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곳에 되놓으면 일어났다. 소멸되기 마련 둘 아니게 진실히 믿고 믿는 마음으로 채찍질해야 자생 중생 스스로 제도 하나도 걸림 없이 살 수 있는데 자기가 긁어서 고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 애고·병고 만들어 내면에다 놓고 들어가야 정(定)에 들어 진실하게 믿고 어떠한 문제든 타파해 나갈 수 있는 능력 길러야 이렇게 더운데도 불구하고 한자리를 또 하게 됐습니다.
물론 세상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걸 보면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한치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같이 돌아가고 살고 있지만 모습은 다 각각인 것처럼 만났다고 하고 또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항상 말씀드리지마는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아들이 됐다가 이렇게 순간순간 바뀌면서 돌아가듯 , 우리가 헤어졌다 만나고 만났다 헤어지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도리입니다. 둘이 아니면서도 항상 둘로 나누어졌다가 또 하나로 뭉치고 이렇게 계속 작업이 되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다는 사실을 불가부득 알아야만 하겠죠. 물론 그 말을 또 하자면은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말을 해야 하니깐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체 생명을 막론하고 물주머니에서 나와서 물주머니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소리를 들으면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지만, 이런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생각해 볼 점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마음의 진로를 넓히고 좁히는 데에 대해서 작용을 할 테니까
우리가 간단히 생각한다면 덥고 바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야 되는지 잘 생각해 보셔야 될 겁니다. 우리는 지금 한 치를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증명하건대 우리가 공기 없는 데서 한 발짝을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도리를 알고 배우고 증득해서 그 어항 속을 벗어나야만 자유로운 삶음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에는 텔레비전을 보고 듣는 것도 너무 많고, 보는 것도 너무 많아서 모두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이 공부하기에는 상당히 어렵다고 봅니다. 좀 모르는 듯하고 어리석은 듯해야, 옛날에는 선지식들이 화두를 주면 그냥 무지막지하게 밀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화두선(話頭禪)이 맞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는 게 많기 때문에 그렇게 들고 있으면서, 얼른 쉽게 말해서 물질로 치닫는가 하면 형상으로 치닫고, 형상으로 치닫는가 하면은 정신세계는 무시하고 돌아가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세상은 어디 그렇습니까? 만물만생은 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또 우리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을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통신으로 전달하면서 우리가 살아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도리를 이 하나도 몰라요. 그저 시급한 대로 불끈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그냥 말해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찢어먹고 갈갈이 뜯어먹는 경향이 그런 데서 벌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도 걸림이 없이 돌 위에 세워놔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긁어서 고(苦)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애고(哀苦)를 만들고 , 자기가 긁어서 모든 병고를 만들고 이럽니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대(四大) 육신이 한데 합해서 이 세상에 나와 가지고 또, 지수화풍으로 뭉쳤다고 본다면 지수화풍을 먹고 지수화풍을 또 내놓습니다. 먹는 대로 내놓습니다. 그럼 내놓는 것 가지고 어떻게 활용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증발이 되고 모두 화(化)해서 일체 만물만 생에게 도로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전달한 까닭에 다시 또 먹습니다. 그러니 내놓으면 먹게 되고, 먹게 되면 내놓는 작업이 계속되는 거죠. 우리가 이 도리를 상세히 알아야지, 부처님 법이다 해서 절에 가서 목탁 치는 것만 불교가 아니다는 얘깁니다. 불교라는 것이 전체 삼라만상 하는 거는 과거에 살던 것, 미래로 인해서 오늘 현실에 오는 것을 말합니다. 삼세(三世)라고 그러죠. 삼심(三心)이라고 그럽니다. 그러고 또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굴러오면서 교차하면서 살아 나온 자기가 인과 업이, 선하게 행을 했다면 선행의 업이 있을 거고 악행의 업이 있다면 악행의 업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우리들 몸속에 다 있다. 