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반반쯤 있는 세계, 기쁨도 반쯤 슬픔도 반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선악도 반반쯤 뒤엉켜 있다고 해서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영 못 살 세상도 아니고 영 극락도 아니라서, 반쯤은 살 만하고 반쯤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봉 스님은 “참을 인忍 자 세 개를 항상 이마에 붙이고 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살면서 제일 참기 힘든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나쁜 것이 오면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지나가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마음가짐으로 참을 수가 있는데, 좋은 것은 참기가 힘들어요. 음식도 맛있다고 많이 먹으면 문제가 생겨서, 그것 말고도 좋은 것이야 참 많지요. 좋은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나쁜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이치가 어디든지 끼리끼리 모이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습관이 되고 업이 되어 무르익게 되는 것, 마음 가운데는 의식, 무의식,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창고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했던 것들이 창고 속에 차곡차곡 쌓여, 사람이 죽으면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무의식도 못 가져갑니다.
가져가는 것은 아뢰야식입니다. 사람마다 창고를 하나씩 들고 가는 겁니다. 창고 안의 내용이 좋으면 좋은 세상에 가서 납니다. 나쁜 창고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창고대로 가서 사람으로 올 수 없습니다. 평소 해놓은 작은 습관들이 모여서 업이 되고 다음 생에 고칠 수 없는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작은 물방울이라고 해서 바위를 뚫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현재의 나입니다.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 여러분의 현재는 바로 미래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그 일을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은 다른 사람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자기 운명은 자기 것이고 그것은 작은 습관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큰 강물이 시작하는 발원지는 아주 조그만 샘물입니다. 그 샘물이 흘러서 큰 강물을 이루게 되듯이 습관 하나하나가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알고, 원력을 가지고 보람찬 하루하루를 사시길 당부합니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억지로 잡아 두어 내 것이라고 애타게 고집하려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실망과 좌절,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이성도 가족도.. 크면 큰 대로 크게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작으면 작은 대로 작게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이니, 크게 집착하면 큰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고, 집착이 없으면 없는 그대로 괴로움의 과보를 받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인과(因果) 인연의 질서에 따라 오고 가는 것인데, 집착한다고 오는 것을 막거나 가는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임에도, 실컷 집착한 대가에 의해 괴로움의 과보를 받고 생로병사 하느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괴로움의 과보 없이 생로병사 하느냐, 선택의 시간문제일 뿐, 이러면 어쩌나 저러면 어쩌나 매 순간 노심초사하며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오고 가는 것에 관계없이 스스로 집착하는 질량(質量)만큼 괴로운 마음의 질량도 똑같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면 이런 것이구나, 저렇게 되면 저런 것이구나 하고, 인과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바라본다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또 나쁘다고 하는 분별(分別)심이 생기지 않게 되고, 분별없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면 불안한 마음과 괴로운 마음 역시 절대로 생길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매 순간 인과법(因果法)을 잊지 않고 굳은 신심(信心)만으로 무장된다면, 이런 일 저런 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에 상관치 않게 되고, 늘 포근한 마음과 여여로운 마음이 유지될 것이니, 그 어떤 일에 있어서도 절대로 인과에 대한 신심(信心)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내가 바라던 바라지 않던, 인과 인연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굳게 믿고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원하고 바라는 마음이 없어짐에 따라 드디어 선연(善緣)이 저절로 생기게 되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부딪치는 모든 것이 편안함으로 나타날 것이니, 놓고 또 놓고 무조건 놓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 참선, 보시, 정진이늘 생활화되어야 한다
이때는 대상을 향하여 순간순간 조작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반복적 습성인 사업(事業)은 멈춰지고 오히려 알아차림이 동반되는 사업은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지작용으로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이렇듯 알아차림은 과거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모든 심리현상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합니다. 즉 업의 모습인 감정과 생각은 모두 과거를 포함하고 과거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과 생각 속에 빠져 있던 마음을 깨우고 감정과 생각 밖에서 감정과 생각을 보게 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바뀌어가는 변화를 알아차리는 관찰입니다.
무상은 곧 5대의 현상인데 무상을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게 됩니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 순간(here and now)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현재 이 순간도 순간순간 변합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모양과 색깔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따라서 무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현재 이 순간에 머물게 되어 마음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즉 마음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아 몸의 중독성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렇게 자비손은 과거를 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면서 과거의 부정적인 것을 자비심으로 순화시키며 몸의 습관적 앎의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정념(正念)으로 알아차려 몸과 마음의 본질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임을 꿰뚫어 보고 반조(返照)함으로써 습관성이 반복되지 않고 끊어지게 됩니다. 중독성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자비수관의 중요성은 네 가지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비손의 성격에 따라 몸의 현상이 달라집니다. 예로, 자비감로수는 물의 손으로 물의 요소와 상응하여 상처받은 가슴이 치유되면서 분노를 일으키는 마음이 이해, 화해, 관용, 사랑, 용서, 연민심 등의 성격이 바뀝니다.
둘째, 자비손의 자비심은 자비종자를 생성시켜 아뢰야식에 심어지도록 합니다. 자비종자는 과격하거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격을 완화시키고 자비심으로 바뀌게 합니다. 지속적인 습관적 질환을 막아주고 자비로 변환시켜줍니다.
셋째, 길들여진 몸의 습관적인 틀이 부서질 때 몸 기운에 의해 형성되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마음은 맑고 투명하며 깨어있게 바뀌게 합니다. 그러나 몸의 습관적인 틀을 부술 때 심리치료나 명상 등에서 쓰는 과격한 방법은 극히 위험합니다. 과격한 방법의 자극이 몸의 감각을 통해 아뢰야식에 저장되며 몸의 앎은 습관적으로 되풀이됩니다. 그러면 과격하고 폭력적인 그 방법에 의해 현재의식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비심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습관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습관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는 정념의 알아차림 즉, 반조와 반성적 사유(원인을 규명하여 그 원인을 제거하는 위빠사나)를 통해 습관성을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비심에 의해 활성화되는 5대의 현상을 정념으로 관찰하면 몸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통해 몸에 배어있던 습관도 사라집니다. 이때 몸의 무상과 고, 무아를 알게 되고 몸과 동일하던 생각이 사라짐에 따라 몸과 관련하여 일어나던 갖가지 부정적인 심리현상이 사라지게 됩니다. 의식작용인 수(受)와 상(想)과 사(思) 심리가 일어나지 않게 되어 마음의 고요와 안정이 옵니다.
_()()()_
'위 없는 법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연 존재와 실상 (1) | 2024.12.03 |
---|---|
사대가 오온으로.....! (1) | 2024.11.30 |
아전인수 (0) | 2024.11.19 |
본래 무일물 (4) | 2024.11.17 |
山中 孤獨! (2) | 2024.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