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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범부의 용심(用心)!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 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하게 되어있습니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음양분별이 있는 3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세계는 4차원입니다.

일즉다(一卽多)이면서 다즉일(多卽一)인 세계이지요. 예를 들어, 밤하늘의 달은 분명 무진장합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강물 속에 비친 달은 하나뿐입니다. 결국 깨달음의 세계는 생각 속에서 온 세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가장 극복해야 하는 것이 선악의 분별심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별심은 극복됩니다. 원래부터 분별심이란 없는 것이니까요. 인생관을 긍정적으로 갖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십시오. 이 세상은 마음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대상과 관계에 애착하지 말고 공평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연 따라왔다 가는 것으로 생각해야지 붙들어 매려고 하면 고통이 옵니다.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리라 하는 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 천상의 이 세상엔 무한한 중생이 살고 있다며 이 모든 중생들을 다스리려면 방하착(放下着)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악(善惡)으로 나와 남을 대결시켜 놓으면 미운 놈이 나타납니다. 보세요, 물이 0℃ 이하로 내려가면 얼어요 마찬가지로 미움에 집착하면 간담이 서늘하게 됩니다. 또 기뻐해보세요, 심장이 뜁니다. 분노해도 마찬가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이 커지다 보면 비장이 다칩니다. 걱정하고 슬퍼하며 놀라고 두려워하는 등 이 같은 7정(七情)은 인간의 5장(五臟)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7정을 없애주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세계는 인간 현상계 분별심을 떠난 본래 마음자리입니다. 절대적인 선인 지선(至善)의 경지이지요. 남의 얘기 같습니다만 지구촌의 영웅호걸들이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원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평생을 몸으로 보이신 동체대비(同體大悲) 가르침은 결국 모두 내 몸과 같은데 원수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지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는데 남을 불편하게 할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에 의지해 인연 따라 남을 유익하게 하십시오. 사랑이니 사업이니 찾기 전에 우선 내 인격과 의식구조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 행복과 심성이 인간의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사이에 늘 따르는 것이 갈등입니다. 실제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로 대인관계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갈등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쉼 없이 크고 작게 운명처럼 닥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는 사람살이에 적지 않은 과제가 됩니다. 결국 두 가지의 길입니다. 어떠한 경계나 대상을 따라 그대로 수순함으로써 결과와 이후의 역사를 복되게 하는 경우가 있고, 닥친 경계를 용기 있게 거스름으로써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담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됐던 이 같은 결정의 과정에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용기라는 덕목을 지적한 것은 수순 하지 못할 경계에서 하심으로 행동하는 경우와 거스르지 못할 경계에서 과감히 거슬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수순해야 할 경계에서 오만하게 거스르며, 거슬러야 할 경계에 대해서는 비겁하기에 자타(自他)를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탐욕과 어리석음 이기심 등의 경계에서는 거스르고 남의 아픔과 불행을 자비심으로 감싸고 고통을 나누기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한편 전법의 공덕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데, 일단 포교에 나섰을 때는 믿으라고 먼저 강요하지 마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대상으로 삼는 사람에게 우선 부처님 가르침을 찬찬히 이해시켜 가면서 그 사람 스스로 진리를 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후 믿음은 수반되기 십상입니다. 우리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육도 이러한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혜의 창조적 동력을 계발시키는 근본교육을 실행함으로써 행위규범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민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봅니다. 지혜는 자유로운 정신의 바탕에서 체득됩니다. 요즘 서구산업사회 끝에 서있는 동서양 모두, 다시 이 같은 동양의 지혜의 덕목을 탐색하고 활발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하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나는 상좌복이 많은 스님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조계사 주지등 은상좌가 있고, 법상좌로 6명이 있는 데다 외국인 유발상좌도 여럿 됩니다. 미주 유럽 동남아지역의 상좌들은 주로 학자들이지요. 외국인 유발상좌들은 불교 관련 출판물들은 물론이고 종교학 관련서들을 꼬박꼬박 챙겨서 보내줍니다. 서신으로 통하는 법거량도 그 나름의 공부를 점검하는 수단이 됩니다.

받기 어려운 사람몸 받고 나온 금생에 일대사 인연도리를 깨닫는 수행에 매진하시기 거듭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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