구성돼 있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여러분한테 구성된 그 구성팀들을 교화를 시키는데 여러분 마음의 채찍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위로는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일체 체불과 둘 아닌 마음으로 진실이 믿고, 아래로는 믿는 마음으로서 채찍질을 한다면 내 몸속의 중생들은 스스로서 제도가 된다는 뜻.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도 그런 뜻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부처가 되느냐 중생으로 그냥 남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내 마음은, 즉 말하자면은 깨닫는다고 합시다.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거를 돈오(頓悟)라고 한다면 자생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점수(漸修)가 또 들어갑니다. 나를 깨우치는 거는 쉬워도 둘 아닌 도리와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포착하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자생 중생들이 내가 바깥으로 끄달리는 것을 모릅니다. 안으로 놓고 들어가야 통신이 돼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제도가 되는데, 바깥으로 끄달리면 절대로 통신이 되질 않아서 제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에서 제도가 못 되는데 어찌 내가 제도가 되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죠. 정(定)에 들어야 한다, 이 뜻이 뭐냐? 그냥 정에 들라 하면은 아무 생각 없이 틀고 앉으면 정에 드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양면을 다 작용하면서, 지금 우리가 내면에다 놓고 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정에 드는 방법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그 묘법과 묘용(妙用)과 광대무변한 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으로 화(化)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전 세계에서 알면은 좋겠는데, 가만히 보면은 전부 타의에다 기도하고 상대에다 빌고 기도하고 잘되게 해달라고 하지, 자생 중생을 제도하면서 자기를 자기가 채찍질하면서 완성을 하는 데에 노력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아주 적어요 한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도리를 취하고 있어요. 우리가 죽으면 고만 이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어차피 이렇게 난 거 아무렇게나 하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살면 되는 거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옷을 입었다가 더러우면 벗어버리고 다시 새 옷을 입습니다. 안 그럽니까? 그런데 몸도 젊어서 병들든 늙어서 병들든 옷이 다하면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게 돼있습니다. 새 옷만 입을 뿐이지, 즉 말하자면 싹만 없어졌다 뿐이지 뿌리는 그대로 남아있다.
봄이 오면 새 풀이 또 다시 나듯이. 그 뿌리가 죽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불씨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 생이 다 그러하며 저 별 성이나 혹성도 다 그렇습니다. 수명이 짧고 길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으면 고만이라는 소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죠. 우리 육체 자체도 실상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옷이 세련되고 아주 좋은 옷으로 입느냐, 또 나같이 이렇게 못나게 옷을 입느냐, 하하하, 그렇지 않으면 짐승의 탈로 옷을 입느냐, 독사의 옷을 입느냐, 여러 가지 옷이 많고 많은데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주어지거든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경험대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와 같이 우리도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가난하고 부자로 살고 이래 서가 아니고, 없든 있든 자기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어떠한 행을 하고, 어떻게 말을 하고, 상대성 원리로써 폭넓게 살았느냐 폭넓지 못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가 자기가 산 대로 심은 대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렇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애당초에 불(佛)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불로 하여금 우리는 바로 생산처를 개발하게 됐고, 교(敎)라는 자체는 바로 우리가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고, 말과 말로 전달하고, 통신으로 전달하면서 나가는 그 자체, 개미들도 자기네들 말을 하고 속삭거립니다. 개미뿐만 아닙니다. 개미도 약은 것들은 굴에서 흙을 파 가지고 나와서 앞턱에다가 탁탁 놓습니다. 좀 듬직하고 앞을 내다보고 사는 사람같이 개미도 앞을 내다보고 앞에다 놓지 않고 쓱 나와서 멀찌감치 놓고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그렇게 아주 능수능란하게, 지혜롭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모두가 똑같이 진실하게 살지 그러냐? 그건 마음 탓입니다. 앞뒤를 생각 안 하고, 그러나 앞뒤를 들어봤어야 알지, 앞뒤를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깐 먹어봐야 알고, 마셔봐야 맛을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종교라고 하기 이전에 생활이 종교라는 겁니다. 