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으로 실체가 없는 형상에 속아서 살아가는 나그네들이시여!
“마음. 형상이 없어 잡을 수가 없구나”
모든 사람은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는데 스스로 덮고 있어 그 능력이 나오지 않을 뿐
구름이 걷히면 있는 마음이 드러나,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불교의 시작이다
마음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라는 사람은 이 본래부터 있는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이 본마음은 깨달음의 성질을 품고 있으며 그 이름이 곧 불성이다.
부처는 이를 깨닫고 나서 세존이 되었으며 세존께서 말씀하신 법문이 결집되어
경전이 된 것이다. 이 經 중에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중에 잘 드러난 것이 약인 욕 요지 삼세 일체 불 응관 법계성 일체유심조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마음을 알면 모든 성인을 한곳에서 만난다.
모든 조사와 선지식들은 곧 이 마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중 마조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卽佛]’라는 말로 다시 세존의 말을 살려 내고
이 본 마음은 깨닫는 이든 못 깨닫는 이든 내가 움직이고 작용한 가운데 항상 안 떠나고
이 마음은 성인에게 있는 것이나, 범부에게 있는 것이나, 그 성질이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마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世尊 또한 말한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은 쉴 새 없이 활동하고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바쁘게 마음을 쓰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텅 비어있으니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항상 쓰고 있으니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의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이걸 경험하면 우리들의 헛생각은 저절로 놔진다.
선에서 말하는 사량 분별이 저절로 떨어져 그쳐 대개 참선이 잘 안 되는 것은
이 얻을 수 없는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시작한 데서 온다.
만약에 얻어지는 것이라면 마음이 아니다.
다시 없어지기 때문에 얻는 것은 잃는다. 생하는 것은 멸하다.
만남은 헤어짐을 저절로 기약한 것 과 같다. 오감이 사물을 만나 만들어진 마음은 그런 것
참선공부는 이런 마음이 마음 아닌 줄 아는데서 시작한다.
변하는 마음에 내가 의지 해 있으면 항상 나는 번거로움 가운데 있게 된다.
그래서 선에서는 이 맘을 그치려고 禪心인 맘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하는 화두를 든다. 다시 기억되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 할 수 있는 마음은 그 성질이 뿌리가 없이 떠도는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음을 실제 하는 마음으로 잘 못 알고 있다.
이 마음을 없애고 안정을 얻으려고 만, 그러나 없애려고 하는 그 마음이
더 번뇌를 만들고 있다는 것, 마음을 조용하려고 할 뿐! 조용함은 오지 않는다.
오직 맘이 마음 아닌 줄 알 때라야 마음이 놔져 조용해져,
마음이 맘 아닌 것을 자각 속에서 알고 있을 때 본성이 드러난다.
이 본성의 성질은 비어져 있다 그리고 어떤 형상이 없고 빈 마음은 어떤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곧 무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은 이 빈 마음을 만나면 저절로
무너져서 마음은 조용하다. 대개 우리는 ‘경이 어떻고, 어떤 법문이 그렇고. 등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불법으로 믿고 있다. 생각 속에선 맞다.
그러나 마음엔 그런 것이 없으니 어쩌랴!
아는 불교를 붙들고 있는 동안은 내게 있는 佛이 싹 트이지 않는다.
그 아는 불교가 빈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에 빈 마음은 어떤 법도 서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를 편안하게 한다. 이 마음은 기억하는 성질이 아니다. 이 것을 알아야 한다.
먼저 기억된 불교를 놔버려야 이 말이 믿어진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
사실 나는 마음이 있는 줄만 알아도 편해진다. 먼저 믿음이 귀하다.
본마음에는 구하는 것이 그쳐 있다. 지혜가 있다. 이것이 확인되면 모든 방황은 끝난다.
밖으로 찾아나가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서두름이 없어진다.
뒤 바뀌어진 전도몽상이 바로 잡아져 생활에 질서가 생겨 불교이거나 불교가 아니거나
상관없이 내가 익혀 배운 것이 모든 상식(지식) 나부랭이들이 저절로 놔진다.
생각이 순리를 따른다. 급한 성격도 고르러 져 부드러워진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배움의 학교가 되고 상식 속에서 공부가 된다.
사람들은 본시 자기에게 있는 마음을 놔두고 배워 익힌 것으로 불교를 삼는다.
시끄럽다. 불교는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종교이다.
따로 마음을 찾아 나서는 일을 그쳐야 하고, 찾아 나서면 머리만 뜨겁고 그치면 머리가
시원하다. 보리달마는 말한다. 찾는 것은 고통이다!
마음이 맘 아닌 줄 알면 찾는 마음은 그치고 나 안에서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이 절로 살아져
본마음엔 집중하는 것도 없다.
대개 사람들은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 마음을 알려고 든다. 이 마음도 놔야 한다.
