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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마음 작용의 양면!!!



지금 내가 쓰다듬고 있는 이 강아지는 엄연한 실물이 아니라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아무래도 이 점을 수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다른 실례에 의하면, 그 같은 주장을 전혀 터무니없다고 일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은 불교의 마음 철학, 특히 유식학을 성립시키는 체험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이 속담을 “뱀 보고 놀란 가슴, 새끼줄 보고 놀란다.”라고 바꾸면, 그 취가 달라지지 않으면서 더욱 실감 날 것이다. 만약 새끼줄을 밟은 상태에서 뱀인 줄 알고 놀랐다면, 이 체험에서는 발바닥으로 전달되는 감촉까지도 분명히 뱀과 같은 것이었다. 손으로 느끼는 감촉이라는 직접적인 체험으로 강아지가 마음 밖의 실물로 존재한다고 알듯이, 새끼줄을 밟은 그 경우에도 발바닥으로 느끼는 감촉이라는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 발밑에 뱀이 실제로 있다고 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많이 들어 봤던 어른들의 도깨비 이야기가, 으슥한 시골길이나 어두운 밤거리를 일상으로 겪어 보지 못한 요즘의 어린이들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절의 어린들에게는 어두운 밤이 도깨비의 무대였다. 그래서 간밤에 도깨비를 만나 씨름으로 물리치고 나서, 아침에 그 자리에 가보니 피 묻은 빗자루가 있더라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한동안은 지어낸 이야기로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버려진 빗자루를 보면, 거기에 피가 묻었는지를 살펴보곤 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속담을 조금 확대해서 적용한다면, 그 도깨비 이야기도 어느 누군가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의 경우에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물리치지 못할 생생한 체험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사찰이 전혀 없는 섬에서 지냈으므로 불상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다만 형의 책에서 선명하지도 않는 천연색 사진으로만 반가사유상을 보았을 뿐인데, 불량한 인쇄 상태 때문인지 검푸르고 비쩍 마른 옆모습이 내겐 어른들이 말하는 도깨비인 양 생각되었다. 어쨌든 그 모습이 나에게 무서움증을 초래하여, 그 책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장면을 피해 가곤 하였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어느 날 밤, 등잔불도 켜지 않은 채 야박한 형들에 의해 맨 뒤쪽으로 내몰려, 등 뒤의 창호지 문으로 귀신이라도 들어 올까봐 무서워하며 부모님이 돌아오는 기척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부모님의 말소리가 들리고 뒤쪽의 헛간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등불로 창문이 밝아졌음을 확실히 느끼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환해진 창문 전체에 무서워하던 반가사유상이 너무나 역력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진즉부터 거기에 있으면서 불빛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였다.
나의 이 체험은 너무나 생생하였지만, 나는 그것을 어린 시절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 모습이 다시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무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을 것임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도깨비나 귀신 이야기가 전혀 근거 없는 허구만은 아닐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견분과 상분
내 이야기의 초점은 도깨비나 귀신이 있을 수 있다는 데에 있지는 않다. 앞서 말한 속담이나 나의 경험을 우리가 지금 보거나 만지고 있는 대상들에게 적용하면, 그 대상들도 허깨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무작정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데에 초점이 있다. 더 정곡을 찔러 말하면,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외부의 대상들은 불명료한 상태로 마음속에 잠복되어 있는 것을 마음이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일상의 체험 중에서는 간혹 사실로 입증된다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이 사실을 간략히 “마음이 마음을 본다.”라고 표현한다.
나의 체험을 예로 들면, 창문에 비친 반가사유상은 분명히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그때 실물로서 외부에 있지는 않았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불빛이라는 조건을 맞아 내 마음이 본 것일 뿐이다. 나는 단지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서 헛것인 형상을 실체인 줄 알고 놀랐을 뿐이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라는 사실에는 마음이 양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즉 ‘보는’ 능동적인 작용과 ‘보여지는’ 수동적인 작용이다. 보이는 작용은 ‘보이는 것’이 이미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보는 작용은 그 보이는 것을 어떤 형상으로 현시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마음이 현시한 그것을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간주하며 살아간다.
유식학에서는 마음(識)의 그 양면을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앞의 예를 다시 꺼내어 대비해 보자.
