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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안심임명!

 

양나라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절을 짓고 경을 편찬하고 스님들
을 공양한 것이 셀 수 없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이는 인간과 하늘의 작은 결과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
일 뿐이니,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하나 실체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참된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淨智妙圓), 본체가 스
스로 비고 고요하니(體自空寂), 이러한 공덕은 세간 법으로
는 구하지 못합니다.”

무제는 유루[有漏]의 공덕을 구하고 달마는 무루無漏의 지혜를 설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무제가 구하고 있는 공덕에 빠져 있다. 하루빨리 공덕주의 [功德主義]에 기초한 구복불교
를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공덕은 인천[人天]의 작은 과보에 만족하는 인연의 복이 아니라,
세간의 인과법을 초월하여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선[禪]은 인천교[人天敎]를 넘어선
대승[大乘]의 가르침이자 최상승[最上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세간에 있되 세간을 여의고, 유루의 공덕을 짓되 무루의 참공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유루의 공덕이란, 다름 아닌 모양(相)에 집착한 보시로서
내가 공덕을 지었다는 생각의 상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무루의 공덕이란!
보시를 행하되 보시했다는 상에 머물지 않아, 일체의 공덕상(相)을 여의어 베풀되 베푸는 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에 머묾이 없는 보시(無住相布施)가 최상의 보시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분별과 시비 속에서 깨어 있기!

[1] 삶은 흘러가고 이 흐름 속에 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의 깨어 있음이 지속되지 않는 순간도 있게 되는데, 이 순간에 잘못된 생각(분별)이 들어오면서 원만한 세계가 깨집니다. 그러나 매 순간 삶의 흐름은 항상 자신의 전 흐름을 드러내며 또한 관계 속의 변화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고 매 순간 다르기 때문에 늘 새롭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분별과 고정화가 계속되는 이유는, 후찰나의 심리작용이 전찰나의 심리작용(과거)을 닮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시점과 모양 등이 고정되고 분별되지만, 이것은 분별의 상속에 의한 허상일 뿐입니다. 한 생각의 일어남은 다만 현재의 상태이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분별을 파악하려는 것은 오류의 자기 상속입니다. 분별의 오류가 나타나는 시점이 곧 중생의 삶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순간의 분별이 전체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합니다. 분별에는 의(意)가 저절로 개재되어 나를 세우기 때문에 평등이 깨집니다. 나아가 자타분별 가운데 선악시비 등 가지가지 양상이 일어나는 삶을 전 6 식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진실된 삶의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이루는 것마다 허망할 뿐입니다. 분별하는 힘과 선악시비는 지속적으로 자기 힘을 상속시키는데, 이때 드러나지 않는 상속을 종자(種子)라고 부릅니다. 현행이 분별(分別)과 소분별(所分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종자도 역시 분별(分別)과 소분별(所分別)의 흐름입니다. 분별하는 힘과 분별되는 대상이 드러남(현행)과 드러나지 않음(종자)으로 상속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제8식이 이런 종자를 놓치지 않고 더불어 같이하면서 흘러가는 관계를 집수(執受)라고 부릅니다.
삶의 흐름은 매 순간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을 되풀이합니다.

