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 가면 신발 벗어놓는 댓돌 위에 조고각하라고 쓰인 주련 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밑을 살피라’는 뜻이지요.
신발을 잘 벗어 놓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금, 자기의 존재를 살펴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스스로 살펴보라는 법문입니다.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당나라 때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이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일찌감치 온갖 경전에 통달한 분이라고 해요. 하지만 많이 아는 것이 말재주나 늘릴 뿐 마음을 깨치는 데는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승을 찾아다닙니다. 여기저기 다니다 마조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 선지식을 만나니 평소 늘 의문인 것을 묻습니다. “입만 벌리면 부처가 어떻고 보살이 어떻고 하는데 도대체 부처가 뭡니까?” 하고. 아주 간절한 물음. 마조스님은 “네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답해요. ‘부처를 묻는 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거예요. 즉심즉불(卽心卽佛), 심즉불(心卽佛)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답에 법상스님은 그동안의 의문이 다 풀리고 크게 깨닫는다.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지녀야 되겠습니까?” “그대 스스로 잘 보호해 가져라.” 법상스님은 그 길로 곡식과 채소 종자를 구해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승의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법력의 위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금강경 법화경 등등 많은 경전이 있고, 다 좋은 말이지만 모두 다가 마음에 와닿는 것은 아니지요. 수많은 경전 말씀 중에서 한 두 마디라도 마음에 닿아서 나에게 깨우침을 준다면 그것은 평생 나의 정신적인 양식이 될 수 있어요. 경전을 독송할 때 우리가 꼭 유념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겁니다. ‘여기서 평생 내가 먹고 쓰고 활용할 수 있고, 남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을 얻게 하여지이다 ‘는 염원으로 경전을 독송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른 독경법입니다.
대매산으로 들어간 법상스님은 조그만 초막을 짓고 살면서 좌선을 열심히 합니다.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것이 있는가 하겠지만 바로 알았기에 참으로 닦을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유의하십시오. 닦을 수(修) 행할 행(行), 수행(修行). 닦는 행은 일시적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깨닫는 것은 어느 한순간의 일이지만 닦음은 지속해야 할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고, 닦지 않으면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거울이 본래 밝은 바탕을 지니고 있지만 가만히 놔두면 더러워지듯이 우리 마음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법상스님은 잣나무 열매를 먹고, 연잎으로 옷을 해 입고, 8치(24cm) 높이의 쇠로 만든 소탑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참선에 정진합니다. 졸지 않고 늘 깨어있기 위해,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기 위해서지요. 그렇게 40여 년이 지났습니다.
한 자리에서 40년을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저력입니다. 요즘 수행자들 중에는 한두 철 하다가 소식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이렇게 한 집에서 몇 대가 계속해서 살았어요. 요새는 이런 저력이 없어요. 조금만 불편하면 떠나요. 한 터에서 오래 살아야 그 터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 덕(德), 기상을 받을 수가 있어요. 내가 받아들이는 거지요. 자연이라는 것은 그러한 기상과 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도량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바로 그 수행자가 그곳 자연처럼 살게 됩니다.
조주, 백장, 임제... 위대한 선지식들은, 그들이 살던 지명(地名)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땅이 지니고 있는 덕, 기운을 다 받아들인 것이니 그 지역 이름이 곧 그 곳에서 수행한 스님의 이름이 된 겁니다.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산길을 못 찾고 헤매다 법상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머리는 산발이고 풀옷을 입은 스님을 보고 그 젊은 스님은 “대체 이 산에 들어와 산지 얼마나 됐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산빛이 푸르러졌다가 누레졌다가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선방 다닐 때만 해도 선방에 달력이 없었습니다. 달력이 귀하기도 했지만 원래 선방에는 달력을 두지 않아요. 수행자는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오로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지난 세월에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을 내려간 젊은 스님은 자기 스승에게 겪었던 일을 얘기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40여 년 전, 마조 회상에서 법상스님과 같이 공부한 염관스님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바로 40여 년 전 ‘즉심즉불’ 법문을 듣고 종적을 감춘 법상스님이 틀림없어요. 하여 다시 제자를 산으로 올려 보냈지만 법상스님은 더욱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조스님도 제자를 보내 법상스님을 찾아 질문을 던집니다. “이전에 마조스님을 만나 무슨 도리를 얻었기에 이 산중에 숨어서 사십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 했기 때문이네.” 제자가 “(마조)선사는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법상스님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놈의 늙은이, 사람을 홀리고 있다. 비심비불이라고 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오직 즉심즉불이다. “ 이 말을 전해 들은 마조스님은 감탄을 합니다.
“매실이 다 익었구나!”
마음이 부처라는 확신, 이 확신이 늘 그의 삶을 새롭게 이끌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런 확신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에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가도, 누가 “참선보다 염불이 낫다더라”, “염불보다 참선이 빠르다더라” 이러면 마음이 흔들리고, 자신이 하고 있던 수행방법을 바꿔버려요. 관세음보살 기도하고 있다가도 지장보살이 더 영험 있다고 하면 얼른 바꿔버리고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렇습니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이리저리 쏠리게 마련입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예요. 그 화두 치워, 이걸 해야 돼하면 기존에 들던 화두를 버리고 새것을 합니다. 새 화두를 든다고 오래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맨날 그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문젭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 우리가 처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 입문한 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부처를 다른 데에서 찾고 있어요. 마음 밖에서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마음은 내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내적인 체험이 없으면 관념밖에 안 됩니다. 확고한 믿음이 내적인 체험을 통할 때 공덕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단지 믿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안으로 자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팎으로 하나가 되지요.
법상스님은 88살로 입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였습니다. 사람을 피해 40년이나 숨어살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열매는 제대로 익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지 익기 전에는 열매의 구실을 할 수 없어요. 수행자는 때로는 높은 봉우리에 우뚝 설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닷물에 잠기기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사람을 피해 살던 법상스님이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거예요.
선지식을 찾아 밖으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마음과 몸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미 굳어져 생명력을 잃은 관념적인 화두를 붙들고 허송세월해서는 안됩니다. 활구(活句)가 아닌, 죽은 화두로는 진정한 참선을 할 수 없습니다. 관념화된 것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입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까이서 늘 마주치는 이웃, 하루에 몇 번씩 부닥치는 상황,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화두가 될 수 있습니다. 선방에서 ‘이 뭣고’하는 것만이 화두가 아닙니다. 말 화(話) 머리, 두(頭). 말의 행위가 끝난 언어도단의 경지,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의문을 화두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다 화두가 있게 마련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만나는 이웃, 이런 것들을 화두로 삼을 때 비로소 산(生) 화두가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자비심이야말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산 화두입니다. 자비심이 곧 부처고 보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보리심과 자비심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바로 나의 스승입니다.
스승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됐건 물건이 됐건, 나무가 됐건 꽃이 됐건, 우리에게 자비심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스승이고 선지식입니다, 한눈 팔지 않고 깨어 있으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선지식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밖에서도 찾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으세요. 그래서 자신이 서있는 곳을 살피라는 겁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 발밑을 살펴보란 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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