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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없는 법의 말씀

선가귀감(禪家龜鑑)

장엄한 대자연의 풍광은 그 어드런 군더덕이 붙을 이유외 명분이 없다!

증생들아! 알량한 자존심 버리구서는 머리로 헤아리지 말고 살아오면서 지은죄 참회하세요_()()()_

禪定! [선정]
선(禪)은 범어(梵語) dhyāna의 음역과 ‘정(定)’은 범어 samādhi의 의역이다. 풀이하면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선정의 힘이 없다면 정신이 흐릿해져 잘못된 판단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수행에 있어서 선정의 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할 수 있다면 처리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즉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과 같은 말이다. 선정을 통해 삿된 망념을 제거하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분명한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마치 맑고 고요한 호수에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선정은 지혜의 원인이 되고, 지혜는 선정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龜鑑! [귀감]
“범부의 경지에서 벗어나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과 앉은 자세로 죽거나 서서 죽는 것이 모두 선정의 힘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떠나서는 길이 없다. 사바세계 인간의 생활이란 모든 것이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수많은 번뇌와 탐진치 삼독심에 집착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한다. 누구든지 망념과 사념(邪念)을 여의고 분별심을 버린다면 이 세상이 곧 극락이고 그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다. 이와 같은 경지로 이끌어주는 것이 선정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우리들 마음의 상태를 정심(定心)과 산심(散心)으로 나누고 있다. 산심이 보통 우리들 마음의 상태다. 그러나 선정에서 정심으로 변하고 다시 산심으로 돌아간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에 들어가서 이런 단계를 쉽게 오르내린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진실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선정을 닦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냉난자지(冷暖自知)!
물이 차가운지 더운지는 마셔봐야 알고 사과 맛이 단지 신지는 먹어 봐야 한다.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심지어 사진을 찍거나 그림으로 보여줘도 직접 보고 듣지 못하면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노릇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설사 보았다고 해도 내 것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남의 돈을 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치는 수행길에서는 더욱 확연하게 적용된다. “도(道)는 본래 원만하게 완성되어 있는 까닭에 닦거나 증득한 대상이 아니다.
도는 소리와 형상 같은 아니고 미묘해서 보기 어렵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직접 물을 마셔보고 그것이 차가운지 더운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마치 어떤 사람이 직접 물을 마셔보고 그것이 차가운지 더운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는 내용의 한문 구절은 ‘여인음수(如人飮水) 냉난자지(冷暖自知)’다. 도(道), 즉 깨달음의 맛은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는 의미다.
“여인음수 냉난자지”와 같다. 얼마나 그 깨달음의 물맛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고 상큼했기에 그런 말을 했겠는가.
아마도 코끝을 때릴 정도였을 게다. 도를 체험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수행하지 않으면 도의 맛을 즐길 수 없다.
그래서 선에서는 체구연마(體究鍊磨)를 중요시한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봐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눈 밝은 조사님이라 할지라도 깨달음을 내 손에 쥐어주지는 못한다. 깨달음은 철저한 자기의 내적 체험에 의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보고 어록을 줄줄 외운다 할지라도 몸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관념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한 사람에게 경계의 바람이 불면 그는 이리저리 휘날릴 것이 분명하다.

흔히 수행을 일러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저 생각으로 닦는 것이 아니다. 사실 생각으론 우주 저편으로 갈 수 있고 억만장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수행은 몸이 움직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며 닦아야 하는 것이다.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고 몸이 길들여져야 하며 마음과 몸이 합치되어야 한다. 몸과 마음으로 도리가 터득되어야 그것은 관념이 아닌 사실의 세계로 다가온다.

냉난자지란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지적 체험해 봐야 안다는 의미다. 그래서 도란 스스로 체험해서 알뿐, 남에게 말로 전해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에서 말하는 냉난자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뜨겁다/차다, 길다/짧다, 아름답다/추하다’라는 말은 사실 상대적 개념이다.
뜨거운 물에 익숙한 사람은 우리가 보통 느끼는 뜨거움은 뜨거움이 아니다. 아마 쇠를 녹이는 용광로가 감각이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100도의 온도는 오히려 차가운 느낌일 것이다. 긴 것은 짧은 것과 비교해서 길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다니, 시니 하는 것도 사실 객관적이지 못하다. 사물에 대한 체험은 그렇게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달라질 수 있다. 사물이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어 있다면, 그렇게 개념화되기 마련이다.

선(禪) 체험에서 나오는 냉난자지, 다시 말해서 깨달음에 대한 체험은 그러한 개념적 규정마저 떠나 있다.
위에서 언급한 《혈맥론》의 구절에서 도는 닦아서 얻을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도’, ‘깨달음’, ‘부처의 모습’은 이미 누구에게나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닦아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 도란 닦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이다. 닦아서 청정해진다면, 그 깨달음은 닦지 않으면 오염될 것이다. 그렇게 얻고 잃고, 청정해지고 오염되는 것은 우리가 접하는 일상적인 사물들이다.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인연 따라 이합집산하는 것들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도나 깨달음은 그렇게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완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사실 개념 작용을 넘어서고 있다. 어떤 틀 속에 갇혀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선에서는 직접 체험하는 것도 중요시하지만 개념이 개입된 분별작용을 뛰어넘어 순수무잡하고 청정한 그 자리로 직접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선 체험만이 진정한 냉난자지다. 그것은 언어표현과 일정한 경계에 한정된 체험의 틀을 파사 한다.

그것이야 말로 분별을 차단한 근원적인 체험이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