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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존재 )
내 처지를 생각하는 것도 연상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등 무간 연(等無間緣)이다. 유채꽃과 같은 물질은 등 무간 연이 될 수 없다. 등 무간 연이란! 마음의 활동에서만 원인으로 작용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은 보통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선은 우리의 생각 즉 기억을 한 장면으로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의 상황을 다시 끌어내어 계속 생생하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자는 등 무간 연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슷한 장면의 정지된 사진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영화의 경우에는 장면과 장면이 잴 수 있을 정도의 시간 간격으로 이어지지만, 생각의 경우에는 그 간격을 시간 단위로 잴 수 없을 만큼 순간적으로 장면이 이어진다. 생각은 분명히 선후의 순서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간격은 없다’(無間)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짧다. 또 우리가 일상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 가지’(等 ) 마음이 꼬리를 물고 찰나적으로 이어지면서 생각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등무간연은 앞사람이 다 건너가고 나서야 다음 사람이 건너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즉 먼저 발생한 생각이 종식될 때라야, 이 종식이 연(조건)이 되어 다음 찰나의 새로운 생각이 발생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각은 등무간연에 의해서 형성된다. 누군가를 곱게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곱게 보이고, 이와는 반대로 밉게 보면 그의 모든 것이 밉게 보이는 것도 등 무간 연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등 무간 연에서 ‘무간’이라는 말은 시간적 간격이 무시됨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첫사랑의 연인을 그때의 인상으로 회상한다. 달력의 사진은 내 고향의 봄을 생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고향의 봄을 찍은 사진이 없이 오직 마음속으로 고향의 보리밭과 유채꽃을 생각해 낸다.
한 장의 사진이라는 대상이 고향의 봄을 떠올리는 마음 작용의 원인이 되었다. 이때 고향의 보리밭과 유채꽃을 본 것은 물론 내 마음일 뿐이다. 대상을 소연이라고 하므로, 여기서는 달력의 사진이 소연 연(所緣緣)이다.
이 경우의 대상 즉 소연은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소연 연이라 불린다.
소연 연이란 마음이 뭔가를 인식하게 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유채꽃 사진이라는 소연 연에 의해 내 마음은 과거의 장면의 떠올려, 시간의 간격과는 상관없이 작용하는 등 무간 연에 의해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을 계속하지만, 그때의 상황이 고스란히 생각나지는 않는다. 하나의 마음이 찰나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등무간연이라면, 우리가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낼 때 그 기억은 끊이지 않고 생생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억력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다.
등무간연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원인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한 일들이 모두 동일한 힘으로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는 힘의 강약에 따라 우리의 기억에는 단절이나 망각이 생긴다. 이러한 사태를 야기하는 이유도 우리는 낱낱이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기억을 강하게 하는 요인도 있었을 것이고 약하게 하는 요인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너무도 많다. 이 같은 요인들을 증상 연(增上緣)이라고 한다.
증상이란 ‘영향을 주는 힘’을 뜻한다. 증상 연은 이제까지 말한 세 가지 원인, 즉 인연과 등 무간 연과 소연 연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나쁜 방향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좋은 방향의 것이든 나쁜 방향의 것이든 그것은 영향을 주는 힘으로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하여 주변의 모든 것이 반드시 구체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특별한 힘을 발휘하지는 않지만, 그냥 있는 자체로써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조건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방에 누워 잘 수 있는 것은 집 때문이지 집이 서 있는 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엄밀히 생각하면 땅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잠잘 수 있다. 그러므로 집과 함께 땅도 증상 연이다. 내가 편하게 잠자는 데에는 집이 유력한 조건이고, 누구에게나 널려 있는 땅은 별로 힘이 없는 조건인 듯하다. 그러나 이 두 조건에 의해 내가 잠잘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에 따라 증상 연에는 유력과 무력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 누군가가 내게 돈을 빌려주는 경우가 유력의 증상 연이다.
이에 대해 무력의 증상 연은 구체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조건이다. 즉 소극적으로 작용하는 조건이 무력의 증상 연이다. 결국 증상연은 존재의 원인이 매우 광대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불교 특유의 개념이다. 인간과 세계라는 존재는 반드시 어떤 원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개념이 곧 증상연이다.
