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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법문!!!

다 내 안에 있다

나라·세계 살리는 힘도 내 안에 있어~아픈 사람 보고 마음 내는 것도 보살행~내 안에 보배 두고 왜 구걸하며 사는가,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좀 더 지혜를 넓히고, 마음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없이 돌아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불교다 하면 어렵게만 생각하시고 머리깎은 사람만 하는 공부인 줄 아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일체 세계, 우주 전체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불교죠. 살아있는 생명의 근본이 ‘불’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교’인 것입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아있어도 불교인데 네 종교 내 종교 따지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죠. 모두를 포함한 것이 바로 불교인데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마음의 폭이 넓어지고 또 한마음이라는 그 자체는 그냥 송두리째 진리로서 초월해서 돌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뚜렷하게 아시게 될 겁니다. 여러 가지를 두루 살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질문을 하십시오. 궁금한 게 있는데도 묻지를 않으면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중심이 잡히지 않아요. 물론 우리가 지금 배우는 것은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하는 것도 없는 걸 배우고 있지만 사람이 지혜를 넓히기 위해서는 내 의견만 고집하지 말고 남의 얘기도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스님들을 공부시킬 때 삼 년을 바릿대를 들려서 내보냈죠. 그 이유는 지혜를 넓히기 위해서였죠.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데라도 가서 부딪쳐 보고 그래서 요만한 것 하나도 진리 아님이 없음을 배우는 게 필요했던 것이죠.
지금은 빨리 살다가 빨리 죽는 세상인데 한철 살다가 가면서 이런 공부를 모르고 납득하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한다면 또 이 세상에 등장을 해야 돼요. 만약에 그것을 넘어선다면 등장을 안해도 되죠.

그렇게 광대하고 무변하지만 맛을 모르고 있으니 지금 공부해야 하는 일이 시급한 일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다고 바쁘게 하려고 애쓴다면 오히려 더딜 수가 있으니 급하게 생각지도 마시고 느리게 생각지도 마세요. 그것도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니까요. 수행자가 먹물 옷을 입은 뜻은 검지도 말고 희지도 말라 는 뜻 다시 말하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그 도리에서 너희는 벗어날 수 있느니라 해서 이것도 방편으로 이런 옷을 입게끔 됐어요. 머리를 깎으면 또 머리가 생기고 또 머리를 깎으면 또 머리가 생기고 이러는 건 무명초를 깎으면 무명초가 또 난다는 원리를 알라고 한 거죠. 끝없이 돌아가는 걸 말합니다. 진리가 그러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둘 아니게 봐라 하는 뜻을 살펴볼 때 ‘항상 둘 아니게 봐야 된다더라’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면 안되죠, 스스로 우러나야 되는 거죠. 내가 왜 이런 글을 올리는지 찾아온 각자가 잘 사유하여 너희들 것으로 만들어 가거라

담마의 감로수를 마셔 본 그는 행복한 마음으로 즐거이 살아간다. 지자는 언제 어디서나 깨달음에 머문다.
농부는 물길을, 전공은 화살을, 그리고 목수는 나무를 바루듯이 지자는 자기마음을 곧바로 다스린다.
산 위의 큰 바위가 바람을 이기듯이 지혜로운 사람도 평정을 지키나니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왜 깨달음을 문제 삼는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본받고 실현해야 할 궁극적 영원한 인간상인 부처님은 어떤 사람인가? 바로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이다. 보통 "꿈에서 깨어난 사람" "눈먼 상태에서 눈뜬 사람"으로 비유한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면 부처님이고 미혹하면 중생이라고 한다. 고통의 중생이냐 해탈의 부처이냐가 오로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깨달음이 최고의 가치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는다.(以悟法則)"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깨달음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희망의 길이다.

인생의 이상과 가치의 실현여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바로 깨달음임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불교집안에서 늘상 깨달음을 문제 삼고 그에 매달려 아옹다옹 해온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불교의 기본입장에서 볼 때 깨달음에 대한 관심과 논란의 빈곤이 이상하기도 하고 우려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더하여 깨달음이 현실과는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의 존재처럼 인식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깨달음이 지금 여기에서 전개되고 있는 순간 순간의 구체적인 삶과는 다른 특별한 무엇으로 취급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최고의 법칙으로 삼는 깨달음의 문제를 일상적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깨달음의 문제를 현재의 삶과 통일될 수 있도록 정립해내지 않는 한 불교수행 집단의 모순과 혼란과 무능력과 방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불교를 하지 않는 한 미혹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로서의 불교의 존재의미가 현실에 살아 숨 쉬지 못한다. 뭇 중생들이 나아갈 방향과 길을 제시하는 자로서의 불교 수행자의 역할이 이루어지길 기대할 수 없다.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하고 괴로운 일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양심적으로 불교와 역사현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불교의 내용과 상황이 이러함으로 불교의 최고가치요. 법칙인 깨달음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절실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