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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홀로 살수 없다

 

 

업의 숙명을 슬기롭게 따라가야 하며 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은 만남과 인연의 연속입니다.

좋은 사람만을 만나서 선연(善緣)을 이어가고 싶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지금의 인연은 전생의 업력에 따라 생깁니다. ‘인연과 근기에 따라 산다’고 했듯이 자신의 근기도 훌륭해야 좋은 인연을 엮어갈 수 있습니다. 인연이라는 말에서 인(因)이란 자기 인자 즉 자신의 근기이니 이것이 업이고, 연(緣)이란 여건이요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연은 자신의 업과 주변 환경이 맞물려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인연을 잘 성찰해 보면 연기법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고 하지 않았습까? 연기법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저도 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지장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지장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대한민국도 지구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으며, 지구 역시 우주가 존재하기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물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중중무진의 인과 연이 맺어져서 현상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에 사는 우리가 내 업대로만 살겠다면 그것처럼 우매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은 업대로만 살겠다고 하는 순간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을 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윤회도 끊을 수 있다고 믿고 해탈을 향해 홀연히 길을 떠나는 불자입니다.

불자는 자신의 악업을 소멸시키고 선업을 쌓아가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복을 짓고 누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실천해 가야 합니다. 복은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인연이 좋아야 복덕을 안을 수 있는데 그 인연은 자신의 근기와 여건이 조화를 이뤄야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 개인은 자신의 근기도 돈독히 해 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노력의 실마리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부처님이 상세하게 말씀해 주신 팔정도에 의지 하십시오. 정견은 그 어느 팔정도 보다 중요합니다. 견해란 눈으로 보는 것을 이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어보고, 머리로 생각하는 6근이 작용하는데 정견을 가져야 이 6근을 조정할 수 있고, 정견을 가져야 6근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또한 정견이 확립되면 우리의 인생과 사회, 우주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정견을 세우면 정사와 정어, 정업, 정명, 정근, 정념, 정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다만 정정은 수행을 통해 가능한 것이니 만큼 큰 원력을 세워야 함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삼매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만큼 정진하면서도 여러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지혜로운 불자가 되는 길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온통 다 번거롭게 보입니다.

반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또 가까운 이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좋아하고 가 가운 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힘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스스로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이며, 스스로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또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중생심衆生心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거기에만 집착[執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자가 겪고 있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괴로움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마음속의 번뇌는 결국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 삶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입니다. 삼귀의, 오계, 보살계, 비구계, 비구니계와 같은 견고한 그릇을 가지고 그 바탕 위에 반야지혜를 드러내면, 마치 해가 동천에 솟아나면 어둠이 스스럼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도 맑고 깨끗한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만큼 산분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괴롭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는 괴로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괴로워 못 살겠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왜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고통과 괴로움 속에 내몰려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진치 삼독이라는 번뇌로 인해서 재색식 명수의 오욕락이라는 망상이 죽 끓듯 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정혜 삼학을 지니게 되면 번뇌 망상[煩惱妄想]을 여의게 되고 번뇌 망상이 끊어지게 되면 고통과 괴로움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현상에 매여서 사는 우리들의 인생은 전부가 고통과 괴로움으로 범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탐진치 삼독이라면, 그것이 타고 있다면, 타고 있는 그 불을 끄면 됩니다. 타던 불만 꺼지면 끓던 물은 잠잠해집니다. 타는 불을 꺼트리는 방법은 결국 계정혜 삼학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전도 몽상으로 드러나는 공포를 다 여의게 되고 헛된 삶으로 끄달리는 그릇된 집착이나 속박으로부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진 이가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좋은 벗을 가까이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째는 연민[憐愍]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니라.” 보리심은 자기의 본심인 참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마음을 지니고 있고 참마음을 일으키는 이는 좋은 벗을 가까이할 수 있고, 성냄을 끊을 수 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며, 진지한 자세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월초파일을 준비하면서 더 특별하게 기도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기간 동안 각자의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스스럼없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는 지혜로운 불자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보시"

우뚝 솟은 선맥(禪脈) 그중 하나가 방하착(放下着)이다.
“일물 불 장래 시여하(一物不將來之時如何).”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여전히 큰 가르침으로 남아 있는 저 유명한 “방하착”이다.

‘방하착’ 즉 내려놓으라고 한 것이었다.
방하착에서의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또는 걸림을 의미한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니 ‘내 것’이니 하는 생각에 매달려 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한다. 일체 모든 그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 자리에 놓으라는 것이 방하착이다.집착을 내려놓아야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된 나라고 하는 지고 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내 안의 밝은 자리에 놓고 가는 것이 방하짝이다.
놓고 가는 이는 아름다우며, 떳떳하고 당당하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하다.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하다. 내가 한다고 하는 아상, 아집을 내려놓지 않으면 착이 생긴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다. 그래서 괴로울 게 없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다. “방하착(放下着)!” 너희들이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해서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못 놓고 가겠으면 도로 지고 가게나,,

 

모든 것 오직 마음이 지어냄

그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미혹하게 쓰는 것이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깨치고 미한 것은 다르지만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제외하고는 마침내 다른 부처를 얻을 수 없다. 도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온갖 소리를 다 한다 하더라도 부처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중생이 잘못 알고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알지 못할 뿐입니다.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나의 주인공이 그 어느 곳에 있어서 안심입명 하는고?”

수행자라면 견도·수도 해야 삼도란 견도, 수도, 무학도를 말합니다.
견 도라는 것은 눈으로 본다, 귀로 듣는다, 코로 냄새 맡는다, 혀로 맛본다, 몸으로 감촉한다, 뜻으로 헤아린다
요놈이 들어서 악업을 짓기도 하고 선업을 짓기도 하고 도업을 쌓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악업과 선업을 뛰어넘어서
도업으로 들어가는 소식을 견 도라고 합니다. 알음알이를 벗어버린 경지를 견도라고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스님이나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알음알이에서 벗어나서 면도를 하라고 강조하셨다.

“온 산이 온 생각 물든 가운데 시무 불성을 찾는 나그네가 텅 빈 집에 둥근달이 환히 비치는 가운데 홀로 앉았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음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주인공아, 너는 어떤 놈이냐?”

수도란 얽혀있는 정을 풀어버리든지, 탁 끊어버리든지, 관념의 상으로 맺어진 그것을 녹여버리든지,
아니면 탁 때려 부숴버리든지 하는 것이 수도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스님,
이 땅의 모든 종교인들이 이렇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생각도 없고 말도 없는 무학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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