(인연)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도 하고,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곧 연기법을 깨우치는 것으로 집약된다고도 한다.
이 설명은 간명한 만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연기라는 말 자체는 ‘연(緣)하여 일어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뭔가에 의존 허여 일어남, ‘어떤 조건에 다라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연이 일으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연이란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어떤 것이 발생하여 변화하고 소멸하게 하는 조건, 근거, 원인 등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을 이 정도로 설명하더라도 연기법이라는 이치가 실감이나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연이라는 말이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그것은 단지 원인이라는 말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기 때문이다. 연이라는 말은 가장 직접적이거나 한 가지 원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조건이나 상황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순한 인과율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불교에서 인간의 삶과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고 가능한지를 이해한 데 적용되는 고차원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같은 사실을 ‘연’이라는 한 마디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연’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네 가지 연으로써 설명하는 데에서는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4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넓은 의미의 원인, 즉 조건을 넷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 넷은 인연(因緣), 등 무간 연(等無間緣), 소연 연(所緣緣), 증상 연(增上緣)이다.
먼저 인연이란 원인, 특히 가장 필수적이고 일차적인 원인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한겨울인데도 내 방의 창가에 있는 화분에서는 나팔꽃의 줄기가 움터 오르고 있다. 더욱이 그 화분은 지난여름에 나팔꽃을 심었던 것도 아니고, 거기서는 철쭉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여러 가지 조건 즉 연이 있을 것이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창가에 햇볕이 잘 든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화분에서는 나팔꽃의 줄기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햇볕이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 나팔꽃의 씨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줄기가 터져 나온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은 경우에 나팔꽃의 씨를 인연이라고 한다. 이처럼 씨앗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조건은 필수적인 원인이므로 친(親) 인연 또는 정(正) 인연이라고도 불린다. 유식학의 관점에서는 씨앗 즉 종자와 함께 현행(現行)을 인연이라고 한다.
제출 또는 연출을 뜻하는 현행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양태로 드러내거나 지식의 원천이 될 기억으로 잠복시키는 의식 활동을 의미한다. 종자와 현행이라는 인연이 다른 세 가지 연과 특히 다른 점은 그 자체가 직접 변화하여 결과가 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볍씨가 쌀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토양과 수분이 필요하므로 토양과 수분도 쌀의 원인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므로 인연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볍씨가 직접 변화를 겪으면서(이 변화의 과정이 공능 차별이며 현행이다.) 쌀로 바뀌지만, 토양이나 수분이 직접 쌀로 바뀌지는 않는다. 토양이나 수분과 같은 것은 쌀을 낳는 간접적인 조건으로서 증상 연이라고 불리는 원인이다.
(허상)
아무리 많은 숫자를 동원해도 가장 많다는 사실을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는 “하늘만큼 많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늘은 보이는 것만도 크지만, 헤아리려고 하면 끝이 없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하늘만큼 많다”라는 말에 실감했을지 모르지만, 철들고 나서는 그런 말을 아예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무시해 버린다. 예를 들어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하늘만큼 사랑한다고 답하는 것은 그 사랑이 진심이 아니라고 오해받기에 딱 걸맞다.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정답일까?
‘하늘만큼’을 실감하지 못하는 철든 사람들이 고안해 낸 정답은 “내가 죽을 때까지”라고 말하는 것인 듯하다.
모든 것을 무한정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끝에 강구된 타협안이 그 같은 대답일 것이다.
그 대답은 어느 한쪽이 살아 있는 동안은 사랑을 얻고 있다는 실감이 서로에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것은 살아 있는 양만큼 많이 사랑을 얻고 싶다는 욕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것과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을 얻는 양에서나 질에서 서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네가 죽을 때까지”라고 답하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사람들의 영악한 이성은 그 말에 대해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든 네가 죽을 때까지든 자기가 얻고자 하는 사랑의 양이나 질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테지만,
내가 죽고 나서도 그 사랑을 계속 얻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욕구가 “내가 죽을 때까지”보다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더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하늘만큼 많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늘만큼 많이 얻기를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에 기인한다. 이 문제를 더 따져보면, 얻는다는 사실, 소위 획득이라는 사실이 어떤 물건을 꼭 붙들고 있는 것과 같은 실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래서 말로써는 획득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동원한다. 가능하면 비싸고 귀한 물질을 주고받음으로써 사랑의 획득을 보장받고 실감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랑을 확실하게 획득했다고 장담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다.
