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가 싶더니 만물이 무성해지는 여름입니다. 계절과 같이 우리 인생도 잠시도 머물지 않고 만물과 함께 흐른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화엄경의 한 구절로써 과거와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머무르지 않을 때 비로소 불교 수행의 궁극점인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 생활은 집착이 기본 되고 삼독심을 줄기로 삼아서 영위되고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 혹은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명예와 지위, 재산, 건강 등의 문제로 해서 한 번은 기쁘다가 곧바로 슬픔으로 바뀌고, 한때는 영예롭다가 얼마 후 실망하고 위축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굴레이며 끊이지 않는 반복입니다. 이러한 놀음에 휩쓸려 공적함을 깨달을 때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 계실 때 한 외도가 와서 물었습니다. “사문이여 그대는 기쁘십니까?” “아닙니다.” “사문이여 그대는 슬프십니까?” “아닙니다.” “사문이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기쁨은 슬퍼하는 사람에게 따라오고, 슬픔은 기뻐하는 사람에게 따라오니, 그 모두를 아는 나는 불만족이 없느니라.” 이와 같은 대화에서 슬픔과 기쁨의 실상을 안다면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으며, 이러한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없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근본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오직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에 머물지 않고 온전히 깨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현재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일상생활은 편해졌지만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은쉬지를 않습니다. 만물이 항상 하지 않음을 깨달아 두 언덕을 함께 버릴 줄 아는 지혜로운 불자가 됩시다. “수행이란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고, 먹는 양을 조절하고,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라고 얼굴이 평온한 것은, 바로 대자유입니다. 많이 먹는다고 평온한 얼굴이 되지 않으며 많이 가졌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열어 풀어놓는 그곳 남과 내가 하나 되는 마당, “내가 먼저 남의 마음 헤아려 자꾸 맞춰 나가십시오” 꽃마다 풀마다 그 이치가 다 드러나 있는데 어찌 별도로 찾을 게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익혀온 10가지 악행과 악업 때문에 업장(業障)이 가려 자신에게 있는 경(經)을 볼 줄 모릅니다. 부처님은 허무한 이상(理想)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살아서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마음을 바다같이 쓰면서 폭넓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불법(佛法)을 믿었다는 표적입니다. 길이 좁은 골목에서는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 못 하는 겁니다. 불교는 넓은 대로(大路)라서 누구든지 여유 있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가거나 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불법은 마음을 닦는 길입니다. 모든 걸 놓고 용서하며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빌딩, 땅, 보물 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실답게 남주고 갈 것이니 받을 사람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내 것’이란 건 아무것도 없기에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즉일(多卽一)이요 일즉다(一卽多)’입니다. 모두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법문을 수없이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 하나만 잘 다스리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생로병사 등 인생에 있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 찌꺼기입니다. 먼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겁니다. 업보를 지닌 중생의 몸에 무엇을 입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로병사가 끊임없이 따르는 이 육신을 가꾸고 닦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하심공부를 하게되면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공덕을 쌓게 됩니다. 참선, 시 주, 염불, 독경을 하기 전에 하심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하심공부는 더 수승 한 공부를 성취하기 위한 밑천이 되는 수행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심을 내게 되면 가정이 화평해지고 천하가 태평해집니다. 하심공부는 마음을 다루는 공부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탈바꿈돼야 합니다. 마음을 바꾸고 달라져야 합니다. 욕심과 성내는 마음을 과감히 잘라내야 합니다. 부처님을 믿으며 차돌처럼 단단한 탐진치 삼독심을 녹여야 합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며 사는 것이 불법을 생활화하는 길입니다.
