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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삼재가 없어요

 

“놓고 가는 데는 이유 없이 무조건 이어야죠” - “내 할 일 다 하고 내 가정 지키고 부모도리 다하며 자식도리 다하는 게 곧 회향이고 불사입니다”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뀝니다. 물론 부처님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도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 중 세계의 사람이 사는 데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달력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살아가시면서 한번 더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을 스스로 개선시키도록 다짐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말씀드리기를 모든 것은 자기 주처에서 하는 것이니 바로 자기 주처 를 믿으라고, 주처라는 것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 자 부처도 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야 뭐라고 부르든 어떻겠습니까마는 굳이 ‘주인 공(主人空)’이라고 하는 것은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일 중에 모두가 찰나찰나 나투 면서 과거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남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즉 붙잡을 것이 없다. 그리고 각자 모두가 자기의 마음 안에 중심이 있어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 활하고 있습니다.

이 몸체가 수레라면 정신계의 주장자는 바로 심봉이겠지요. 심봉 이 꿰어져 있음으로 해서 그 심봉이 바퀴를 굴릴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심봉에서 힘 이 배출되기 때문에 바퀴가 이탈되지 않고 잘 굴러갈 수가 있는 겁니다. 육조 혜능스님도 “내가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 러분 모두에게는 다 불성이 있습니다. 불성인 통해서만이 우주 삼천 대천세계가 통신이 되고 또 이 세상의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다 가설이 돼 있거든요. 서로의 생명들이 모습과 말은 다를지라도 뜻은 같이 하고 있습니다. 차원에 따라 살 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어찌 생명과 마음이 다르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 마음공부 하는 분 에게는 일체 모든 것이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까닭에 굴왕신도 없고 삼재 도 없습니다. 악행이라는 말도 사실은 자기 마음에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삼재가 들었든 굴왕신이 내렸든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자기 주인공에 통신이 되면 모두 한마음으로 구성이 돼서 한 생각에 없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굴왕신도 없고 삼재도 없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 할 것 없이 모두들 자기를 빼놓고 타의에 기 도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 부처님, 잘되게 해주십시오.’ ‘주여, 잘되게 해 주소 서.’ 하고 타의에 놓고 빌기만 하니 그 차원에서 언제 벗어나겠습니까? 못났든 잘난 든 자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자기 마음이 아니던가요?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느니라.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둘이 아닌 줄을 알고, 찰나찰나 공해서 없어지는 줄 알아야 둘 아니게 여여하게 들이고 낼 수 있다. 이 공부가 얼마나 간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광대하고 무변해서 어디든 통신이 안 되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빛보다도 더 빠르죠. 새들이 지저귀는 것도 통신이 되고 꽃들이 말하는 것 도 통신이 되고 하다못해 길을 걷다가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듣지 못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시겠지만 들리지 않아도 뜻으로는 같이 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한답시고 바깥으로 하니까 통신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래서 근본 자리에다 모든 것을 다 일임하고 관한다면 저절로 통해서 일체 한마음으 로 통하게 됩니다. 내 안에다 맡긴다면 누구를 위해서라고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 도 저절로 통하게 돼 있죠. 이게 바로 공덕이며 공심입니다. 공생, 공심, 공용, 공 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간단하게 말하죠. 모든 것 을 이 주처에다가, 당신 주인공의 에다 일임해서 굴리라고 말입니다. 오는 것 을 대처해 막아나가는 것을 ‘굴린다’고 하며 오로지 들고나는 그 털구멍 한 군데서 만이 큰 회향을 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다 보면 견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결국엔 무학도에 도달해야만 열반계가 됩니다. 그것도 이름이지만 우리는 이름을 따라서 안에다 모든 걸 계합시키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놈이 이 육신을 움죽거리게 해서 보게 하고 듣게 하고 가고 오게 만드니까 그놈이 바로 자기 임이 분명하죠. 그러니까 자기를 이끌어가는 선장입니다. 왜냐하면 움죽거리지 않는 심봉이 그 힘을 배출해 주기 때문에 수레바퀴가 돌아가거든요. 자기 몸이 수레바 퀴라소 한다면 말입니다. 오죽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레바퀴 돌아가듯 한다 는 말을 했겠습니까?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하는데 거기 먼지가 앉을 사이가 어 딨으며, 변고가 붙을 사이가 어딨 으며, 삼재가 붙을 사이가 어딨 으며, 굴왕신이 붙 을 사이가 어딨 으며, 고(苦)가 붙을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발자취를 떼놓을 때 떼놓으면 한발 없어지고 떼놓으면 한발 없어지고 하는 이치와 같은데 뭐가 붙을 게 있습 네가? 그렇게 찰나찰나 연방 과거로 돌아가는데 팔자운명이 어디 있으며, 삼재액난이 어디 붙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붙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붙어지는 거지 실지로는 붙어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몸도 소중하 다 하는 뜻은 그 생명들의 의식들이 내 몸과 더불어 같이 한 개체로서 움죽거리고 보 고 듣고 하기 때문에 이 몸이 없으면 공부 못하거든요. 내가 있어야 상대도 있고 세 상도 알고 또 부딪힘이 있어야 공부를 하죠. 하지만 보더라도 본 사이가 없고 들어 도 들은 사이가 없습니다. 차를 타도 반드시 내리게 되죠. 사람을 만나도 또 다른 사 람 만나죠. 이렇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수레바퀴 돌아가듯 한다고 하는 그예 요. 본래 그러한 것을, 그리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는 분들은 불교 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불교가 정말 어렵습니까?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이 불(佛)인 걸요. 그리고 우리가 살 아나 가면서 배우고 느끼고 연구하고 지혜가 넓어지고 창조를 해나가는 것이 교(敎)가 구요. 그러기에 불교라는 것은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언어가 아니란 겁니다. 주님을 찾든 주인공을 찾든 각자 자기 마음속에 중심이 있고 자기로 인해 세상이 벌어진 걸 안다면 모두가 하나로 들어가는 진리인데, 이름은 달라도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에는 사성제도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왜냐? ‘고집멸도(苦集滅 道)’ 하지만 고가 붙을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집착도 없죠. 집착이 없으면 멸할 것도 없어지고 그러면 도가 되는 거죠. 그렇게 간편한 걸 여러분이 기복으로 생각할 때 내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관세음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닥치는 대로 찾고 기 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나 하면 “자기 자신을 빼놓고, 즉 자 기 뿌리와 싹을 다 빼놓고 타의의 형상을 믿고 이름을 믿고, 자기까지도 자기의 고깃 덩어리를 믿는다면 그것은 도깨비 장난과 같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 자기 자 신부터 알아야 세상을 알고, 세상을 알아야 남을 리드할 수도 있고, 정신계에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고 물리가 터지게 할 수도 있죠. 그리고 영혼의 근본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갔다 나왔다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영혼 근본 자리가 바로 통신처예요. 그래서 어떤 것도 여기다 맡 기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마음과 자기 주인공의 마음과 일체제불의 마음이 통해서 그 마음자리에서 보살로 화해서 응해줍니다. 그걸 응신이라고 하죠. 컴퓨터 에 입력을 해놨으면 입력한 대로 꺼내 쓸 수 있도록 돼 있어요. 자기의 보디가드가 되는 참 보배가 항상 자신한테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죠. 저 나무들을 보세 요. 잎이나 가지나 모두 자기 뿌리를 의지하고 있잖아요. 뿌리를 잘라낸다면 그 싹 은 다 죽고 말아요. 자기 마음의 요체가 완벽해서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앉아도 좌선이요, 서 도 좌선이요, 잠을 자도 좌선이요, 일을 해도 좌선이 되는 겁니다. 몸뚱이를 틀고 앉았기만 해서 좌선이 아닙니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요지부동, 어디에도 굴하지 않게 되는 거죠.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 하더라도 여러분 대신 깨우쳐 주는 건 아닙니다. 여러 분이 자손을 낳아도 부모가 그 자손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 자손의 자신에 게 달려있다는 얘깁니다. 마음이 바깥으로 끄달리면 중생이고, 모든 걸 안으로 들이며 공부하는 분들은 그대로 부처입니다. 생각을 안 하면 부처고 생각을 하고 관했다 하면 법신이며 움죽거리 고 화하게 되면 보현신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간편하고 광대무변한 도리를 우리가 이 생활이 아니라면, 이 진리가 아니라면, 또 먼저 공부하고 간 선배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마는 그 듣고 아는 것도 올바로 알아야지 자기를 빼놓고 따로 세상이 없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으뜸입니다. 자기부터 있기 때 문에 세상도 있고 상대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좋은 일도 있는 것이지 자기가 없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존께서도 오직 일심으로 자기만을 믿고 공부하셔서 과거에 수없이 살아나온 자기를 찾으신 겁니다.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가 통신이 되고 상봉이 된 것이죠. 내가 산으로 공부하러 다닐 때 얘깁니다. 어느 날 밤 날은 춥고 어두워 서 어느 묘지 옆에서 자게 됐는데 안에서 하는 소리가 말입니다. ‘여기 묘지 두 개 가 있는데 하나는 아비의 무덤이고 하나는 아들의 무덤이니라. 그런데 아비가 자식 한 테로 가면 자식으로 하나가 되고 자식이 아비한테로 가면 아비로 하나가 되니 이 무 슨 변고냐?’ 하고 묻는 거예요.

