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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모든 문제의 발단은 ‘나’

 

살기 위해 불교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죽으려고 해야 됩니다. 죽을 사람은 절에 발을 들여놓고, 살고 싶은 사람은 절에 발을 들여놔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가르치며) 요거 없애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데도 ‘나’라고 고집하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불교인의 자격이 부여됩니다.

여러분은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합니까. 절이라는 공간은 부처님께 절을 하거나 불공하거나 제사지내거나 기도하기 위해서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응어리를 없애기 위해 와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응어리가 있을 때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사회가 화합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릴 때 여러 분의 가슴에 응어리가 남아있으면 결단코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팔만대장경은 이 나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가족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집착이 없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위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 나옵니다. 오온(五蘊)이 공(空)한 이치를 투철하게 이해하고 실천에 옮겨 내 일상에서 오온의 생활을 해야 되지만 대부분 불자들은 이들 중 하나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자식, 내 남편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붙어있는 한 비록 내 육체의 옷을 벗더라도 집착은 자식에게서 남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가까이 있다고 후손에게 좋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집착은 괴로움이고 그 괴로움은 자손들로 하여금 또다른 괴로움을 낳도록 합니다. 바로 빛깔도 냄새도 모양도 없는 여기에 ‘나’라는 점을 찍음으로써 이런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 눈의 세계에 걸리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푸는 것을 일컫습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도 없는 게 아무런 집착 없이 떠나버리는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는 물에 뜬 거품과 같은 것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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