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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라의 평상심 !!!

 

 


망상은 번뇌의 그림자일 뿐, 마음은 얼마나 맑고 고요한 것일까, 우리도 마음이란 게 있지만 깨달으신 분의 때 묻지 않은 마음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으십니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귑니다. 망울 튼 버들가지는 싱그럽고 시냇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갑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들은 봄나물을 뜯고 있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런 광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이 있으면 물을 보고 꽃이 있으면 꽃을 본다는 것. 이게 바로 空寂靈知입니다. 이 자리가 本心의 자리인 참 마음인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산에 올라가서 연 초록색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듣고, 흘러가는 물을 보고, 티 없는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 편하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 일 않고 빈둥대는 남편 바라보면 마음이 확 상하면서 화가 나지요 왜 그럴까요?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한데 연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쁜 것, 바로 분별 때문입니다.

(여여하게 본 것이 아닙니다.)
분별과 시비심을 넘어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기신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차별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여여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 하나만 되어도 보통 사람하고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여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선의 기본이라 하지만, 이것을 학문으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가는 바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산에서 시냇물 흐르는 좋은 소리를 듣고 집에 오자마자 남편 본 순간 화가 난다면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분이십니다. 여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화가 났다거나 짜증 날 때, 상대방 허물을 보기 전에 내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 발이라도 부처님 마음에 다가간 것입니다.

本心은 空寂하며 일체 상이 끊어지고 靈靈해서 昏昧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심은 모든 생각의 근원 일체 선악의 萬法을 갖추고 있고, 생과 사의 시발점 한 마음에서 모든 생각이 일어나고 산하대지 일월성신이 생겨납니다. 한 마음에서 일어난 선악을 관찰해 보면 전부 자신의 마음 가운데 일어난 생각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즉, ‘생각’이라는 것은 맑고 깨끗한 마음 바탕에서 일어난 그림자입니다.
공적영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행방법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두에 제가 한 말, 여여한 마음을 가지라는 한 마디에 정말 여여한 마음을 갖고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수행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근기가 아주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산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한 즉시 그 마음이 변하니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착각에 빠지지 말라)
국가별로 그 수행법이 다르지만 선의 궁극목적은 적정열반입니다. 적정열반은 곧 부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시비와 분별을 초월한 맑고 묘한 붓다의 세계를 말합니다.
오늘도 수좌스님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좌선에 듭니다. 일반인이 보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게 무슨 공부냐고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들뜨면 한두 시간도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안정돼 있지 않으면 동분서주합니다. 선가에서 도피안, 열반묘심에 접근하기 위해 수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심)
간화선에서는 이 의심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밖에 못 깨닫습니다
육신이 거짓 나라면, 참 나는 누구인가? 분명히 말하고 듣고, 슬프고 괴로운 줄 아는 이것은 거짓 나인가 참 나인가 육신의 송장을 끌고 한평생을 살아가는 나는 무엇인가? 이런 의심이 들어야 화두가 들립니다

(한 마음이 천지 움직여)
의심이 든다고 해서 알음알이로 풀려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선어록 좀 보았다 해서 아는 체하면 큰일 납니다.
화두 깨치기는커녕 자신의 마음자락 한 조각도 잡을 수 없습니다. 알음알이 잣대를 화두에 대는 순간,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착각에 빠진 도인을 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참선 중에는 앉아 있음도 잊어야 하고 언제 깨달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도 수행인에게는 큰 걸림돌이고 무엇보다 여러 공안에 천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이 뭐꼬, 내일은 판치생모, 모레는 무(無) 자 화두 들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하나의 화두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화두를 들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법향을 맡으실 것입니다.
그 법향은 교리를 통해 느껴본 것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선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하듯 정진해 보시면, 부처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자라면 자비를 항상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용해시킬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비심은 깊어집니다. 한 사람의 그러한 마음이 천지를 움직일 것입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