더 고상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글을 쓴다.
기발한 단어와 구구한 문장으로 진솔한 감정을 쥐어짜 내어 정성스러운 글씨로 옮겨서 보여준다. 하지만 문장과 글씨가 누구에게나 똑같은 감정이나 뜻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획득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험준한 산을 애써 올라가 탁 트인 정상의 바위에 사랑한다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 두면 그 획득은 바위처럼 견고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그런 정성들을 숱하게 보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한낱 무의미한 낙서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 이름의 당사자에게도 그것은 불신의 빌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왜 하필이면 여기에 새겼느냐, 이왕이면 좀 더 크게, 아니면 좀더 반듯이 새길 것이지 하고 은연중 무성의를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획득이 쉽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사랑 자체에서 찾기 일쑤이다. 사랑은 어쨌든 마음의 문제인 만큼, 사랑하는 마음에 저마다 불순이나 불성실이 있는 탓으로 그 사랑이 부실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생각이 상식적으로는 옳은 듯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는 감촉과 같은 물질적인 양태가 없이 마음만으로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은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도 상식에 속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처럼 붙잡을 수 없는 관념이 획득은 항상 충족되지 않은 허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명예의 획득도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제 유식학의 관찰을 적용해 보면, 문제는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획득이라는 개념에 있다.
우리는 분명히 뭔가를 얻고 있고 또 얻기 위해 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얻는다는 것은 정신만으로도 성립되지 않고
물질만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많은 재산을 획득한 사람들이 엄연히 이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로부터 많은 재산을 획득한 사람이 자신의 획득에 만족하여 더 이상 얻기를 포기한 예는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많이 얻으려 애쓰며, 또 그렇게 얻는 데는 남보다 일가견을 가진다. 자신의 획득을 입증해 줄 그의 정신은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획득은 마음에 의존해서 잠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획득도 허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본래 아닌 것)
우리는 보통 세상의 모든 현상을 정신 아니면 물질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의 어느 하나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 중에는, 잘 생각해 보면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글씨 즉 문자 같은 것이 그렇다. 여기에 ‘승석’이라는 글씨를 썼다. 이 글씨가 물질인 양 보이는 것은 순전히 글씨의 색깔과 이 색깔이 스며든 종이 때문일 뿐이다. 글씨를 표시할 필기도구와 종이가 없다면 ‘승석’이라는 글씨는 물질적인 형체로도 표시될 방도가 없다. 글씨로 표시되는 ‘승석’이라는 이름이 물질은 아니라면 그것은 정신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승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승석이라는 이름이 정신일 수는 없다.
그 이름은 정신이 아닌 어떤 물건에도 붙일 수 있다.
내가 만약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면, 사람들은 그 별을 ‘승석’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유식학에서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면서 어떤 형상을 형성하는 요소들을 불상 응행(不相應行)이라고 분류하다. 불상 응행이란 마음의 기능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어떤 현상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듯이다. 이 같은 요소로서 첫째로 열거되는 것이 획득, 즉 득(得 )이라는 요소이다. 불상응행이란 쉽게 말하면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한 무리의 존재를 일컫는다.
이것들은 오직 마음과 물질에 의존하여 실체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실제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실체도 아니고 독자적 기능도 갖지 않으면서 임시로 존재하는 가짜의 현상일 뿐이다.
이런 임시적 존재를 불교에서는 가법(假法)이라고 한다.
물질의 특징은 다른 물질과 같은 공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또 유식학에서 심 와과 심소라고 불리는 정신의 특징은 어떤 대상을 느끼거나 아는 작용을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획득은 물질이 아니다. 한편 획득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갖지는 못한다.
백만 원의 획득이 스스로 그 이자 소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획득한 사람이 그 돈으로 이자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획득 자체는 정신이 아니다.