놓지 못하면 그 마음이 다툼을 만들고 본마음을 더 가려버린다.
다만 마음이 마음 아닌 줄 알아야 한다. 알면 놔진다. 나는 다시 평온하다.
너 나가 살아 나는 곳이다. 부처가 계신 곳이다.
좁은 나를 놔버리는 곳에 큰 나가 있다. 불교는 넓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 종교이다
우리는 마음이 아닌 불교를 믿는 것인가 돌아봐야 한다.
마음을 떠난 불교는 없으며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世尊인 석가佛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는 작은 것 큰 것, 악과 선, 중생과 부처, 이 두 짝을 놔 버리면 어디서든지 하나로
뚫어져 있는 마음을 만난다. 이 마음 바탕을 성性이라고 한다.
이 性 속에 부처가 숨 쉬고 있다. 부처는 우리가 지닌 이 성을 보고 말을 하고
이 성엔 지혜와 복덕이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고 설한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貴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밖을 향해 동과 서쪽에서 밖을 향하여 두리번거린다.
찾는 것을 그칠 줄을 모른다. 無心을 모른다.
無心이란 어느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는 마음이다. 빈 마음이 그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가운데 있지만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볼 수가 없다.
푸른 하늘 허공과 같다. 허공은 지나가는 구름에 머문 사람은 이 빈 마음을 덮고 있는
사람이다. 이 性을 모른다. 성을 봐 아는 사람은 구름을 놔둔다.
그러므로 구름에 머물지 않는다. 이 머물지 않는 마음을 조주는
“부처 없는 곳에서는 머물지 말고, 부처 있는 곳에서는 지나가 버리라”라고 말한 것이다.
‘지나간다'는 것은 알고는 있되 그냥 놔두어져 있다. 깨어 있음의 다른 말이다.
이 사람은 마음을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알고는 있다.
경험이 온자는 알고는 있지만 기억하여 지키지 않는다.
그것이 智慧인 것이다. 그는 짐이 없다.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내게로 와서 쉬어라!
우리는 누구나 이 性을 만나면 저절로 무거운 짐이 내려놔진다.
집착이 사라지는 다른 말이다. 그가 말한 가난한 마음은 곧 빈 마음이다.
빈 마음을 만난 무거운 짐은 붙어 있을 곳이 없어 스스로 무너져 부처 없는 곳에서 머물지
말라는 조주의 말은 중생 심인 탐·진·치에 머물지 말라는 말이다.
佛설 금강경에 있는 ‘응무소주 이생 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조주는
하나의 뜻에 다른 말을 내놓고 있는 것뿐 이 머물지 않는 마음엔 차제가 없다.
어떤 계단을 오르듯이 올라가 닦는 법이 없다.
‘공부를 얼마나 했다’는 그런 것도 없다는 것이다.
구름 걷히면 있는 하늘이 스스로 드러나니 말이다.
심법을 깨치는 것은 이렇다. 마음을 봐 부처를 본 사람들이 우리들도 내게 있는 마음을
본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나에게 가려진 것이 벗겨지면 석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품이 드러나기 때문에 세존은 말한다. 모든 사람은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는 성품이 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덮고 있는 까닭에 그 능력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품을 봐 깨달아 다시 구름이 겉이면 있는 마음이 드러난다.
나는 곳곳마다 살아난다. 눈을 뜬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성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불교의 시작이다. 이 믿음이 나에게 허락되면 나는 변한다.
나 안에 있는 지혜 복덕이 싹이 튼다. 능력이 살아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다가 어떤 문제를 만나면 이 믿음 대신에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의심을 짓는다. 헛생각 속에 사람만 어두워진다.
그러나 그 헛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부처는 나를 안 떠나 있다고
알고 믿어 들면 의심이라는 나쁜 습은 다시 고개를 숙인다.
화두공부 또한 기억 속에 있는 화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닿아있자기 않는 화두는 이름만 화두, 생각 속에서 문헌으로 익힌 화두가 그것이다.
이는 체계적일 수는 있지만 그곳에 마음이 없고 마음이 짓는 그림자 화두일 뿐이다.
생명 바탕인 마음에서 시작이 되지 않는 禪은 공부가 되기도 전에 몸과 마음에 병이 온다.
지 마음을 놔두고 禪을 하는 이들에게서 보고 이런 화두 공부는 몸 안에 갇혀있는 사람이다.
사물을 보는 눈이 넓지 못하고 좁다. 뜻은 대승이지만 그 행은 소승이다.
옛사람들 어록 속에 있는 언어들은 내 마음에 있는 소리인 것이다.
마음을 만나면 저 옛것이 지금 내 마음에서 다시 살아나 안과 밖이 활달하다.
그의 말인 경이 나 안에서 살아 나온다. 바른 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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