[2] 곧 한 생각의 일어남 속에 전찰나의 모든 것이 드러남(현행)과 동시에 드러나지 않음(종자)을 생성하고 바로 소멸합니다. 드러남도 생성소멸하고 드러나지 않음도 생성소멸합니다. 생성소멸 속에서 인연의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삶일 뿐입니다. 중생에게 있어 생성소멸의 상속은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는 대상이 있다. 현행의 나타남과 종자의 드러나지 않음이 서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으로써 분별과 소분별을 훈습시킵니다. 드러나지 않음(종자)의 흐름도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로써 분별과 소분별을 상속합니다. 전찰나가 소멸하고 후찰나를 생성하면서 전후찰나에 분별(分別)과 소분별(所分別)의 관계를 상속하기 때문에, 분별과 소분별의 대립이 저절로 나타난 것이 중생의 현행입니다. 소멸은 앎(식)이 없어진 것이며, 생성, 즉 현행은 앎(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현행 때마다 중생은 주관(分別)과 객관(所分別)을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앎(식)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앎의 변화를 식의 전변(轉變)이라고 합니다.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식장에서 함께 전변 하는데, 인식주관만의 전변이 아니라 주객이 함께 전변 합니다. 앎은 분별과 소분별이 관계하면서 변화하는 하나의 장(場)으로서, 분별과 소분별이 앎 속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앎을 떠나서는 분별도 소분별도 없습니다〔由此彼皆無] 그러므로 분별과 소분별의 모든 것이 식(識) 일 수밖에 없으며〔故一切唯識] 식(識) 안에서의 분별과 소분별입니다.
총체적으로 '왜곡되어 나누어진 일체의 분별'을 제8식의 이름 중 하나인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고 합니다. 종자의 구성력이 분별과 소분별이었습니다. 현행은 소분별의 종자〔 法〕와 분별인 주관〔意〕의 관계 변화입니다.
즉 분별과 소분별의 종자를 닮아서 현행합니다

사량분별은 계속 허상 만들어 낼뿐…

[1] 여사인(呂舍人)에 대한 답서
사량분별은 계속 허상 만들어 낼뿐… “모든 부처와 조사는 단 한 법(法)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믿고 스스로 긍정하며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을 취한다면, 사람을 그르칠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언설상(言說相)을 떠나 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떠나 있으며 문자상(文字相)을 떠나 있습니다. 모든 상(相)의 떠남을 알 수 있는 자도 다만 여사인일뿐이며, 죽은 뒤에 단멸(斷滅)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자도 다만 여사인일 뿐이며, 곧바로 가리켜 보이기를 바라는 자도 다만 여사인일뿐이며, 매일 매 순간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사량 하거나 분별하거나 멍청함에 빠지거나 들떠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모두 여사인일뿐입니다. 다만 이 여사인만이 여러 가지 기이하고 특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모든 부처 모든 조사와 더불어 적멸의 대해탈광명(大解脫光明) 바닷속에서 함께 헤엄치며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선(禪) 공부는 자기의 타고난 본성(本性)을 확인하고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본성은 얻은 적도 없고 잃은 적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잃을 수도 없다. 주거나 받을 수도 없으며, 더하거나 덜할 수도 없다. 본성은 모양도 크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성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눈으로 모양과 색을 볼 때 모양과 색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냄새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입으로 음식 맛을 볼 때 그 맛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손으로 물건을 만질 때 촉감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고, 의식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무엇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본성만 남는다.

[2]온갖 동작하는 곳과 사려 분별하는 곳과 느끼는 곳과 의욕하는 곳에서 상(相)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이러한 모든 행위동작과 사려분별과 느낌과 의욕이 모조리 본성이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본성이니 선이니 공부니 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모두 본성이고 달리 또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읽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궁리하는 것이 바로 본성이고 따로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 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가 본성이며 손 끝에 느껴지는 신문지의 감각이 본성일 뿐이고 또 다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본성은 매 순간 매 순간의 모든 일에서 조금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이면서도 도가 아니고, 선을 선이라고 말하면 선이면서도 선이 아니고, 본성을 본성이라고 말하면 본성이면서도 본성이 아니다. 그 까닭은 진실로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고 선 아님이 없고 본성 아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스스로 사량 분별을 통하여 허황된 상(相)을 만들고는 그 허상에 애착하고 가로막혀서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사량 분별도 본성이고 사량 분별로 만들어내는 허상조차도 모두 본성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니다. 어떤 것도 본성을 벗어나 따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왜 본성을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을 따라다니며 번뇌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가?
그 이유를 묻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또 하나의 허상을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허상을 극복하고 지금 이대로의 본성을 진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허상은 사량 분별에서 생기므로 사량 분별을 통해서는 계속 허상을 만들어 낼 뿐, 허상을 극복할 수가 없다. 허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쉬어버리는 관문을 반드시 한 번 통과해야 한다. 이제까지 의지하고 있던 허상과 사량 분별을 완전히 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