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는 일은 물론 옳고 바르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시주를 하든 보시를 하든 공양을 하든 봉사를 하든 어떤 일을 하든지 조건 없이 해야 하고, 주어도 주었다는 생각 없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 없이 삼륜(三輪)이 청정한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할 때 첫 번째의 근본은 발심해서 하는 것, 두 번째는 상대가 원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세 번째는 가르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례로 불교대학을 운영하는 것은 아직 낯설고 인연 맺지 못한 불자들을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부처님 품 안에 들어오게 하고, 궁극에는 따뜻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분들이 모범을 보이고 솔선해야 불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환한 미소와 신심 깊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도량을 아픔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이 왜 지장보살입니까? 춥고 배고프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옷까지 다 벗어주고 빈 몸으로 땅을 파고 자신의 몸을 감췄다해서지장보살입니다. 왜 관세음보살입니까? 세상의 싫은 소리나 좋은 소리나 기쁜 소리나 슬픈 소리나 모두 다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수천안으로 다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그렇게 동참하고 실천하고 백짓장을 맞들 듯이 함께 이 길을 걸어가야 하며 그리하여 밝은 눈을 지녀 비춰보지 못할 것이 없고, 밝은 귀로 듣지 못할 것이 없는데 굳이 무엇 때문에 자기의 이목만을 고집해서 미혹[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을 자초하겠습니까?
대만에 가면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받는 청엄(淸嚴)스님과 자항(慈航) 스님이라는 대조적인 두 스님이 계십니다.
정엄 스님이 계셨던 절은 강변 가에 절이 위치해 있었는데 비 오는 날엔 비가 새는 등 퇴락한 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의 한 불자가 서울 구룡사를 참배한 뒤 신심을 내서 옥(玉) 부처님 한 분을 구룡사로 모셔줬습니다.
이후 그 부처님을 모신 불단 앞에 불전함을 놓고 거기에 모인 불전을 알뜰히 모아 청엄 육신보살의 절에 성지순례를 가면서 보시를 했습니다. 그것이 종자가 되어 이제는 큰 도량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계신 육신보살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그분은 열반하시기 1년 전에 당신의 떠남을 예언하시고 스스로 옹장(甕葬)을 하기 위해 옹기점에 가서 당신이 묻힐 관을 제작해 달라며 돈을 주고 돌아가셨습니다. 임종하시기 전에 “내가 떠나면 중국의 전통양식인 농장을 해달라. 그리고 6년 후에 옹기를 열어 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좌탈입망하였습니다. 유언대로 6년 만에 옹기를 열어보니 입고 있던 가사장삼이 곰팡이 하나 피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그 가사장삼이 지금 그 절에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생전에 염불선을 주로 하셨는데 신도들이 갖다 주는재물도 거절하고 최소한의 양식만으로 삶을 영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의 불사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도량의 모양새가 형편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의 백결 선생처럼 고결하게 살다 돌아가셨지만 절은 너무나 퇴락했습니다.
또 다른 스님인 자항 스님은 어찌나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했던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몸이 마른 분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어려운 절 살림에 신도들이 재물을 보시하면 그것을 쓰지 않고 손에 쥐고만 있었습니다. 하루는 도반스님이 그런 사실을 알고 스님이 법당으로 간 사이에 방을 뒤져 스님이 모아둔 돈을 모두 훔쳐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도반은 훔쳐간 재물을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면서, 자항 스님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내가 대신 전해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습니다.
한편 자항 스님은 그 도반을 원망하며 잡히기만을 기다라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불자들이 좋은 곳에 써라 하며 재물을 계속해서 보시한 것입니다. 1년도 되지 않아 자항 스님이 수십 년 모은 재물보다 더 많아졌고 거기에서 자항 스님은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 후로는 자기가 직접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게 됐습니다. 그래서 중극 근대불교에서는 자항 스님을 포대화상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속뜻은 한 스님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사례를 응용해서 우리살림에도 반영하자는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 무엇인가에 너무 크게 집착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스스로 ‘나’라고 집착해서 고집했던 ‘나’는 본래 나눠질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 한 것이기에 알지도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아트만(自我)에 집착하고 있거나 자아 상실돼 있거나 자아를 망각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나’에게 속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나’한테 기만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녕 돌아볼 일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이 어둡고 침참한 허공과 만나 부딪치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세상이 이뤄졌다”라는 바람기운 생기고 마찰력에 불기운 생기고, 불에 녹은 것이 물이 되고, 굳은 것은 흙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의 몸도 사대(四大)로 이뤄졌지만 우리 사는 세상도 사대,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넓히면 지수화풍식(地水火風識), 더 넓히면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으로 이뤄졌다. 그러니 이 사대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닌 것처럼 이(理) 속에 사(事)가 있고, 사(事) 속에 이(理)가 있는 것처럼 여러분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여러분이 있습니다. 외호대중이 있으니 수행정진에 도움이 되고, 바깥에 울타리가 있듯이 부모님이 계시니 가정이 평안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존재가 없다면 그 누군가는 반드시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흙은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물도 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으며 불은 바람과 공기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바람은 흙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그런 이치입니다. 결국 사대가 온전히 사대일 수 있는 것은 지수화풍이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어 제각각 평안하고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보면 우리가 왜 늙고 병들고 죽습니까? 세월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보시라는 덕이 아무리 많아도 원망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속의 탐진치 삼독을 놓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둬들여 쉬어야 합니다. 타던 불이 꺼져야 합니다. 그러나 복이 있으면 다릅니다. 상대가 마음을 움직입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평안하고 공유할 수 있는 얘기를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복이 부족할 줄 알고 복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생각 그리고 모두에게 이해되고 납득될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 적극 실천할 때 상대가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씨앗이 좋은 땅을 만나면 뿌리와 줄기가 무성하게 잘 자라지만 자갈밭에 심겨지면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나무 석거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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