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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흘러가는 물처럼 반야선을 타고 떠나리!

 



우리는 세세생생 버릴 줄 모르는 집착의 세계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집착하며 사는 것이 버릇이 되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을 하나 붙들면
놓아버리지를 못 합니다.

어느 날 관광버스를 타고 어느 도시를 스쳐 지나가다가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동네 골목길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한평생이 지나도록

그 간판이 안 잊히고 마음속에 간직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우연히 눈에 비친 것도 그러한데, 하물며 내 마음을 일으켜
가지고 붙드는 일들이 어떻게 나에게서 떨어지겠습니까? 이렇게 무서운 것이 우리의 버릇입니다.
{능엄경}에는 '오십 종 변마사(五十種辯魔事)'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색 · 수 · 상 · 행 · 식 5 온의 각각에 해당되는 열 가지씩의 마구니의 일을 곱하면 오십 종 변마사가
됩니다. 곧 쉰 가지의 마구니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 일상생활이 전부 여기에 해당됩니다.

심지어 머리를 깎고 절에 계시는 큰스님들이나 큰 절의 조 실 스님이라도

이 오십 가지 마구니의 장애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능엄경』의 제9권과 10권에 수록되어 있는 50종류의 마구니에 대해
공부한 다음, '나와 관련된 마구니의 일은 어떠한 것인가'를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능엄경』에서는 무섭도록 마장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밝혀놓았는데,
그것들은 과연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이 마구니 모두가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별 인연도 없는 거리의 사소한 간판 하나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나'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에서 내 부모,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가 지워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나는 그 모두를 지울 수 있어!'라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
말입니다. 중생에게 있어서는 가족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참으로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얽혀 붙는 번뇌'가 되어 무섭도록 우리를 핍박하지만, 반드시 이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능엄경}의 오십 종 변마사를 공부해 보면 그 마장의 내용들이 일반 불자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에서도 모두 체험되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염불, 주력, 화두, 경전공부, 참회, 절 등의
기도나 수행을 할 때 오십 가지 마구니의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마다 그 고비에

흔들리지 말고, 결국에는 극복해서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십 종 변마사를 비롯한 팔만사천 마구니 모두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심이요
망상 심이며, 이 모두가 바로 애착하고 집착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들입니다.
소리도 빛깔도 냄새도 모습도 없고 잡을 수도 떨칠 수도 없는, 불교에서 불성, 원각, 진 아라고
이야기하는 이것이 바로 원점인데, 언제부터인가 버릇이 들고 물이 들어 자꾸만'무엇을
붙들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당기고 싶은'집착을 주춧돌로 삼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출발점은 어디인지 모르는데, 한 번 붙들고 두 번 붙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익어져서
버릇이 붙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처음에는 너무 속상해서 몸에서 받아주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이것이 습관이 되어 저절로 술을 퍼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 우리의 버릇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버릇이
붙고 집착이 붙어 어떤 일에도 망상으로 추측하고 짐작할 뿐,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 백 가지, 수 천 가지의 습관이 붙어 '속지 말아라 속지 말아라' 고 끊임없이 외쳐도,
집착과 번뇌에 끌려 다니고 허상에 속으며 살 뿐입니다.

다른 일은 그만두고라도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것만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겉으로는 자식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고 배우자를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부 내 욕심을 채우는 일일 뿐, 진짜 자식을 위하고 배우자를 위해주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곁에 붙은 내 욕심이 장난을 하고 꾀를 부리고 나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쁜 습관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 나가는 노력들이 자리를 잡아가야 하는데,
자꾸만 내 욕심이 얽혀서 사건을 더 크게 키우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들입니다.

