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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업생(業生)에서 벗어나 원생(願生)을 살라

 

업생(業生)에서 벗어나 원생(願生)을 살라

우리가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게 되면 생사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중생은 업생(業生), 업대로 삶을 살게 되지만, 참선 잘한 도인은 원생(願生), 원력을 세운 대로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겉보기에는 우리가 똑같이 살아가는 인생이라 하지만 차별이 생깁니다. 섭생은 업에 끄달려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저금통장에 있는 돈 까먹듯이, 과거에 지은 대로 금생에 받아서, 또 금생에 지은 대로 내생에, 흘러가는 것이 바로 업생, 업에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한 분들은 업성에서 벗어나 원생을 살게 됩니다.
원생은 서원, 원하는 바에 따라서 태어나고 서원을 세운 대로 살아갑니다. 큰스님들 중에는 돌아가실 때 ‘내가 다음 생에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들에게, 불법을 전파하리라’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하신 분도 계십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 존자 같은 분은 ‘내가 다시 태어나도 역시 이 땅에서, 민중에게 불법을 전파하리라’하는 원을 세우고, 살고 죽기를 자유자재로 한다는 겁니다. 큰스님들뿐 아니라 거사님이나 보살님들 중에도 살고 죽기를 자재(自在)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중국에 방거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방거사가 자기 딸에게 “얘야, 해가 중천에 뜨면 나한테 일러 주거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가려고 했더니 딸이 들어와서는 “오늘 일식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깐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딸이 선 채로 세상을 먼저 떠난 것이지요. 하는 수 없이 딸의 장례를 치러주고 며칠 있다가, 자기는 그 고을 군수의 무릎을 벤 채로 그대로 잠들 듯이 생을 바꾸었습니다. 생사에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보통사람들도 수행을 하면 원생을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근래에 부산의 어떤 불자님께서 미리 자기가 갈 때를 알고 “내가 먼저 갈 테니 잘 계시다 오십시오”하고는 좌선을 한 채로 그대로 가시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생전에 그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꾸준히 하셨다고 합니다.

염불 하나만 꾸준히 하거나, 혹은 사경 하나만 꾸준히 하더라도 이런 경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최후의 가르침도 불방일(不放逸), ‘방일하지 말라’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스님은 참선할 때 하도 졸음이 오니까 턱 밑에 송곳을 고여 놓았다고 합니다.
졸면 고개가 끄덕할 때 바로 송곳에 턱이 찔리게 해 놓고 참선하신 분이 실제로 계십니다. 졸았다가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낮에 참선하는 것은 덜하지만 철야정진을 한다든가 용맹정진을 한다든가 하면 상당히 졸음이 와서 못 견딜 정도입니다.

선방에 살 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방에서는 꼭 철마다 일주일씩 용맹정진을 합니다. 저도 동참해서 하안거, 동안거를 지나는데 처음에 2~3일 정도는 평상시에 잠들던 심야시간 때가 되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걸 억지로 참아가면서 화두 참구에 신경을 씁니다. 다음에는 새벽 1시에서 3시 정도까지는 허리가 구부러지면서 졸음이 엄습하여 허리를 곧추 세우려고 애씁니다.
그래도 문득 조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데 3~4일 정도 되니까 서서히 망상도 덜해지고 졸음도 오히려 줄어듭니다. 마음도 몸도 개운해집니다. 수행이 잘되니까 시간도 잘 갑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잠자지 않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일주일 더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까 다 하게 됩니다.
용맹정진하기 전에는 ‘하룻밤만 철야정진해도 힘든데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하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처음에는 힘들지만 고비가 넘어가니까 점차 수월해지게 됩니다. 어떤 스님은 매일 해질 때가 되면 다리를 뻗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울었답니다. ‘오늘도 내가 본마음 참 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하루해가 지나가는구나’라고 애달파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사 일대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삶과 죽음의 큰 문제를 해결해야 다리를 뻗고 푹 잘 수 있습니다. 중생들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취해서 살다가 꿈속에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중생들의 인생을 돌아보면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술 먹고 자기 마음의 위안을 삼다보면 매일 꿈속에서 꿈꾸듯이 살다가 가버린다고 해서 취생몽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술을 안 먹고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참선곡(參禪曲)’에 있습니다. ‘ 혼혼 불각(昏昏不覺)’이란 혼침하고 혼침 해서 깨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꿈을 꾸면서 머나먼 나그네 길을 가고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고 나그네가 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참선곡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경허 스님께서는 참선곡에서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꿈을 꾸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고 꿈을 깨려고 노력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좋은 꿈을 꾸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다 한 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몸뚱이, 물질세계를 전혀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관리자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연(緣) 따라왔다가 간다’는 생각을 항상 유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에 안달복달 삽니다. 당장 내일 모래 저 세상에 갈 수도 있는데 그걸 모르고 오늘 아침까지 조바심을 냅니다. 지금 가진 재산으로도 충분히 한 생을 살다 갈 수 있는데 더 못 모아서 안달합니다. 자기 자신의 본체, 본마음, 참 나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고 밖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때문에 그렇듯 물질에 연연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밖에서 찾는 한 그 사람은 언제까지나 공허한 나그네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 그중에서도 본마음, 참 나를 찾아야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수처작주(隋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이라,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니 서는 곳마다 다 진리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가운데,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세계가 마음의 표현입니다. 탐심은 탐내는 마음이고, 진심은 성내는 것입니다. 참선곡의 ‘쓸데없는 탐심 진심’이라는 구절을 들면, “쓸데없는 탐심 진심이 있느냐?”라고 물어볼 수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꼭 필요한 욕심이나 성냄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실 때 수행자에게는 “일체의 탐, 진, 치를 다 놓고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가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재가신자들에게는 “과분한 욕심을 내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욕심도 자기 분수에 맞게, 자기 처지에 맞게 적절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큰 허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분수 이상으로 또는 정해진, 공평한, 올바른 재물 내 것이 아닌 것을 과도하게 욕심을 내어서 취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