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소한 삶의 이야기

자비로운 불자님들 이시여!

 

 

우선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자신이 잘못 살아온 가치관으로 남에게 아픔을 전가한다면, 넘어진 얘기, 부끄러운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실수하고, 또 욕심부린 얘기, 그래서 감추고 싶은 얘기를 고백하여 가자는 것이다. 고백에도 전제 조건이 있음. 먼저 자기 자리를 지켜보며, 왜 넘어졌고, 왜 실수했는지, 그 연유가 무엇인지, 그 원인의 중심이 `나, 는 아닌지, 살펴보고, 내려놓고, 뉘우치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고백이며 참회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치유의 길이기도 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잘못하여 저지른 업은 꼭 받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의 가슴에 뽑히지 않을 철못을 박은 피 멍도 그 아픔도, 그 또한 뽑아주고 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이기에 슬픔과 아픔이 물 먹는 솜처럼 가슴에 저며온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상실감에 힘들어하고 사람 곁에 그저 있는 것으로 온전한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을 일깨워 주며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하는 순간, 아무리 깊은 상실감과 상처도 결국은 아물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나 솔직하고 당당하고 소박하게 살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원을 세워 봅니다

‘불살생’의 도리를 말씀하신 것은 고해(苦海), 즉 생사의 바다에서 나오라는 법고를 울리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예전에 내가 ‘죽지 않는 게 사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도 그 법고의 소리를 듣자는 선(禪)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리석어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남의 목숨만을 죽이지 않는다는 문자적 의미만을 뜻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님 근본사상이 ‘생사자재법(生死自在法)’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순수한 원력을 세우고, 정성을 쏟으면 하늘도 그만큼 탄복하여 그 원을 이루어 준다는 뜻입니다. 불자들은 이 마음을 알았으면 해요. 극(極)에 달(達)하도록 지극하면 반드시 원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원력이란 다름 아닌 남녀노소(男女老少)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기를 원하는 각자 그릇에 맞추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도량’을 열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불교는 과거처럼 산중 사찰에서 전통적인 교학과 수행으로 전해지기보다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관으로 스며들어야 한다는 지론이 그대로 현실로 옮겨지는 그런 공간이다.

물론 “원력을 성취해 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 도량을 세울 더 좋은 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 때문인지 말이나 행동에는 어울리지 않는 힘과 용기로 마음공부해야 한다
‘상심(上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하심을 알겠습니까’ 만상은 무비도(無非禪 無非道)’라는 개오를 깨달음을 구하는 이는 모름지기 끈기 있게 매달리는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부딪치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불도를 닦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발심(發心)의 마음가짐이다.
“발심을 왜 하며 불도는 왜 닦아야 하는지, 또 누구를 위해서 닦고 무엇 때문에 불도를 닦는 지를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 전에 해결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불도를 닦아야 합니다. 우물쭈물 미루다 보면 수만 겁이 지나도 불도와의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발심한 척 하지만 행동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버리는 요즘 세태 진정한 발심 없이 자비문중에 들어온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받은 화두를 자다 먹는 떡과 같이 아무 맛 모르고 자리 나 지키며 세월만 보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말이다. 교리나 화두라고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달을 보도록 노력해야지 손가락만 보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손가락에 가려진 달을 보지 못하니 한평생 고민하고 병만 들어 일생을 망칠 뿐이다. 여기에 자기 병도 제대로 모르는 선지식에게서 화두 아닌 화두를 받아 쥐고 일념(一念) 병에만 사로 잡혀 있으니, 일생은 고사하고 수만 겁을 지나도록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발심을 하고 나면 ‘쇠뿔을 단김에 빼라’는 속담에 맞는 용기와 분심이 필요합니다.
부처님이 찰나 간(刹那間) 혹은 여반장(如反掌)이라 말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불도는 익혀서 연습하는 게 아니고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를 일도양단하는 것입니다. 불도를 깨우치는 데는 말과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일초도 늦추지 말고 용기와 분심을 내어 수미산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불도의 맛을 조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씨앗이 눈을 뜨는 과정이며, 눈 뜬 후에 물보다 연한 촉이 딱딱한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이 불자들 역시 그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수행을 시작하고 남의 다리만을 긁는 채 그 결과를 기다리는 우매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수행을 올바로 하려면 계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요즘 너무 계율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열반은 영원한 무한대에 도달한 진리 그 본체이기 때문에 조사들도 노심초사한 끝에, 이 영원한 열반의 본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각자 나름대로 자신에게 맞는 원을 세워 열반의 구법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랜 수행으로 마음속에 불필요한 번뇌의 불씨까지도 없앤 탓인가, 요즘 먼 산의 등줄기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본다. “저 산은 부처님의 열반상을 닮았죠, 또 저 산은 부처님이 누워있는 얼굴의 윤곽을 옮긴 것 같지 않아 번뇌 없는 수행자의 모습은 우주를 삼키는 사자 같고, 흔들리는 바람 앞에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보살의 품과 같다. 아마도 그 속에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법신(法身)이 있을 것입니다.^)^

불상은 조각이든 그림이든 부처님에 대한 형상이지 부처님은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지혜의 눈을 떠 깨닫고 깨달은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행 할 수 있다면 그가 곧 부처이다. 부처님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고 그 어떤 우상도 아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지요. 그러므로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고 나와 이웃이 다 함께 지혜롭게 잘 살아가는 마음밭을 닦아가는 길이다. 이러한 인격에 귀의하는 것은 곧 본질적인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형상을 모시고 애경 하며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각자 지혜의 눈을 뜨고 저 함이다. 부처님 本體인 法身은 宇宙의 대광명이며 모든 衆生의 생명의 根源이다. 그래서 無量光 또는 無量壽라고 한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이 法身이 現象界의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慈悲로 化現하신 몸이므로 化身佛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사찰마다 모신 불상은 부처님의 거룩하신 萬德尊相을 물체로써 나타낸 것이므로 우리는 이 불상을 통하여 석가세존을 사유하고 귀의할 수 있으므로 初心衆生들에게 신앙을 돕는 환경을 갖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상 앞에서 애경을 을지만, 애경에 대한 불상이 아니라 불상을 통하여서 생각하는 부처님이므로 세간에 사람들이 모르고 비방하는 것처럼 유치한 우상숭배가 아니다는 것을 각자가 깊이 새기고 마음공부하는 데 더더욱 심안이 길이 열리시길 바랍니다.
참 부처님을 찾고 참 공양을 드리므로 우리 앞에 늘 놓여있는 재앙이 물러가고 만복이 구족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비로운 불자들이시여!
저 마구니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다 함께 같이 이웃 친지들에게 불교에 귀의하도록 권하여 하루속히 살기 좋은 불국토를 이룩하도록 우리 불자들이 다 함께 노력합시다. _()()()_

'소소한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심이 없으면 법계도 없구서리![자리이타]  (2) 2023.12.24
下心  (2) 2023.12.23
생각하는 그림자(망상)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4) 2023.12.04
길!  (3) 2023.12.01
사대가 오온으로.....!  (3) 2023.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