창문에 비친 반가사유상, 혹은 발에 밟힌 순간에는 뱀이었던 새끼줄은 마음에 의해 보여진 것, 즉 상분이다. 다시 말해서 반가사유상이나 뱀은 진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과거의 어떤 경험에 의해 마음에 잠복되어 있던 형상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현시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와 같이 현시된 것을 객관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마음에 잠복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형상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사실은 보여졌다는 사태와 보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내포한다. 보는 자의 보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이 ‘보는 작용’이 바로 견분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주관이다. 상분은 견분 즉 주관에 의해 현시된 것이므로, 착각은 견분의 탓이다. 전에는 습관적으로 새끼줄이라는 상분을 떠올렸던 견분이 이번에는 그것을 뱀이라는 상분으로 떠올리는 사태를 우리는 흔히 착각이라고 표현한다.
위의 사실을 간략히 말하면, 상분이란 인식되는 대상이고, 견분이란 인식하는 마음이다. 유식학의 다른 용어로는 견분과 상분을 각각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라고도 구분한다. 그러나 견분과 상분을 별개의 구조로 간주할 수는 없다.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이 모두 마음(유식학의 용어로는 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견분과 상분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완전히 동일한 구조를 지닌 마음 작용이며, 마치 하나는 다른 것에 대해 그림자와 같다고 설명된다.
우리는 이처럼 견분과 상분이라는 마음 작용, 즉 인식 작용에 의해 어떤 대상이 있다고 안다. 그리고 이 결과, 그 대상의 내용, 즉 그 크기나 양이나 모양 등을 알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마음은 견분과 상분 외에 또 다른 기능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대상이 어떠하다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견분과 상분을 이해하는 마음이 작용함으로써 비로소 대상에 대한 인식의 결과가 성립하게 된다.
좀 더 상식적인 예를 들어보자. 넓이를 측량해야 할 토지가 있다고 하자. 여기서 토지는 상분이고, 토지를 측량하는 척도는 견분이다. 알려지는 대상으로서 토지(상분)가 있고, 아는 수단으로써 척도(견분)가 있다면, 이제 그 토지의 넓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넓이를 아는 마음을 유식학에서는 자증분(自證分)이라고 한다.
결국 마음은 견분과 상분과 자증분이라는 세 가지로 기능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 자증분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결과를 성립시키는 것이고, 마음의 세 가지 구분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마음의 본체로 간주되어 자체분(自體分)이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견분과 상분도 이 자체분이 변화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후대의 유식학에서는 위와 같은 마음의 세 가지 영역 외에, 자증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영역을 고려하여, 그것을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소위 4 분설이 확립된 것이다. 이 4 분설에 의하면 견분은 상분을 알고, 자증분은 견분 및 증자증분을 알며,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안다고 한다.
마음 작용의 영역으로서 견분과 상분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터에, 증자증분이라는 영역까지 당장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럴 만한 필요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된다.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 네 가지 영역을 우선 이해하기로는 꿈을 예로 드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꿈의 내용이 너무나 실감 나면 현실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잠에서 깨어나고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현실과 구분되지 않던 꿈을 꿈이라고 알게 되는 것을 자증분이라는 마음 영역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꿈의 연구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꿈이란 욕망의 실현이다.” 또는 “꿈속에서는 전혀 뜻밖의 이미지 뒤에도 언제나 어떤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아무리 엉뚱한 내용의 꿈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과거의 경험이 끌려 나온 것이다. 인도 철학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은 잠재의식으로 존속하는 기억의 일부가 장애 없이 이끌려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꿈 자체는 잠재의식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잠재의식이 곧 상분이고, 그 내용을 현실인 거처럼 보고 있는 것이 견분이다.
간혹 어설픈 꿈에서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가 있다. 꿈속에서도 그 꿈꾸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꿈속에서 견분과 상분과 자증분이 함께 이루어진다. 즉 꿈속에서 그것이 꿈이라고 아는 것이 자증분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꿈에서 깨어날 때 “나는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 알고 있었다.”라고 확인된다. 이 확인이 곧 증자증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증자증분은 어떻게 확인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텐데, 이 경우에는 더 확대하지 않고, 자증분에 의해서 증자증분이 확인된다고 한다. 자증분은 마음의 본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앞의 예를 적용하면, 꿈에서 깨어나서 “나는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 알고 있었다.”라고 아는 증자증분은 자증분에 의해 최종적으로 사실이라고 확인되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마음이 마음을 본다.”라는 사실이 성립되는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마음의 작용 영역을 위와 같은 네 가지로까지 고찰하였다.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을지라도, “마음이 마음을 본다.”라는 사실을 일부의 경험으로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모든 대상에 대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전적으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사실의 적용을 확대하면 할수록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범위가 확대된다는 긍정적인 가치는 결코 부정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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