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이 실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이는 분별 망상으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인연 따라 잠깐 머물러 있다가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딱 바로 잡아서 어떠한 환경이나 문제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바른 마음을 낼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 걱정 근심이 없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자기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 편안하거나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집, 높은 벼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는 될지언정 행복의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불법은 안에서 찾아야지 결코 밖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은 자기가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늘 바른 생각으로 수행하다 보면 모든 의심이 걷힙니다. 의심은 어둠입니다. 일체 의심이 없어지면 마음이 밝아지고, 마음이 밝아지면 근심걱정이 걷힙니다. 그러면 즐거움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팔십 평생을 사시다 열반에 드셨는데, 이는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없애버리고 언제나 밝고 깨끗한 위치에 머무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열반에는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고 상락아정常樂我淨만 있습니다. 열반이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하는데, 업장 소멸이 곧 열반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망상 잡념을 소멸하고, 업장을 소멸한 것입니다. 우리 사는 것을 보면 다람쥐 챗바퀴 도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생 칠팔십 년을 함축시켜 보면 ‘잘살다 죽는다’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는 숨을 쉬고 안 쉬는 것에 있습니다. 바꾸지 않고 이렇게 살면 내생은 금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사고를 바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죽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니 금생이나 내생이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을 바꿀 때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좋든 나쁘든, 금생에 이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내생에도 이대로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 범부 중생의 사고를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은 따로 놓아두고 배우는 불법은 천 년을 배워도 득 될 것이 없습니다. ‘삼일만 제대로 잘 닦으면 천 년을 두고두고 써도 다함이 없는 보배를 얻을 수 있고,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살면 백 년 동안 죽어라고 끌어모은 부귀영화 재산이 하루아침에 티끌같이 없어진다’는 말아 있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처음 발심한 공덕은 허공과 같이 크다고 했습니다. 일채 모든 땅이나 허공을 비유한다 해도 발심해서 도를 닦으려고 하는 그 지혜와 복에는 견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듯, 우리 부처님께서는 찰라에도 모든 중생들 앞에 당신 몸을 나투어 설법을 하고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해와 달은 저마다 하나인데 강물이 있는 곳마다 비출 수 있듯 부처님은 한분인데 모든 중생 앞에 나타나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깨우쳐 줄 수 있는 능력적 신통과 지혜의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먼 이가 태양이 떠 있어도 그것을 못 보듯 중생도 업장이 두터워 부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만 바르고 청정하면 언제든지 부처님과 더불어 계합할 수 있습니다. 이심전심이 되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말하는 이심전심과 똑같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도 늘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에서 부처님이 떠나지 않는 가운데 염불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부처님과 해후할 수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해와 달이 비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깨진 그릇엔 물이 없으므로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범부는 깨진 그릇과 같아 마음에 지혜의 물이 담겨 있지 않아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살계 곧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은 마치 그릇을 깨끗이 보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 염불 참선하는 것은 그릇에 물을 하나 가득 담아두는 것과 똑같습니다. 계기가 반듯하고 정수가 도도하면 혜월은 자연히 비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저마다의 그릇이 깨끗하면 반드시 마음이 담깁니다.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몸을 잘 지켜 나가면 깨끗한 마음이 딱 담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물과 같아 몸을 잘 지켜 나가면 마음의 물이 담기고, 그러면 지혜의 달이 환히 나타납니다.
이 세 가지는 동시입니다. 보리심을 발한 공덕이 크므로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디른 사람의 마음도 깨끗이 해줄 수 있습니다. 마치 여름에 마시는 청량제와 같습니다. 여러분도 참선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면 마음이 시원한 것이 마치 청량제를 마신 것처럼 느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때는 즐거움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어찌하면 잘 되는가 하고 스스로 물을 때가 있는데, 마음이 시원하고 즐거움이 올라오면 기도가 잘되는 겁니다. 깨친다는 것은 뭐가 툭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없습니다.
마음이 시원하게 됩니다. 시원하면 즐거움이 용솟음쳐요. 그럴 때 ‘아하 이게 깨닫는 것이구나’ 하면 됩니다. 즐거움을 밖에 나가 찾으려고 하면 천 년이 아니라 만년을 찾아도 괴로움만 올 뿐 즐거움은 오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은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범부로 시작해 성불하실 때까지 엄청난 세월을 거쳐오면서 오직 옳고 바른 것만 지어 왔습니다. 옳고 바르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의지가 강하고 생각이 발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만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타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한 업, 나쁜 업만 지었기에 매사 밝은 게 없고 구부러져 있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심을 하면 큰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빗방울이 강이나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이름도 없어지는 동시에 강물이 되고 바다가되듯, 중생이 불법을 닦으면 순간에 중생이라는 이름도 떨어져 버리고 불법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불법의 모든 맛을 동시에 맛볼 수 있습니다. 백천 가지 모든 공덕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심하지 못했지만, 부처님은 태자라는 신분의 범부로 발심함으로써 백천 가지 공덕과 지혜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산다 해도 이대로는 지혜도 없고 아무런 공덕도 없습니다. 다만 범부로서 늙어 죽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불법에 귀의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발심을 하면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염려하고 보호해 주시는 공덕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보면 물에 떠내려가는 재난 속에 있어도 구제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은 늘 중생을 염려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극 정성으로 부처님을 수지독송하면 그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심을 하면 보리를 얻을 수 있고, 보리를 얻으면 반드시 묘법을 깨달을 수 있고, 우리 같은 범부도 스스로 부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다 성취할 수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게 됩니다. 나는 중생이다, 범부다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반드시 부처님같이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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