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지우고 지혜를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있되 그 번뇌에 어둡지 않고 번뇌의 실상을 여실히 봄으로써 번뇌의 당처(當處)에서 지혜 를 얻으라”라고 또한 “생사와 열반이 둘 아님 (不二)에 있어서 생사가 끝나고 열반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생사 그 자체로서 열반의 모습을 삼는 당시 당처(當時當處)의 불 이를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장래의 어떤 시점에 중생의 몸을 여읜 부처가 새롭게 오는 것이 아니라, 즉시의 현전에서 업력으로 받은 육신인 ‘나’가 있는 그대로 이전과 이후가 아무런 다름이 없이 그대로 부처입니다.
화두도 내가들고, 망상도 내가 내고, 잠도 내가 잡니다. 거짓된 나 자신과의 모든 싸움에서 이겨 참 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일체의 생각들을 쉬고 일념에 들 수 있어야 하며, 일념에 든 나머지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 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일념에서 무념으로 무념에서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꿈과 생시가 한결같이 공부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장날이 되면 장을 보러 마을에 내려가곤 합니다. 사중의 살림도 장만할 겸 세간사 남들과 어울려 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세간 사람들의 삶을 느껴보기 위해서 공부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일체가 다 나 아님이 없다는 것을 일체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가 다 나의 스승입니다.
중생들이 우매한 까닭은 마음공부는 아니하고 먹고 사는데 끄달려서 망상만 이겼 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가 나인 줄 착각하고 명리를 위해 욕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몸이 건강하면 공부하기가 수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몸이 건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몸이 건강치 않은 만큼 더 절실하게 화두를 들 수도 있는 거예요.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가면 먹지 않아도 사 는 경계가 나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부처자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가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내용을 요약하면 ‘사람들마다 나라고 얘기하지만 나는 존재하는 바가 없다. 다만 썩어서 사라질 이 몸뚱이가 있어서 말을 하고 시비분별심을 내 어 다른 사람과 다툼을 벌인다. 실제로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삼라만상이 다 없는 것이다.
또 없는 그것은 뭣인 고? 없지만 묘하게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득도를 하여 대 도인으로 이렇듯 깨달음에는 남·녀 구별도 없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사무치게 참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보다 공부를 명확하고 수월하게 하려면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야 합니다.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게 되면 공부기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선지식을 만난 다 음에는 철저한 믿음으로써 모든 것을 스승에게 맡겨야 합니다.
“선지식을 믿는 정도에 따라 나 찾는 공부가 성취된다”고 훌륭한 스승은 알게 모르게 제자를 해탈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스승에 대한 신심을 바탕으로 하여 속절없이 윤회하는 ‘나’에 대한 분심을 일으켜야 되고 다 시 화두에 대한 강한 의심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근본자리를 한번 깨닫고 난 후에도 계속 정진해서 한 두 번 더 크게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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