하루 이틀이 지났는데 그것을 해결못하고는 꼼짝도 할 수 없었죠. 사흘째 되는 날 ‘아하, 그렇구나.’ 하고선 웃고 일어났어요. 이 마 음의 근본이라는 것은 체가 없어서 찰나찰나 하나가 돼 버려요. 둘이 아닌 까닭에 그 건 얼마든지 숫자가 백천만 개라 하더라도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그 이치로구 나.’ 하고 그때서야 일어났어요.

그건 자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 을 했다 하면 ‘자’로서의 ‘법신’이 되는 것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해서 즉 다시 말하면 화신이라고도 하지만 ‘보현신’이 되죠. 예를 들어 만약에 길을 가 다가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하고 넘어진 사람을 봤다고 칩시다. 그러면 도와줘야겠 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들면서 바로 내 손부터 가죠. 그래서 일으켜주는데 이게 바로 보현신이거든요. 남을 위하고 나를 위해서 더불어 같이 가니까 보현신이 되는 것이 죠. 그걸 보현행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볼 때 자기가 아무리 못 나고 형편없다 하더라도 형편없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지를 마세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올 때는 다 나올 권리가 있어서 나왔고, 나왔으니 또 살 권리가 있지 않겠 습니까. 그리고 이 도리를 알고 가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그래서 육조스님은 ‘내 불성이 있는지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여여한 줄 어 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은 물러서지 않는 패기와 신념을 가지고 꿋꿋하게 밀고 나가십시오. 또 우리가 바른 생 각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것도 자기의 그런 신념에 의해서 따르는 겁니다. 자기 가 못났다고 해서 ‘나는 부처가 될 수 없어.’ 이러는 사람은 정말 못난 사람이며 이 생사윤회 바퀴에 끄달려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당당하고 패기 있게 사 삽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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