우리 생활이 종교니까 그대로 넓히고 못생긴 사람이든지 낮은 사람이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간에, 아이의 말이라 해도 올바른 말을 하면 귀담아듣고 흘리지 말아라 하는 거죠. 사람만 스승이 아니라 일체 만물만 생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 나무들도 봄이 되면 피어났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고 단풍이 들면 떨어집니다. 떨어져서 겨울 내내 하얀 눈과 비를 다 맞고, 비바람에도 조금도 끄떡없이 인내하면서 봄을 기다리는 거를 보면 마음을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참는 게 있고 기다리는 게 있고 여유가 있어야지 빛을 보고 화목을 가져올 수 있고 복을 받을 수가 있지, 인내가 없이 불끈불끈 그냥 화가 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거는 포근한 화목을 가져올 수도 없거니와 또는 재물을 늘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물도 생각이 있거든요. 들어오려고 까딱까딱하는데 그 집이 시끄러우면 ‘에이! 이 집에 들어가봤자야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고 귀찮다!’ 그러곤 딴 데로 가요. 만물이 다 그러해서 스승 아닌 게 없다. 나무를 봐도 스승이요, 풀 한 포기를 봐도 스승이요, 물 흘러가는 걸 봐도 스승이요, 집들을 올망졸망 짓고 사는 것도 스승이요, 비가 오는 것도 스승이요, 비가 안 오는 것도 스승이요, 모두가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그걸 보고 모두 배우라고 하는 게 팔만대장경 아닙니까? 팔만대장경에만 쓰여있는 게 아니라 우리 눈으로 듣고 보고 같이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가는 자체가 팔만대장경이요, 모두가 스승입니다.
그러니 번뇌,망상을 칼로 끊듯이 끊는다면 끊어집니까? 그 도리를 물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없이! ‘내가 흘러가는 것을 너희들이 아무리 잘라 봐라. 내가 잘라지나!’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공생(共生)으로서 돌아간다는 자체를 알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서 돌아간다는 걸 알면은 번뇌, 망상이라고 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끊으려고 하지 말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인연이 돼서 내 몸속에 있으니, 즉 말하자면은 숙명 통이라고 합니다마는, 숙명 통 하면은 다섯 가지가 한데 합쳐진 컴퓨터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동적인 컴퓨터가 다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 컴퓨터에 입력이 된 대로 지금 현실에 자꾸 나오는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면, 그 망상을 끊기보다는 나오는 데다 돼 입력을 시키면은 앞서의 입력된 거는 없어지지 않나, 이게 하나로 돌아가지 않나 이겁니다.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 없어지는 것도 아닌, 즉 말하자면 일어났다가 꺼지는 거죠. 그런데 이거는 끊으려고 애를 쓰고 잠을 몰아내려고 애쓰니 잠이 몰아내지며 망상이 끊어지는 겁니까?
그래서 물은 나처럼 살라 하고 저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산천초목은 초목대로 나같이 살라 하고 저렇게 푸르게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에 어떻게 해야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며, 항상 얘기하지만 마음으로 인해서 오는 병고가, 즉 말하자면 세균성·업보 성·영계성·인과성·유전성 이 자체가 전부 마음으로 인해서 오는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 전자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온다 하더라도 지금 그렇게 오는 거를 오히려 재료로 알고 몽땅 집어넣어 다시 입력을 한다면, ‘너만이 해결할 수 있고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하고 또 놓고 가야 한다는 겁니다. 나무뿌리가 말입니다. 제 뿌리가 제 나무를 돕지 , 딴 뿌리가 내 나무의 뿌리를 돕는 게 아니죠? 그러기 때문에 기복으로 만날 딴 나무뿌리에다가 빌어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나 지금 수분이 적어.’ 한다면 자기 뿌리가 수분을 흡수해서 올리지만, 딴 나무의 뿌리가 목을 축이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빌지 말아라, 상대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궁색하게 노예가 되지 말아라, 지금 노예 노릇을 하면 세세생생에 노예가 된다 , 내 뿌리에서 나온 싹이니까 내 뿌리를 믿고, 너만이 이 병통을 고칠 수가 있다고 맡기라는 겁니다. 인간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그리고 나무도 자기 뿌리를 못 봅니다. 인간도 자기 뿌리를 못 보듯이 나무도 흙이 덮여서 자기 뿌리를 못 봅니다. 인간은 무명이 덮여서 못 본다 이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뜻풀이 해놓은 것은,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하려면은 전부 개선을 해서 뒤집어 놔야겠다 해서 한 겁니다. 부처님 당대에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훗날 경전이 수없이 나오다 보니까, 편집을 하다 보니까 그냥 기복으로 자꾸자꾸 글자 풀이만 해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그 뜻을 알고 좁혀 들어간다면, 금강경을 봐도 납득이 좀 될 겁니다.
