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眼으로 보세요!
껍데기로 들으면 쭉정이만 남을 뿐, 오로지 자신의 혼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흙탕물 같은 소리를 내가 참마음으로 듣는 순간에 청정수로 변하는 이치 세상의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은 지혜를 얻지만, 필요한 소리만 잘 듣는 사람은 편협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과 음욕에 시달리는 이유는 육체의 귀로 듣기 때문, 참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귀를 막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모든 소리는 참생명의 깨달음의 소리로 들립니다. 이것이 참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가장 유익한 방법은 들어서 깨닫는 것, 나를 비방하는 소리도 귀로 들으면 화나고 괴롭지만 나의 참마음 자리에서 들으면 나를 완전히 해탈시키는 위대한 반야선에 오르는 것이지요. 항상 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네모는 세모나, 원이나, 오각형이나, 팔각형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네모의 생각만 고집하며 네모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세모의 생각으로 세모만 받아들이면 영원히 듣지 못합니다. 듣는 자는 지혜자요. 듣지 않는 자는 무지 자요. 선한 말과 나에게 이롭고 달콤한 말만 듣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 내게 쓰고 괴롭고 원치 않는 말을 듣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사(思)는 무엇입니까? 생각은 분별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로지 자비심과 진리의 말씀을 사유하는 겁니다. 진리의 말씀을 내 골수에 새기고 또 새기는 것, 상대가 욕을 했을 때 가슴 아프게 새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새기는 겁니다. 상대가 나를 비난했을 때도 그것을 새기고 또 새겨서 그 안에서 보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수(修)는 무엇입니까? 수(修)는 내가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대로 행하면 그것이 도(道)요, 해탈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넣지 마세요. 세상의 사량 분별을 넣지 마세요. 마음을 자비심으로 열어 놓고 생고집으로 하지 말고 다 받아들이면서 행하세요. 나와 일체의 우주 만물은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그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진실로 가정을 위하고, 자녀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것이어야 하고 n 나의 행동은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행동이어야만 합니다. ‘나’가 떨어질 때까지 가족에게 삼배하라.!
나는 불자들에게 늘 부탁을 들여왔습니다.“법당에 와서는 무릎을 안 꿇을지라도, 아침저녁으로 내 자리에서 내 가족에게 삼배씩은 꼭 해라. 그렇게 하면 지나간 날의 원결이 다 풀어지고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말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나’가 떨어져 나가는 데 있다. ‘나’를 항복받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나’를 항복받기 위해서는 가장 은혜롭고 고마운 ‘나’의 가족에게 삼배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가 붙어있으면 내 아내, 남편, 아들딸에게 무릎이 굽혀지지 않지만, ‘나’가 떨어지면 내 가족 앞에 스스럼없이 무릎이 굽혀진다. 무릎이 잘 굽혀지는 만큼 ‘나’가 더 떨어졌다는 증거이다.”
불교의 목표는 무아(無我)의 체득입니다. 무아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까닭은 ‘나’라는 아상(我相)을 떼어내는 데 있습니다. 그럼 ‘나’를 비우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인가? 바로 내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나’의 가족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본위로 생각합니다.‘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들과 내 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 앞이나 부처님, 자연물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쉽게도 조아리지만, ‘나’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가족에게는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을 향한 오체투지(五體投地)가 쉽게 된다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이며, 지난날의 잘못 얽힌 인연도 바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실로 나를 풀고 남을 풀고 지나간 시간에 맺었던 원결을 풀고 현재의 좋은 삶을 이루어내는 데 있어 가족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삼배를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왜? 이것이 ‘나’를 비우는 가장 지극한 예불이요, 가장 빠른 수행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주위 사람, 가족들은 모두 살아 있는 부처님입니다.
그들이 참부처임을 안다면 법당에서 수 천 배씩 절 했다고 자랑하기보다는, 가장 은혜 깊고 고마운 내 가족에게 무릎을 꿇어 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끼리 서로 절하는 이것이 서로의 존경을 주고받는 상호 존경이며, 이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내 가족 앞에 스스럼없이 무릎을 꿇을 수 있으면 바로 ‘나’가 떨어져 나가고, ‘나’가 떨어져 나간 그것이 ‘나’를 항복받은 상태입니다. ‘나’가 떨어져 나가면 ‘나’의 욕심과 고집이 사라져 지혜가 샘솟고, 인연이 깊은 남편, 아내, 아들, 딸을 향해 절을 하게 되면 지나간 시간의 원결이 풀어져 가족이 화목해지는데, 안팎으로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방에 혼자 있을 때,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족 한사람 한 사람에게 3배씩 하는 것! 이것이 어려워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부디 가족을 향해 절을 하면서 참회하고 축원하십시오. “미안합니다. 복이 없는 나 때문에 당신을 고생시키고 괴로움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언제까지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순탄하십시오.” 이렇게 축원까지 하다 보면 각종 재앙이 저절로 사라져 가정이 정말 화목해집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바라지도 않았던 ‘운이다, 재수다’ 하는 것들이 자연히 모여들게도 됩니다.
‘당신께 잘못한 것, 모두 참회 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하면서 절을 해야 된다. 아이들에게도 시키고, 남편도 하루 세 번 어머니께 삼배를 드리면서 참회하도록 당부해라.”
기껏해야 하루에 세 차례 삼배씩의 절을 1백여일 계속하여 이러한 영험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험담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큰 가르침 몇 가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단순한 삼배가 치매라는 중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떠한 원리가 숨겨져 있는가? 첫째는 절을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치매에 대한 자세를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치매를 돌보는 것이 힘들어 병원에 입원시키고자 했던 며느리가 인과의 도리를 깨닫고, ‘기꺼이 모시겠다’는 자세로 마음을 돌린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그 어려움을 면할 방법부터 생각합니다. ‘나’의 편안함, ‘나’의 소중함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이상은 결코 편해질 수가 없습니다. 피한다고 편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가 강하면 강할수록 ‘나’는 오히려 더욱 힘들고 고달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풀고 업을 녹이고자 하면, ‘나’를 죽이고 기꺼이 받고자 해야 합니다. ‘나’를 항복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며느리가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아상(我相)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그 잘났던 ‘나’가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입니다. 대영험입니다. 이러한 기적과 영험은 우리가 ‘나’를 잊고 정진할 때 찾아드는 것입니다.
‘나’가 무너뜨려질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상을 버리고 정성을 다하면 크나큰 힘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