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소한 삶의 이야기

길!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논리와 언어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침묵의 직접적인 경험의 길이다.
논리와 언어의 길은 추론의 길, 이것은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다.

이를테면 산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산에 불이 났다’고 판단한다. 여기서 직접적인 경험은 연기이고, 산의 불은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다. 산에 불이 존재한다는 판단은 논리적이고 언어에 의한 추론의 결과이다.
왜냐면 연기가 있는 곳에서는 대개 불의 존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경험은 몸에 의해서, 감각기관에 의해서 사물을 직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발생된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몸으로는 온전하게 느낌을 느낀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감각기관과 함께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몸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문명은 점차 몸·대지 상실해 정보화 홍수로 가상현실의 삶, 그러나 우리의 문명은 점차로 근본적인 토양으로서 몸, 대지를 상실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의 홍수로 머릿속은 가득 차, 거의 모든 시간을 우리는 인터넷 가상현실, 네트워크 속에서 모든 의사결정과 토론이 직접적인 면담이나 몸과 몸의 만남이 아닌, 화상을 통해서 반짝이는 전기신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곳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만나지 못하고 창출하지 못한다.

댓글은 진실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상현실은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고, 머릿속의 언어와 관념이고, 꿈속처럼 실체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보화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붕 들떠있고, 허우적거리면서 불안과 외로움을 달랠 무엇인가를 찾아보지만, 결국은 보람도 없이 공허감을 느끼면서 더욱더 큰 고독감을 느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뜬 구름 잡는 일을 해왔다. 일상의 소통도 그러하고, 학문을 비롯하여 심지어 종교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늘의 이야기를 해왔다. 구체적인 실존감, 실질적인 경험을 느껴보지 못한 지가 너무나 오래되었다.
몸은 논리와 언어의 머리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공허해진 몸은 소비의 배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제는 구체적인 삶의 진솔한 느낌을 온전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에서 다시 ‘몸’으로 회귀해야 한다.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온전하게 느끼는 연습을 해야 한다.
느낌의 일어남, 느낌의 머무름, 느낌의 사라짐을 충분하게 느낀다면, 우리는 살아있음의 존재감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지금 여기의 몸을 관찰한다면, 대지의 충만감으로 가득 찰 것이고, 들어오는 숨결과 나가는 숨결과 하나 됨을 통해서 무한한 안정과 행복감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침묵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다.
그런데 침묵의 길은 존재감과 구체성을 확보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게 돕지만, 현실적인 배고픔을 직접적으로 채워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반면에 언어와 논리의 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이 길은 우리에게 갈등을 안겨주고 불안과 공허감을 증폭하면서 편안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든든한 대지에 뿌리를 두지 못한 논의는 단 순간에 쉽게 무너진다.

여기서 수행자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문화가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그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언어와 논리에 의한 머리 에로 집중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서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땅으로, 몸으로 회귀를 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말이다.

잘 수승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세요

나무 석가 모니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