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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사색의 길....

 

 

림자가 끊긴 자리!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전부 생각의 흐름, 한 생각도 없이, 그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 생각도 안 한다 해도 보통 중생의 세계에서는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을 가지고 안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다 쉬어버리지 못한 것이고 텅 비웠다 해도
비웠다는 생각 역시 하나의 생각이거든요.
결국은 우리의 생각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자꾸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좋은 경계가 오고 기뻐할 때는 좋은 줄은 알지만
그것은 금방 꿈같이 지나가 버립니다.
또 어떠한 생각이 대신 밀어닥쳐 연신 붉은 생각, 푸른 생각, 흰 생각 온갖 생각이 난다 그 말이지요.
기쁜 생각 덤덤한 생각, 사랑하는 생각, 미워하는 생각, 질투하는 생각, 온갖 생각이
자기의 부처를 가리고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니 괴로운 것이지요
그걸 두고 불교에서 똘똘 뭉쳐 말하기를 ‘염기염멸이 즉 생사다(念起念滅 卽生死)’
즉 생각 일으키고 생각 끊어지고 하는 그것이 나고죽는 것이라는 겁니다.

‘정’에 든다는 말은 무념(無念) 즉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생각이 없으면 돌덩어리나 나무뭉터기 마냥 아무 감각도 없이 허공같이 된다는 말로 생각하기 쉽다
그 말이 그것도 어디까지나 생각입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는 생각으로 도저히 들어가 지지를 않습니다.
생각이 끊어지면 아무 생각이 없는 그런 무정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 흘러가는 그런 머트러운 생각이 없다는 말

머트러운 생각이 없을 때, 내 본래 참으로 흐림이 없는 본바탕인 마음의 고향이 있고,
일어나는 생각을 쉴 때는 본바탕의 빛이 비치고 있다
아주 생각이 없이 무슨 허공처럼 무정 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희로애락을 느끼는 이상의 위대한 빛이 흐르고 아주 밝고 밝은 꺼지지 않는
참으로 불생불멸하는 자기의 본바탕을 본다
이렇듯 자기 마음만 깨쳐버리면 그만입니다. 그 마음 깨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웃기면 웃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우리의 주인공은 누구도 평등해서 어디서나 성불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실처럼 불자란 아름다운 이름이고,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아름다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잠깐 더 부언하면 송아지나 말이나 개도 오식(五識)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귀로 듣는, 코로 냄새 맡는, 입으로 맛보는, 몸뚱이로 촉감을 느끼는 이런 다섯 가지
알음알이는 짐승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안이 비설 신(眼耳鼻舌身), 오근이 하자고 하는 대로
감정 따라 산다면 그것은 짐승도 다 하는 일입니다.
다만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오식에 더해 의식이라는 육식(六識)이 있어서 나 자신을 바로 알려고 애를
쓰는 것, 불자라고 하면 이러한 육식을 뛰어넘어 제7 말나식을 길들여서, 제8 아뢰야식, 즉 내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내 인생의 그림을 그립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내 마음 화선지에 내 일평생 그려온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각자가 한 번
돌아보십시오. 그런데도 잘 살려고 애를 쓰면서도 번뇌 망상이 하자는 대로 감정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느라고 보낸 시간이 더 많지, 내 마음 농사짓고 내 부처의 양식을 보태는 시간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서 사람 몸 받기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아버지 정충과 어머니 난자가 만날 때 2억대 1의 경쟁을 뚫고 단 한 생명만이 어머니 난자를 따라서
자궁 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났으니,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시험보다도 사람 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
현대 과학이 알아낸 논리입니다. 그토록 어렵게 사람 몸을 받아서 여러분이 과연 눈 감고 죽을 때
내가 한평생 걸어온 발자국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다면, 6식과 7식과 8식을 넘어선 삶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고 감정, 번뇌, 망상이 하자는 대로 운명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았다면,
눈 감을 때 정말 천추의 한이 맺힐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내 잠들어 있는 마음의 영혼을 깨우고,
일어나 설치고 돌아다니는 번뇌를 잠재워봅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 망상을 움직이는 감정의 세계가 붙을 수 없는 자리, 즉 식이라는 이름이 끊어져버린 제9 백정식(百淨識)에 우리 자신을 회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