“여래의 몸이 있다고 하겠느냐? 크다고 하겠느냐? 했다고 하겠느냐?” 이런 말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말들도 우리가 이러한 자리에서 서로 대화를 안 하면 납득을 못 하죠. 어떻게 납득을 합니까? 만날 글자 풀이만 하다가 볼일을 못 보죠. 나는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길을 걷다가도 야, 이 광대무변하고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말로는 알게 할 수 없는 이 도리를 쉽게, 말로 입을 뗄 수가 없는 광대한 법을, 또 말로는 어떻게 떼어서 가르칠 수가 없는 거를 어떻게 책에다 쓰고 어떻게 말로 하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항상 여러분한테 왕창 그냥 한꺼번에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관계상 길을 가다가도 고개가 푹 떨어집니다. 고개가 푹 떨어지는 것은 ‘내가 너무 부족하구나!’ 부족해서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아요. 껄껄 웃다가도 말입니다. 웃음이 그냥 휙 들어갈 때가 있거든요. 여러분 한분 한 분을 생각하고 일체 생명들이 모두 공용을 하고 공생으로 돌아갈 때에 모든 거를, 가만히 생각한다면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그 도리를 다 이해를 시킬 수 있는가? 이해를 시킬 수 없는 자체가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을 웃다가도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가?’ 하고 그냥 멈칫해서 돌아가고, 걸음을 걷다가도’ 부족한 네가 이렇게 싱그럽게 웃을 수 있을까. 싱그러운 마음으로써 즐거운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쯧!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은 아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나? 그릇대로 담아줄 수밖에 없는 것이지 낸들 어떻게 하나? ’ 그러고서는 옆도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엎드려 고선 생각을 하면서 가다 보면은 돌부리에 채이기도 하고요 , 이럴 때가 많이 있죠. 검을 만드는 사람이 혼을 다 불어넣어서 진실하게 하지 않으면은 신검을 만들지 못하듯이,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여러분한테 이익이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한테 이익을 줬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익이 없죠. 알고 본다면 그저 부처님 앞에 가서 빌어도 나를 위해서지 딴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죠. 결국은 자기 위해서 비는 거지 그 상대를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죠. 내가 보기가 안 됐고 내가 살기가 어지럽고 내가 당장 좋지 못하니깐 비는 거죠. 그렇듯이 식구가 열 명이라 해도 가설이 다 돼있습니다.
이건 한 집안에 불을 켤 수 있게끔 가설이 되어 있어요. 가설이 다 돼있으니까 불을 켜야죠. 그러니깐 바깥으로 불을 켜려고 앨 쓰지 말고, 불은 안 들어와요. 스위치가 눌러지지 않으니까요 . 통신이 되지 않으니까요. 주인공은 바로 불씨와 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불씨와 그 불씨로 인해서 마음을 내는 게 있죠. 마음을 내면은 육신이 움죽거리죠. 삼합이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을 못 믿는 건 바로 자기를 못 믿는 게 되니 ,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모든 게 벌어지고 아는 거지 자기가 없이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있기 때문에 식구들도 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생활도 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종교도 있는 거지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내 주먹만 믿으라는데 거길 가면 뭘 해?’ 이러지만요, 그것도 아니에요. 내 주먹만 믿으랜다고 해서 교과서만 가지고 있고 학교에 가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죠.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합류 화가 될 수가 없죠. 지혜가 넓어질 수도 없고요.
저의 블러그에 그냥 무시로 들락거리지 말고 마음공부하도록 법문을 올려놓은 것이니,
마음으로 읽고 가슴에 담아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무 석가 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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