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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속 세상

장엄하게 펼쳐진 파노라마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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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천차만별로 만들어 놓고 천차만별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알아야 하겠지요?
또 나를 돌아다볼 때 온 것은 누구이고 간 것은 누구냐, 누가 울고 누가 웃느냐,
그렇게 하는 근본은 누구냐를 알아야 하겠지요?
간단히 말해서 자기를 형성시켰고 수억 겁의 진화를 이끌었고

지금의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本來 면목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있다면 대답 좀 해보아라 하는 것이 '관'입니다.
말하자면 지켜보는 것이기도 걷는 것은 누구고 말하는 것은, 듣는 것은,
보는 것은 누구인지 지극한 마음으로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 '나'라는 조건을 한번 돌아다보는 계기가 있어야 할 것이고
돌아다봤으면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놓고 맡길 줄 알아야 하겠지요.
믿고 맡겼으면 바로 거기서 내가 나왔기에 상대가 있고 세상이 벌어졌구나,
그러니까 나는 나가 끌고 다니고 나는 나가 있기에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용도대로 들이고 낼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이론이 아니고 말. 따라서 관법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믿음이 강해야 합니다.
옛날 선사들이 목숨 떼어놓고 뚫어라 하는 것은 믿음이 그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마음공부가 제대로 익어가질 않는다는 말 믿음이 곧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 하듯이
부처님 가르침을 철석같이 믿어야 합니다.
그냥 나는 불자니까 부처님 말씀 믿는다 하는 정도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능력으로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급박한

경우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켜볼 때 자꾸 망상이 끼어들게 됩니다.
둘째로 믿었으면 그 믿는 자리에 몰록 내려놓고 맡겨야 합니다.
맡기라고 하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면서 맡긴다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비는 것이지 마음공부하는 관법이 아닙니다.
맡기고 놓는다는 것은 마치 용광로에 무쇠 쓸어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만 부처님 자리와

주인공 자리는 그냥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므로 마치 코드를 빼놓은 격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맡기고 놓는다는 것은 부처님 자리와 코드를 연결해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부처님 자리에 연결되었다면 죽든지 살든지 뭐가 겁날 게 있습니까?
자성 부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그것이 그때그때의 놓고 맡기는 작업입니다.
내가 대답을 하는 중에 '주인공 당신이 만든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일러주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해서 코드를 이으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어느 분이 '그거는 기독교의 절대자 신앙과 같은 게 아니냐'라고 한다는데
그것은 둘이 아닌 도리를 모르는 말 '주인공'하니까 무슨 대상으로 생각되는 모양인데
주인공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일체가 둘이 아닌데

주인공 하면 어떻고 참나 하면 어떻습니까?
밖으로 돌아서 찾으려 하지 말고 안으로 찾으라는 뜻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믿고 놓는 것, 그것이 올바른 '관'의 시작입니다.
그런 다음에 지켜보는 것입니다.
뭔가 볼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없는 중심'을 그냥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은 '그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하는데
둘 아니게 믿고 들어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평등한 마음, 텅 빈 마음으로 내면을 주시하는 것,
그러면서 관하는 나와 관해지는 주인공이 나뉘지 않는 것,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잘 아시는 얘기이겠지만 부처만이 부처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만이 주인공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참나만이 참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바꿔놓아도 좋다
어차피 공이요 이름인 것을'주인공만이 주인공을 증명할 수 있다'
'나를 있게 한 것도 주인공이 한 일, 지금 내게 닥친 이 일도 주인공이 한 일,
그러니 주인공만이 답을 알 것이고 되게 하는 것도

안 되게 하는 것도 주인공이 할 일이다'라면서
일심으로 나아가서는 무심으로 지켜볼 때 진정한 '관'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또 몰록 놓지 않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진정으로 '관'이 될 때 그게 바로 참선인 것이지요.
일체를 놓고 관하라 하는 것은 일체가 같이 돌아가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체와 같이 돌면 행려? 그대로 참선 아니고 뭡니까?
자리 틀고 앉아야만 참선은 아니지요.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내 마음속에 부처님께로 이어지는 주인공이란 이름의 우체통이 있다.
그 우체통에 닥치는 대로 넣으면 배달이 되고
답장도 온다. '답장을 지켜보는 게 '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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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행하는 것!

그러나 우리 중생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아서 자신의 몸이 불에 타서

원래의 크기에서 줄어들고 조그마한 흔들림에도 크게 변화가 오듯 삶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어느 때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질지 모르니 항상 정진하고

노력하여 게으름을 버리고 지혜를 넓혀 나의 이익보다 남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청정한 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이를 통해 모름지기 내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를 멸시해도 나 자신은 잘난 체하지 말고,

항상 하심(下心)하는 근본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속에 더러운 때를 닦아내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공경하는 마음의 공부를 많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오는 것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사바세계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선망 부모와 현세의 부모에게 감사하고 나의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속적인 생활에 그대로 머물기를 결심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회적인 단위로서 가족의 유대감을 권장하면서 가족관계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것은 연기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으니

작은 단위의 가족관계에서부터 충실하다 보면

자연 사회생활도 물 흐르듯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상하신 말씀이십니까.

이렇듯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세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우리 주위의 작은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집착을 끊고 주위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그들을 위해 작은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삼아 올바르고 참되게 살아간다면

깨달음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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