유식학에서는 불상 응행에 속하는 요소들로서 ‘득’을 비롯한 24종을 열거한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이고 주요한 개념들이다. 방위(方)와 시간(時)과 수(數)와 같은 개념도 여기에 속하고, 단어(名身)와 문장(句身)과 문자(文身)와 같은 요소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전의 불교, 특히 설일체 유부의 교리 연구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별개로 독립해 있는 존재로 간주했다. 즉 재산의 획득은 ‘득’이라는 실체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은 그런 요소들의 독립적 존재성, 즉 실체성을 이제까지 생각해 본 사실에 의거하여 인정하지 않은 데에 특징이 있다. 유식학은 이처럼 모든 것을 단순히 마음 작용으로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상 세계를 면밀히 관찰하여 정시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면서 인간 세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를 분석해냈다.
(주체)
유식학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 즉 지식은 오인이요 착각이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비량(非量)이란 그 착각 또는 오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소위 ‘자아의식’으로서 이러저러한 것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아뢰야식이라는 이름으로 잠복해 있는 나의 경험이 다시 떠오를 뿐인 것을 나의 실체라거나 진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이 제7 식인 말나식이다. 따라서 말나식이 아뢰야식으로서 저장된 경험을 끌어내서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의식은 착각이다. 이것은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일 뿐이다.
자아에 집착한 데서 발생하는 이 착각을 ‘집착하는 마음이 낳은 오인’, 즉 ‘집심(執心)의 비량’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특별히 집착하는 마음이 발동하지 않는데도 발생하는 착각으로서 ‘비집심(非執心)이 비량’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착각은 오직 제6 식인 의식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예를 들면 청색을 녹색으로 보거나 우연히 지나치는 어떤 사람을 친구로 보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태는 어떤 대상에 대해 마음을 집중해서 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에 대해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상 자체에 정신을 집중하고 분석하여 언어로써 파악된 진상은 항상 잠정적인 것으로 그칠 뿐, 결코 본래의 진실일 수가 없다.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경험하는 갈등은 대개가 서로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데서 발생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것은 나의 진심이 아니라고 하소연하지만, 내가 진심이라고 계속 토로하는 것도 역시 나의 진실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내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우리는 대체로 나의 진실을 알리는 데만 열을 올리면서 상대방이 아는 것은 오해라고 항변할 뿐,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이해도 오해일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태는 우리의 지식이 공상(共相)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공상에 의해 어떠한 사태나 사물을 인식하는 데서 기인한다. 여기서 공상이란 언어 또는 개념에 의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공상은 상식과 같은 것이다. 특수한 지식도 널리 알려져서 일반화 또는 통속화하면 상식이 된다. 그러나 상식이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데 편리한 공통분모로서의 개념 즉 언어일 뿐이며, 그 대상 자체의 진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대상 자체의 진상은 자상(自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자상은 말로써 표현될 때는 공상에 의해서만 인식되어 버리므로, 있는 그대로의 상태 또는 우리가 경험한 그대로의 상태를 결코 말로써 드러낼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70대의 나이에 10대의 소녀와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과연 그 남녀의 진심을 알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진심을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그들만의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그들만의’라는 말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두 사람만의 진실 즉 자상을 가리키고, ‘사랑’이라는 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공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상 즉 그들만의‘의 내용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사랑의 진실이란 괴테의 욕정이기 쉽다. 괴테는 당연히 이것을 곡해라고 주장하면서 그 사랑의 진실을 애정이라고 표현할지 모른다. 다시 듣는 이들은 그 애정의 진실을 이번에는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정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해 괴테는 다시 우정이라고 표현할지 모른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괴테의 우정을 변태라고 단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사자인 괴테가 인정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오인이며, 이 같은 오인은 우리의 마음 작용 중 추리를 담당하는 의식이 관여함으로써 발생한다.
이 사실은 결국 언어나 개념으로서 아는 것은 결코 진실일 수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의식이라는 마음 작용의 실태를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우리가 진상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아직도 그 이면의 진실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상은 언어나 개념으로써 알려지는 순간에 공상이 되어 버린다.
이 인식이 과정을 염두에 두고서 계속 자상을 추구해 갈 때, 언젠가는 말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그 진실을 직관하게 된다.
다만 불교에서는 그 최종의 진실을 말로써 알리기 위해 공(空) 또는 무아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공이나 무아는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공상이다.