우리는 세세생생 붙들면 놓을 줄을 모르는 집착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집착의 세계에서 익힌 버릇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해 착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 몸이라는 것이 거짓부렁이요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이 마음이라는 것을 꼭 어떤 물체의 형태로 우리 몸속 어딘가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억지로 이해하기 쉽게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그 이름에 집착해서, '내 마음' '너 마음'
또는 '김 아무개의 마음, 박 아무개의 마음'하면서 '마음이 있다' 고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모양이 없는 것이 마음임을 모르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됩니다. 이름뿐인 '나, 마음,
부처...'갖은소리를 다 하고 여러 이름을 붙여놓은 이것을 멀리 떼어 내버려야 하는데
떼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맑고 맑은 투명체의 구슬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구슬은 자체가 아주 깨끗하기 때문에 붉은 환경에 처하면 붉은 색깔을 띠어
붉게 보이고, 푸른 환경을 만나면 푸른 색깔을 띠어 푸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구슬이 본래 붉다고 생각하고 이 구슬이 본래 푸르다고 사유하고

깨끗한 진리의 세계에는 이런 색이나 모습들이 없는데, 진리 속에 이런 색이나 모습이 있는 것
처럼 착각을 합니다. 맑은 구슬은 붉은 환경에 가면 붉게 보이고 푸른 환경을 만나면 푸르게
보일 뿐, 본래 구슬 자체에는 붉고 푸른 빛깔이 없습니다.
우리의 성품 또한 깨끗한 원각 자리, 본래 청정한 부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형체 있는 이 몸을 주춧돌로 삼아'본래 청정한 부처' 까지도

꼭 어떤 모양을 가진 것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진 리의 세계에는 '내 몸이다 ·
내 마음이다'라고 하는 어떤 물질적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만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착각 속에 빠져 있으면 진리에 대해 문답을 해도 엉뚱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착각을 주춧돌로 삼아 살다 보면 눈앞의 모든 헛된 것을 놓아버리지 못합니다.
착각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지금의 상태를 버리기는커녕 더욱 붙들고 늘어지게 됩니다.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만 집착을 덧붙여 나가서 더욱 얽혀 들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어리를 있는 그대로 두고 미련도 떨어져 나가거나 집착도 떨어져 나가거나,
내 가족을 그대로 두고서 이별을 할 수 있는 차원이 되면 참된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체와 상대해서 이별을 할 수 있다고 하면, 모든 애착이나 미련이 떨어져 버리고
망상심이 떨어져 버린 차원입니다. 실제로 이 경지를 체험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미련이나
집착으로 뒤엉켜서 범벅이 된 상태가 아니라 홀가분하고 부담이 없는 세계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자꾸 집착을 하고 그 공부에 대해 엉뚱한 기대를 걸게
됩니다. 도를 깨친다고 하면 여태껏 모르던 세계가 다 알아지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도를 깨치고 나면 영어, 독일어, 일본어를 저절로 다 알게 되고, '하늘천 따지'의 천자문도
저절로 다 알아진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공부를 해서 도를 깨치고자 하면
무엇보다 먼저 집착을 떨쳐버리고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의 내 몸뚱어리를 그대로 두고 집착을 떨쳐버릴 수 있고 눈앞에 있는 모든 모습에
구속을 받지 않는 차원을 얻으면, 그 어떤 것 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청정한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때의 청정한 세계는 더러워진 것을 때를 닦듯이 닦아내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지금의 있는 상태를 그대로 두고,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고 견줄 수도 없는 깨끗한 것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리 다리는 짧고, 학의 다리는 긴, 그대로가 평등이고 그대로가
청정입니다. 대우주 세계 그대로가 우리의 마음이 나타난 상태입니다.
진리가 따로 있고 지금 나타나 있는 모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그대로 현재의 모습이 요 현재 모습이 그대로 진리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중생 마음속에서 부처 깨달아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같은 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괴로움 없이 즐겁게 살려한다는 점이 똑같습니다.
예술, 종교, 철학 도 그 근본 목표는 전부 고통 없이 즐겁게 사는 데 있습니다.
불교도 이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나고 죽음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가느냐. 거기에 근본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려고 하면 부처님이 어떤 분이냐, 어디에 계시느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흔히 타 종교인들이 말하기를 불교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그러면 우리가 모신 분이
부처님입니까.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 되는데 불상이라고 생각하면 불상
이 됩니다. m 마음먹기에 따라 n불상이 되기도 하고 부처님이 되기고 하고 골동품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불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화엄경』 소초를 낸 통현 장자라고 하는 유명한 거사가 있습니다.
그분이 화엄경에 대해서 지은 글 중에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마음공부의 근기가 감당하는 바를 따라서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이지
다른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 체불의 근원 자리를 알고자 할진 데는 자기의 무명
자리 그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본래의 부처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명이라는 것 때문에 부처가 안 되고 있는 것, 밝음이 없다는 것, 밝음이 없으면
깜깜한 밤중과 같은 것입니다. 눈을 감아 버리면 바로 깜깜한 밤중입니다.
무명을 깨달으면 본래 자리가 부처, 눈을 감았다가 떠버리면 온갖 것을 다 알잖아요.
그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자리 눈을 감았다가 뜬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감았을 때도
눈이요, 떠도 눈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는 엄청나게 다르지요.
부처와 중생이 그와 같다는 것, 중생에게도 그 마음이 있고 부처에게도 그 마음이 있다
마음, 부처, 중생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다 차별이 없다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감았던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데.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를 할 것 같으면 금반지, 금시계, 금목걸이와 같은 것이 처음에는 금광에서
부터 나왔습니다. 금광의 금은 중생과 같습니다.
번뇌, 망상, 이 생각, 저 생각, 과거에 지은 팔만 사천 업장이 거기에는 다 섞여 있디
그것을 제련하고 달련해서 99% 금이 되는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금과 같이 제련 기간을 거치면 금이 될 수 있겠지요.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하고 경을 보고 하는 것은 정신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에 하는 공부
정신 일치하는 것이 곧 마음공부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도 일심 칭명하고, 화두를 할 때도 일념 삼매, 일심 삼매, 일행 삼매,
한 생각 다른 잡념이 들어오지 않는 것.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칠일칠야, 일주일 밤낮
한 생각만 연속이 된다고 한다면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머었이냐’ 한 생각만 있어야지 다른 생각(망상)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망상이 들어오면 안 되고 졸아도 안 됩니다. 물론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납니다.
간절한 신심과 대 분심과 대 원력과 대 의심이 없으면 화두 일심이 안 되죠.
기도하는 사람들도 법당에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도 생각은 아들 집에
갔다가 딸 집에 갔다 하며 여러 생각이 일어난다면 법당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생각이 딱 없어져서 100% 순금이 되는 상태가 마음공부입니다.

