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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본래 무일물

 

 

부처님 법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불진언 언불진의(書不盡言 言不盡意)’라. ‘글로써 말을 다 할 수 없고, 말로써 뜻을 다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 법이 그렇습니다. 어찌 글로, 말로 다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법은 ‘불가시 불가설 비사량분별지소능해 (不可示 不可說 非思量分別之所能解)’라 했다. 보여줄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니 사량분별로 헤아려 풀 바가 아니라는 것 <법화경>에는 그 깊고 깊은 불법의 이치가 다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을 보면 부처님 법이 보인다. 부처님 법이 들립니다. 방편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이치를 알게 해 준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에 산하가 다 포함돼 있듯이 <법화경>에는 일체 경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

<법화경> 그러니 경 제목만 계속 염송해도 좋은 것이다. 사경이나 독송하는 것도 좋지만 수행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바로 ‘수지(受持)’다. <법화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 어느 백만장자에게 철부지 자식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불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놀고 있었다. 집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쳐도 노는데 정신이 팔려 나오지 않아 그 백만장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보여주며 아이들을 불러냈다. ‘비유품’에 나오는 중생계를 ‘불타는 집(火宅)’에 비유한 얘기다. 여기에서 불타는 집은 삼계(三界)를 말하는 것이고, 장난감은 방편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난감이라는 방편보다는 화재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게 해주는 것이 더 좋을 것, 불법의 궁극은 방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것이가. 주위를 잘 둘러보라  좌선을 하느니 철야정진을 하느니 하면서 수행을 한답시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는 것이 꽤 많아 보인다. 하지만 껍데기뿐입니다. 방편만 알고 있을 뿐이지 부처가 되는 진짜 길은 전혀 모른다.  

부처님 가르침은 부처가 되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방편자체에만 집착하다보면 그 길을 잃게 된다. 날카로운 칼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휜다. 극약도 마찬가지로 약이 되기도 하고 독약이 되기도 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그 머리를 좋은데 써야지 나쁜데 쓰면 악한이 된다. 방편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찾고 안 찾고는 자기가 판단할 문제 다만 불교는 그 판단을 도울 뿐, 그래서 깨달음의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불법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배가 고프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더 좋은 일 불교는 바로 배고프지 않도록 해주는 진리가 담겨 있다. 그래서 보시 중에서도 법보시를 제일로 치지 않습니까. 이기심을 버리고 중생을 구제하려면 법을 알고 법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네 사는 세상을 보면 정(正)과 사(邪)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합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 필요합니다. 파사현정을 하려면 취사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계속해서 낡은 것을 벗고 새것을 얻게 됩니다. 이때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열등한 것을 버리고 수승한 것을 취하는 것, 나쁜 것을 버리고 바른 것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열등하고 나쁜 것을 버린다는 것에는 참회의 의미도 포함돼 있습니다. 잘못을 알지 못하는데 올바른 취사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관보현경>에 ‘일체업장해 개종망상생 야욕참회자 단좌염실상 중죄여상로 혜일능소제 (一切業障海 皆從妄想生 若欲懺悔者 端坐念實相 衆罪如霜露 慧日能消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다 같은 일체 업의 장애는 모두 망상에서 일어난다. 만약 참회하고자 하는 자는 단정히 앉아 실상을 염하라. 모든 죄업은 마치 서리와 이슬과 같아서 지혜의 해가 능히 없앤다’는 뜻입니다. 참회는 이기심을 버리는데 가장 필요한 요건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망상을 일으키고 그 망상에 매달리다가 한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자기 자신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을 살려면 자기 마음의 모든 죄를 씻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있을 때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이지요.

<법화경> ‘여래수량품’ 에 있는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한 의사가 외국에 나가 있을 때 두 아들이 약을 잘못 먹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의사가 돌아오자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구제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의사는 약을 만들어서 두 아들에게 먹이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중독이 덜 돼 상태가 조금 나은 아들은 아버지가 준 약을 먹었는데, 상태가 심한 아들은 약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준 약을 먹고 병이 나아서야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중독이 덜 된 아들은 부처님 제자고, 중독이 많이 된 아들은 중생을 말합니다. 중독이 심하다는 것은 마음의 때가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약을 먹어 낫고 보면 부처님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마음의 때를 벗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모래도 자갈도 바위도 물에 넣으면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배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지요. 불자들이라면 마땅히 중생을 구제하는 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도 이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소선(小善)이 대악(大惡)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종교인이 자기 종교만을 위한답시고 불교를 비방했다고 칩시다. 자기 신념 측면에서 보면 충실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겠지만, 자기 종교를 위해 다른 종교를 비방했으니 결국엔 소선이 대악이 됩니다. 무딘 칼은 잘못 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날카로운 칼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小善)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배(大善)가 되어야 합니다. 법회 때 어떤 학생이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다 지키면 선이고 다 범하면 악인 것입니다. 세간법에서는 개미를 죽이고 남을 비방하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 없을지 모르지만 출세간법에서는 큰 죄입니다. 작은 마음의 때라도 벗겨내야만 진정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누가 “당신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금주머니라도 금이 들어있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이고,  평범한 주머니라도 금이 들어있으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금을 채워보세요. 그러면 그 마음은 금주머니가 됩니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의지해야 할 것과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의사불의(四依四不依)’ 이니,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 위지불의식(依智不依識)의 료의경불의 불요의 경(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을 말합니다. 그 뜻은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되 말에 의존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되 분별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진실된 경전에 의지하되 방편경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허공에 핀 꽃과 같습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넘쳐나는 것이 있고 부족한 것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자란 것도 과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평등한 세상에서 중생은 자비심을 잃고 번뇌 속에서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전쟁, 싸움, 비방, 폭력은 재앙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이제 우리 모두는 자비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을 찾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는 용서와 화합이 있습니다. 굳이 <법화경>이 아니라도 좋으니 자기가 믿고 공부할 수 있는 소의경전을 가져보세요. 그리고 올해는 소의경전을 완벽하게 공부하겠다는 결심으로 정진하세요. 부처님 마음을 꺼내 쓰는 그런 해가 되어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도록 모두가 노력하기 바랍니다.

 

세상만사 마음쓰기 달렸다

작심하는 순간마다 길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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