(상)
『잡아함경』에서는 공 또는 무아라는 궁극적 공상의 취지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암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단단한 알맹이가 들어 있는 목재를 구하기 위해 도끼를 들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파리와 줄기가 크고 굵고 곧은 파초 나무를 발견했다. 그는 곧 그 뿌리와 잎을 잘라 내고 줄기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껍질을 끝까지 벗겨 보았지만 거기에는 단단한 알맹이가 전혀 없었다. 위의 비유에서 굴고 곧은 파초 나무가 공상이라면, 알맹이는 자상이다. 굵은 줄기의 알맹이는 단단할 것이라고 아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막상 단단한 알맹이를 찾아 벗기기 시작하면, 알맹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계속 벗겨진다. 결국 상식(공상)에 의해서는 진상(자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물질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그와 같다.
봄 안개로 눈앞에 막연하게 어른거리는 어떤 것을 좀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은 아지랑이가 아니라 어떤 사무이었다. 이 사물을 좀더 자세히 보니, 그것은 독특한 모양과 색깔을 지닌 벚꽃나무였다. 그 나무의 어디에서 벚꽃이 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그 나무를 분석해 보니, 그것은 지· 수 ·화 ·풍과 같은 요소들의 집합으로 판명되었다. 다시 그 나무의 한 조각을 정밀한 현미경으로 분석해 보니, 그것은 원자와 같은 소립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물의 진상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물질이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더 정밀한 분석에 의하면 그 상식은 부정되고, 원자들은 더 미세한 극 미들과 활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라고 한다.
과학자들에게는 이 새로운 진상도 상식에 속하고, 다시 상식을 넘어선 미지의 진상이 탐구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이상과 같이 형성되어 온 우리의 지식에서 먼저 본 것은 공상이고 나중에 파악된 것은 자상이다.
그러나 파악된 자상은 곧 공상이 되어 우리의 보편적 지식을 형성하게 되고, 그 진상을 더 탐구해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따라서 대상의 최종적인 진상, 다시 말해서 궁극의 자상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원자, 4대, 색소, 물질, 5 온, 벚꽃 등의 어떠한 말로 표현하더라도 그것들은 상식으로서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같은 공상들 중에서도 궁극의 자상을 직접 지목한 궁극의 공상이 곧 불교에서 말하는 공, 무아. 진여(眞如) 등이다.
우리의 인식을 이상과 같이 공상과 자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서 우리를 깨우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다. 감각 기관이 경험한 것을 자료로 삼아 언어나 개념으로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사유는 모두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대상의 진상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공상과 자상의 관계를 이해하고서 대상을 바르게 관찰해 간다면,
대상의 진상에 점점 더 깊이 접근해 갈 수 있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최종의 진상인 궁극의 자상은 개념적 사유, 즉 말에 의해서는 아무래도 통용되지 않는 영역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 최종의 진상을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공 또는 무아라고 말할 수 있다. 공상과 자상이라는 인식을 담당하는 주체가 제6 식인 의식이라는 사실은 8식 중에서 의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지시한다. 의식은 일반적으로 비량(非量)이라는 오인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기능하지만,
또 한편으로 진상도 이 의식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8식 중의 5식의 본래 기능은 감각이다.
다시 말해서 눈이나 귀 등의 감관에 의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접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5식이 직접 지각하는 대상의 모습이 결코 존재의 진상일 수 없는 이유는 5식의 대상은 의식의 조작을 거쳐서야 비로소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적인 대상에 의식의 기능을 바르게 적용하여, 지금 인식된 그 대상의 모습이 진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깊이 관찰해 나감으로써, 결국에는 최종의 진상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그 대상은 고정관념의 분별이 해소된 상태, 즉 비교에 의한 차별이 없는 원래의 상태로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진상에 도달하는 데는 5식이 애초에 감각으로서 인식한 모습이 단서가 된다. 어쨌든 진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추진력이 되는 것은 의식이며, 그것도 ‘바르게 작용하는’ 의식이다.
바르게 작용하는 의식이란 번뇌와 같은 잠재 인상에 의해 물들지 않는 의식이며, 아울러 바른 이치에 따라 사유하는 의식이다. 이처럼 의식이 바른 이치에 따라 대상을 사유하도록 하기 위해, 유식학에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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