불교가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내 마음 닦는 것인데, 이 이상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듣는 것이 아니고. 입이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 이것이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몸뚱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이 우주를 조물주가 창조했다
조물주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인간의 마음에서 조물주가 나왔습니다.
마음이 떠나면 몸뚱이는 송장이라고, 마음이 있으니까 몸뚱이는 사람이지.
죽었다는 것은 마음자리가 여기에서 떠났다는 것. 내 몸뚱이도 마음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도 우주도 내 마음이 없으면 몸도 없고 우주도 없다.

주관과 객관이 전부 다 마음에서 창조된 것,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수라가 전부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일체가 다 마음에서 지어졌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음자리, 이것이 우리의 근본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알아야 됩니다.

도라고 하는 것이 있는 데도 깨치고 없는 데도 깨치니까요. 그래서 도는 있는 데 속하지도
않고 없는 데 속하지도 않으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리를 보면 처음에는 삼라만상 전부 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전부 있는 데 집착
하거든요. 있다고 집착하니까 없는 것이라고 그런데 없다고 생각하니까 분명히 생로병사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바로 중도의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의식주 생활에도 바쁘겠지만 한번 죽게
되면 다시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거든요.
육도 중생 가운데 인간 몸을 받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천국이 좋기는 하지만 즐거운 곳에만
있으면 공부할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 사는 사람이 절에 안 가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는 것이 고락이 상반이라,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공부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을 받더라도 정법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만큼 과학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유일신 종교는 계속 전쟁을 하고 싸워야 됩니다.
다른 신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계속 전쟁을 하는 겁니다.
불교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고 정법을 만난 여러분 기도를
하든지 경을 보든지 참선을 하든지 간절한 노력으로 모두 대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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