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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선정삼매

 

지혜와 고요함은 다르지 않은 거 같다.

욕심 없음, 즉 분별하여 집착함이 없는 마음냄이 지혜이다. 다시 말해 지혜로움은 욕심내지 않는 평화로운 마음이고, 욕심 없는 상태가 고요함(선정)이다. 스스로를 볼 때 분별집착 없이 고요한 적이 있는가를 살펴본다. 행동이 태산 같지 못하고 말이 앵무새 처럼 산란한 것을 보니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지혜롭지 못한 것이니 참회하고 다시 또 시작한다.

주객이 분리된 상태에서 ‘알려진’ 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이고 지성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한들,
그것은 개념에 불과할 뿐 살아있는 구체적 사실로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세존께서도 처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주객으로 분리한 채 물으시다가, 마침내 주객이 일치한 상태[中道]에 이르러 자기의 참모습과 진리를 보게 되었다고 경전에 서술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며, 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이든 멈추어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 어떤 실체도 없다. 이 사실을 체득하는 일이 곧 선(禪)”이라는 게 새 존의 가르침이다. 선은 구체적인 ‘그것’과 마주 하는 일이고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성과 지식을 부정하고, 인위적인 어떠한 이물질도 거부함으로써 세계를 불이(不二)로 인식하고체득하는 게 선이기 때문 지성의 작용이 멈추어진무심(無心)에서 시작하여 무심에 머물고, 무심으로 모든 본질을 체득하는 것. 이러한 체득을 일컬어 깨달음이라고 한다. 더운 여름날 무심에서 자신을 마주해 볼 일 자연의 마음인 자연심(自然心), 있는 그대로의 마음인 평상심(平常心),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인 청정심(淸淨心)으로 돌아가 이 세가지 맛을 본 자만이산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서 산 노을빛을 봐도 넉넉하지 않을까 사유합니다.

모두가 禪 일행 삼매로 깨달음을 스스로 물을 마셔봐야 찬지 더운지 알듯이 깨달음이란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모든 외재하는 사물은 우리들 참모습의 그림자이며 모든 외적인 교리는 자성(自性)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메아리나 그림자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성을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무엇이 참된 자아인지 알게 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스트레스’에 의해 건강이 좀먹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과잉은 몸에 큰 변조(變調)를 가져온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율신경 실조증(自律神經 失調症)’이라고 부릅니다. 이 ‘스트레스’는 대부분 근대화의 산물로서 인위적으로는 예방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에 질려, 스트레스 해소를 단념한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트레스 해소에 참선(參禪)이 특효약이라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참선을 하면 우뇌를 활성화시키고 알파상태로 만듦과 동시에 도파민 등 각성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뇌를 안정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율신경도 강하게 작용해 뇌에서 분비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각종 호르몬을 대량 분비시켜 여러 가지 통증이나 성인병, 심인증(心因症)을 치료하는데 기여합니다. 선은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킵니다. 즉 선은 우리들 각자 속에 본래 자연적으로 구비돼 있는 모든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모든 정신 활동은 이제 열쇠로써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경험한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보다 더 평화로워져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환희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삶의 색조가 바뀔 것이다. 선 속에는 무엇인가 젊어지게 하는 것이 있어 봄날의 꽃들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며 계곡의 시냇물은 더 신선하고 맑게 보일 것이다.” 선 중에는 공안 즉 화두를 드는 선도 있고, 묵조하는 선도 있고, 염불 하는 선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자기에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됩니다. 즉 근기에 맞는 수행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보살님이 와서 제게, ‘어느 큰스님이 염불은 그저 하근기 중생이 한다’고 말했다며 이것이 맞는지 물었습니다.
이것은 ‘염불선’과 ‘염불’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염불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구하고
또 극락세계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선은 ‘자기 마음 본바탕이 바로 부처라’, ‘극락 또한 내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알고 하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 특별한 장소나 시간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장소는 될 수 있는 한 조용하고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좋습니다. 시간도 자기 생활 중 한가한 시간이면 좋고 저녁때나 새벽이면 좋습니다.
다만 참선을 하려면 자세가 안정돼야 합니다. 자세가 안정되면 다음은 호흡 조절[調息], 마음 안정[調心]의 순서로 진행합니다. 참선할 때는 ‘일상삼매(日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해야 합니다.

일상삼매란 ‘여묘포서(如猫捕鼠)’와 같습니다. 즉 고양이는 쥐를 사냥할 때 한눈팔지 않고 사력을 다해 쥐구멍을
노립니다. 고양이가 조금만 딴 생각을 하면 쥐 사냥은 실패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참선할 때도 ‘내가 부처요 천지가 부처’라는 마음을 한순간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이 거기에다 딱 마음을 안주시킨다는 것, 일행삼매는 ‘여계포란(如鷄捕卵)’과 같습니다. 마치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이 참선에 들라는 것입니다.
계란은 오래 품고 있어야 병아리가 됩니다. 함부로 퍼덕거리면 온도와 시간이 맞지 않아 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천지 우주를 부처로 보지는 못해도, 내가 부처요 천지가 부처라는 것을 항상 느껴야 합니다.
항상 느끼고 있으면 그 때 번뇌가 녹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삼매의 경지를 맛보지 못해 참선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본래 마음이라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은 자고 있을 때 외에 항상 무슨 일을 향해 움직이고 있거나, 듣거나, 웃거나,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하고 있습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을 선에서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또 옛날부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모두 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은 보행 즉 걷는 것을 뜻하고, ‘주’는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걸으나, 서나, 앉으나, 누우나 모두 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생활하는 24시간 내내 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늘 일상삼매 일행삼매 한다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재가자들이 시민선방에서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보기 좋은 일입니다. 공부는 지속돼야 하는데, 시민선방이라는 공간이 그 역할을 해 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중국 도연명은 화장실이나 마구간에서도 좋은 작품을 썼습니다. 시민선방에서 간화선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감수성을 자극해 주는 염불선도 좋습니다. 염불선은 지(知)와 정(情)과 의(意)를 모두 조화롭게 구하는 선법입니다.
재가자들이 수행할 때 ‘별시(別示) 수행’이 필요합니다. 별시 수행이란 대중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수행하다보면 자칫 게을러지고 외도로 빠질 수 있습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여럿이 함께 모여 수행을 해야 합니다. 대중이 곧 선지식이고 대중의 힘으로 정진하다 보면 올바른 수행습관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또 줄탁동시( 啄同時)라는 말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줄( )은 병아리가 부화되려 할 때 알 속에서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탁(啄)이란 어미가 알을 깨려고 껍질을 쪼는 것을 말합니다. 즉 스스로 깨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준다 해도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고승들이 참선할 때 뇌파를 측정해 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선은 뇌 전체를 이완시킴과 동시에
오른쪽 뇌를 활용하고, 또한 유산소 운동인 점에서 볼 때 심신의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바가 크다’라고 말입니다.
현대는 ‘아이디어’와 ‘감수성’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불가에서도 창의성이 없는 사람은 인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참선은 우리시대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참선은 유아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집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포교활동입니다.
불자는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 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만이 불도를 이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불도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 사상으로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성불합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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