나는 공부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첫째는 업을 짓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인연까지 끊으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인연은 짓되 착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로 업을 짓지 않아야 과보를 받지 않으며 셋째 과보를 받지 않아야 윤회에 말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넷째 윤회에 말리지 않아야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죠. “기도하는 것과 관하는 것은 다르다, 기도하는 것은 타의에 놓고 둘로 보고 기도하는 것이지만, 관하는 것은 자의에, 바로 직접 하나로 보고 닥쳐오는 대로 맛을 보고 자기 종자를 알 수 있게끔 바로 자기에다 놓는 것이다”라고요.
생사에서 벗어나는 첫째가 업을 짓지 않는 것이라면 업을 짓지 않는 첫째는 바로 내 안에다 몰록 놓고 관하는 것입니다. 그게 관(觀)입니다. 관하게 되면 바로 대뇌로 통합니다. 대뇌를 통해서 사대로 통신이 되고 사대로 통신이 되면 그 몸속에 모든 생명의 의식들이 자기 소임 맡은 곳에 작용을 해줍니다. 이것은 심성과학일 수도 있고 심성 의학일 수도 있고 심성 천체물리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역력한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기가 무시하고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자기 뿌리를 못 믿어서야 되겠습니까.찰나찰나 닥쳐오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마음으로 지은 것은 마음으로 해결을 하고 마음으로 대처를 해야 합니다. 몸으로나 말로나 운력으로나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관하라 고 하는데 이것은 직접 대뇌를 통해서 사대로 통신이 돼서 정수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정수라는 것은 뭘 뜻하느냐. 정수라는 것은 바로 컴퓨터와 같은 겁니다. 부처님 정수에서는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당당하시고 언제나 평등 공법으로써 여러분을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문이 열리지 않아 모를 뿐이지 지금도 부처님은 그렇게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찾으려면 문이 없는 문을 찾아야지, 문이 있는 문을 찾는다면 백날을 찾아도 그 문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정수에 입력이 돼 있고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또 입력이 돼 차례로 나오고 있습니다. 흔히들 팔자 운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차례로 나오는 걸 어찌 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게 아닙니다. 헌물을 새 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어떠한 게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걸 입력하면 과거의 것이 없어지고 새로 입력한 것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녹음 테이프에 새로운 걸 입력하면 앞의 것이 지워지고 새로 녹음한 것이 남아있는 것과 같은 원리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죠. 끊는 게 아니라 바로 거기다가 관하고 놓으라고요. 예전의 공부하던 분들은 ‘이뭣고’하고 화두를 들고 계셨지만 이젠 이미 그놈이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들어가야죠. 일거수일투족이 다 거기서 그놈이 하는 거니까 놓고 가시라 이겁니다. 그것을 ‘자불’ 이라고 그러죠. 내 자불을 모른다면 일체제불의 마음을 어떻게 알며 일체 만중생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떻게 알아서 대처를 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관하면 새로운 것이 입력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레와 같이 돌아가는 그 뜻에서는 팔자 운명도 없고, 병 붙을 자리도 없고, 잘못됐다 잘됐다가 붙을 자리도 없고, 억울한 점이 붙을 자리도 없고, 유전성이니 영계 성이니 인과성이니 세균성이니 업보 성이니 하는 것도 다 없어집니다. 이게 엄청난 마음공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고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죄짓는 것도 없고 선을 짓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 만약 마음이 고정돼 있어서 선으로만 간다면 악이 생기고 악으로만 간다면 또 선이 생기기 때문에 그건 아무리 해도 양면을 다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찰나찰나 놓아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자불, 즉 불성이 본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영원한 자기의 근본인 불성이 없다면 이렇게 살아서 움죽거리지도 못해요. 아마 송장이 될 겁니다. 자기의 뿌리, 자불만이 자기를 이끌어갈 수 있는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속에는 수많은 생명의 의식들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조복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시 자라 생각하고 거기다 놓을 때 비로소 안에 있는 의식들이 한마음으로 따라주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한생각이면 그 의식들도 다 한 생각으로 따라주니까 그게 조복이 되는 거죠. 그래서 모든 것을 거기다 놓게 되면 깨우쳤든지 못 깨우쳤든지 그걸 떠나서 벌써 마음부터 편안해지고 가정이 유유해지고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자꾸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 생깁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