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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곳간

본래 무엇이 문제인가!

 

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떻게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식적 조작일 뿐이고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함과 하지 않음이라는 두 경계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나누어 취하고 버리고 하는 것은 분별하는 의식일 뿐 선은 아니다. 이러한 분별하는 의식은 허망하게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망상이라고 부른다. 

선(禪)은 확고부동하고 불변하는 자리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경계가 닦치더라도 흔들리거나 휘말리지 않고 늘 여여부동할 수 있는 것이 선이다. 

확고부동하고 불변한 자리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 어떠한 의식적 경계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일러 허공에 머문다고 하고,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낸다고도 한다.

어떤 경계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인가? 다가오는 경계의 본성을 빠짐 없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성자리에 머물게 되면 안팎의 모든 경계가 본성 아닌 것이 없어서 흔들림이 없게 된다. 겉보기에 아무리 다양하고 새로운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몽조리 본성 아님이 없으니 그 경계에 딸려가서 미혹에 빠지는 일은 없다. 본성자리에 있으면 경계의 다양한 모양은 사라져 버리고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본성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본성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본성은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얻거나 잃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모든 경계는 본성에 의하여 본성은 위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은 다양한 경계의 모양에 오염되지 않고 늘 신선하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이 본성만 확인하면 온갖 다양한 경계속에서도 늘 여여부동하고 담담할 수가 있디. 

본성이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데도 왜 우리는 늘 여여하고 담담하지 못하고 매순간 다가오는 경계에 따라 바람에 흔들리는 풀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가? 그것은 스스로의 본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왜 확고한 믿음이 없는가? 본성을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성을 확인하지 못하는가? 분별심으로 망상을 만들어 내어 여러 가지로 조작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생각(망상)만 쉬면 본성은 늘 변함 없이 맑고 청정하여서 본래 나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본성은 확인하지 이유는 우리가 어리 적부터 익혀온 각인된 습관에 따라 늘 경계 위에서 경계의 모양으로 확인하는 것 밖에 달리 확인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평소에도 보지 못하는 본성이라는 모양을 확인하려고, 이른바 수행한다고 하는 조작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를 하든 하지 않든, 앉아 있든 누위 있든, 눈을 감고 있든 떠고 있든, 말을 하든 하지 않든, 본성은 하등의 차이도 없다.

수행이라는 이름의 조작된 행위는 오히려 이러한 변함 없는 본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위험이 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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