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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속 세상

저물어가는 가을 정취

 

행복하기 위해 잘 살려 하지만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

이 생이 잘 살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고 살다 죽어버린다면
잘 살 수 있는 종자를 심지 않아서 다음 생에 더 괴롭게 살 수도 있다

"이번 생만 잘 살면 되지 다음 생은 무슨.?"이라는
생각만 낸다면 이 생의 작은 일들은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에만 만족하기 때문에 좀 더 나은 종자를 심어야겠다는 설계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이 잘 되고 안 되고 역시 지난날의 설계에 의한 결과임을 인정하자
지금 보다 더 행복하고 싶고
지금 보다 덜 괴롭고 싶거든
종자를 심자!!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닌
"온 중생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대장부의 종자"를 심자

이렇게 어리석음을 지혜로 대체하려 노력한다면
깊은 산중 토굴에 살아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찾아 들어올 것이다

 

아상(我相)을 없애주는 하심!

하심(下心)은 한자의 뜻 그대로 '나의 마음을 내려놓아 가장 아래쪽에 두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낮추어 남을 공경하고, 뜻을 겸손히 가져 화합하는 삶을 이루는 것이 하심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하심을 이룰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심, 자만심, 이기심의 밑바닥에 있는 아상(我相)을 끊는 것입니다.

자경문(自警文)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人我山崩處)인아산붕처 (無爲道自成) 무의도 자성 (凡有下心者) 범유하 심자 (萬福自歸依) 만복 자귀의

너다 나다 하는 상이 무너지면 위없는 도가 저절로 이루어지니

무릇 하심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오느니라.

인아산(人我山)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상의 산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깔아뭉개면서 끝없이 높아만 가는 아상의 산,

자꾸자꾸 높아져 결국에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 야마는 아상의 산.

이 아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많이 안다. 나는 잘났다. 나는 부자이다.

나는 높은 지위에 있다. 나는 너보다 낫다고 하는 일상의 생각들이 바로 아상입니다.

곧 너에 대한 나의 상대적인 우월감이 아상인 것입니다.

이 아상이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소통을 가로막고 나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이 아상의 산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저는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잘 이끌어 주십시오.

마음을 낮추어 잘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상은 스르르 무너지고, 하심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삼척동자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말을 나의 입으로 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의 자존심은 '고개를 숙인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나를 높이는 아상을 버리고 하심을 해보십시오.

진실로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고 남을 위해 참된 봉사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 마음은 저절로 편안해지며,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잊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안 될 때는 조건 없이 하심 하십시오.

특히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하심이 중요합니다. 하심을 하면서 일에 임하면

안 풀리는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자존심을 세우고 아상이 가득한 상태로 살면

복덕의 문이 쉽사리 열리지 않습니다. 부디 아상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못 살겠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특히 부처님 전에서 '못 살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숨을 못 쉬어야 못살지, 왜 못 삽니까? '못 살겠다'는 그 말 자체가 아상으로 인해 들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상 때문에 살기 힘들게 되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낮출 줄 모르면서 부처님께 찾아와 못 살겠다고 떼를 쓰면 되겠습니까?

간절히 살펴보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분명하게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하심을 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면 능히 대성 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곡식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별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아상이 무너질 때 소원은 저절로 성취되며,

아상을 다스리는 하심을 할 때 만 가지 복은 스스로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멀리 보고 살아야지!

사람이 사는 한 생애의 기간을 일기무상(一期無常)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무상을 말할 때 찰나(刹那)무상과 일기 무상의 둘로 설명을 한다. 이 무상이라는 말은 시간이 짧다는 뜻을 가지고있는 단어다. 순간의 일이란 의미에서 무상을 붙여쓰기도 한다. '세상만사가 무상사다.'고 할 때의 무상은 '덧없다.'는 뜻과 함께' 순간에 불과한 일'이라는 뜻을 가진다. 찰나에 생겼다가 찰나에 없어지는 것, 이것이 모든 현상계를 단적으로 파악할 때 쓰는 수식어다.

그런데 무상이란 존재하던 사물이 없어진다든지 전성을 누리던 사람이 몰락한다든지 하는 상황 퇴보에서느끼는 감정의 표현으로 곧잘 쓰이는 말이지만, 원래는 생각이 움직이는 것에서 나온말이다.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는 염기염멸(念起念滅)의 생멸심을 말한다. 사념처(四念處)의관법(觀法)에서 관심무상이 나온다. 마음을 무상한 것으로 보란 말.

특히 중생의 마음은 번뇌가 일어나 마음이 고요할 때가 없이 마치 파도치는 물결처럼 항상 출렁거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념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자꾸만 다른 생각으로 옮아가면서 생각과 생각이 상속된다. 그리하여 물이 흘러가면서 이어지듯이 의식의 흐름이 생겨 시간과 공간에 스며든다. 인간의 의식이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경계를 접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에 와서는 신경이 예민해져,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염력 곧 생각의 힘이 약해진다.

다분히 감각적이고 말초적인1차신경의 피상적인 생각만으로 현실의 제반사항을 안이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짙다. 때문에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이 많이 일어난다. 더구나 모든 것이 스피드 위주로 가속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의 물리적 기능이 인간 의식의 템포를 빠르게 하므로 인스턴트의 찰나주의가 횡행한다. 급기야 순간에 죽고 순간에 산다는 즉흥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인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내일은 내일 가서 보자며 오늘의 원인이 초래할 내일의 결과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자포자기하는 성미를 부리며 될 대로 되라고 채근을 한다.

이러므로 감정을 순화시키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심리적 상황으로 볼 때 현대의 불행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사람은 멀리 보려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환경이 좋건 나쁘건 멀리 보고 생각하면 모든 상대적 차별이 좁혀지게된다. 행복과 불행의 대차도 멀리 보고 생각하면 줄어든다. 아무리 한 평생 호의호식하는 부의 복이 있다 해도 일회적인 한정된 생의 것이며, 것이 세세로 이어지려면 우선은 다음 생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언제나 삼세를 함께 관찰한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똑같이 본다고 한다. 기실 모든 존재는 삼세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오늘을 산다는 것이 어제와 내일을 동시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는 많아지는 것이며 나이가 많아지면 그 속에 많은 과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장수왕(長壽王)의 이야기가 있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다 망한장수왕이 다른 나라로 도망을 하여 광대처럼 악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아들 장생 동자를 낳았다. 이 아들이 매우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 장차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역량이 엿보였다. 장수왕을 멸망시킨 이웃나라 가사 국왕이 후환이 두려워 장수왕을 죽인다. 임종 순간에 장수왕이 아들 장생 동자에게 이 말을 남긴다. "원수를 갚지 말라. 멀리 보고 살아라." 원한은 복수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다. 복수는 또 복수를 불러오는 것,

세월이 흘러 멀리 멀리 지나가면 사랑도 미움도 함께 용해되어 나중에는 증발되어 사라진다. 다만 한 생각에 마음을 안정시키면 일념이 만년이 되어 간다. 한 생각 일념이 만년이 되어 가면 무심에 합해진다. 무심은 무상을 뛰어넘어 영원을 기약한다. 멀리 보고 사는 것이 오래오래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