대우주와 한덩어리인 이 원점이 그대로 저주덩어리가 되고 독기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이 조각이 나서 여기에 있지만은 이 기운이 대우주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하는 기운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세상 살다보면은 제일 먼저 복이나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 오는데 부처가 복이나 재앙을 주는 것 아닙니다. 복의 씨앗은 여러분이 뿌려야 해요. 복의 씨앗은 여러분이 뿌려서 여러분이 복의 씨앗을 가꾸어야 해요. 그리고 그 열매를 거두어야지 부처는 복 안 줍니다. 또한 부처가 재앙도 주지 않습니다. 잘못에 벌도주지 않습니다. 잘한 것 잘못한 것 모두 내가 씨앗을 뿌려서 내가 거두는 것이지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복을주거나 재앙을 준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불교인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복도 내가 씨앗을 뿌려서 내가 가꾸어서 내가 거둔다는 것을 믿어야 되고 재앙도 내가 씨앗을 뿌려서 내가 재앙을 길러서 재앙의 결과를 내가 당한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나와 너 따로 없는 불이사상 실천할 때 공생공영이 가능합니다. ‘불이’ 모른 채 분별심으로 인한 시비 갈등은 불행을 낳을 뿐 과거 시비 갈등 줄였으면 역사 달라졌을 것 불이 화두삼아 삶의 순간순간 살펴 중도 견지하는 불자 되길,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도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중도의 길을 따라 살아갈 것을, 허름한 대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요란한 소리가 늦은밤을 더욱 깊은 사유(思惟) 속으로 몰고 갑니다. 산중의 바람은 때에 따라 유난히 거세어서 느끼는 체감 역시도 무척 차갑습니다. 분별의 오르내림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어제, 마음속으로 종일토록 달궈낸 구차스러운 열기는 밤을 새워 뒤척인 오늘 아침에야 부담스러운 입술 끝으로 또 작은 산 하나를 키워냈습니다. 지난밤 분별심으로 혼란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따로 없거늘 우리는 늘 분별심을 일으켜 시비하고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이사상(不二思想)’에 화두 듭니다.
이 세상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늘 마주하는 말인데, 일상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수행 속에서 살다 보니 어제와 같이 새삼 모두가 ‘불이(不二)’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고, 불이사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온몸이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불가에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세속과 부처도 둘이 아니고 선악과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 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 역시도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세상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하다 보니 역시 모든 것이 ‘불이’로 회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안에서 분별심으로 인한 시비와 갈등이 낳은 불행한 결과를 확실히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불이사상을 이해하여 분별심을 줄이고 시비와 갈등 대신, 조화와 화합의 길을 모색했다면 역사가 달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불이사상을 이해하고 생활에서 실천해갈 때 이러한 의문은 저절로 풀려서 지구촌 전체가 공생공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불이사상을 화두로 삼아 삶의 순간순간에 살펴보고 의식을 바로하여 중도를 견지할 수 있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로 비추는 마음이 거울 보통 선이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엇이 선이냐. 우리가 듣기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쉽다고 하면 이것처럼 쉬운 것이 없고, 어렵다고 하면 이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가장 어렵고 가장 쉬운 것이 하나입니다. 경전에 보면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에 보면 ‘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부처님 마음이라고 하나요? 사람마다 누구든지 너도나도 갖추고 있는 원래 마음을 선이라고 하고, 그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가르친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러면 원래 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경전도 보고 책도 보고 남의 말도 들어보고 법문도 들어보고 나름대로 화두도 타서 앉아도 보고, 뭘 터득해 보겠다고 애를 많이 썼을 것입니다. 처음 말씀 드린 대로 쉽다고 하면, 그렇게 애를 썼으면 벌써 자기 뜻대로 성취되었을 것 아닙니까. 어렵다고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나오지도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고 허탈하기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본래 갖춘 불심은 어떻게 시작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이전에, 깨닫기 이전에, 깨달음과 관계없이 원래 갖춰줬던 마음입니다. 이를 부처님이 깨달으셨습니다. 깨닫고 보니 깨달은 사람만이 갖춘 게 아니라 일체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갖춰져 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마음이 잠시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이러쿵저러쿵 생각에 사로잡혀있어요. 망상과 집착이 덮어서 원래 갖춘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덮여 있다면 시원하겠어요? 답답합니다. 괴롭습니다. 언제 도를 깨닫고 성불하느냐 등등의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합니다. 동서남북 공간을 초월하고 과거, 현재. 미래 시간도 초월한 모든 것이 마음에서 시작하고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했느냐? 시작이 없으니 무시(無始)라고 합니다. 언제 끝이 나느냐, 한계가 없어요. 그래서 무종(無終)입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항상 눈만 뜨면 ‘오늘 뭘 해야 하느냐’. 이러쿵저러쿵 생각이 많아집니다. 먹고살라니 돈도 벌어야 하고, 명예도 권력도 얻어야 합니다. 뜻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괴롭다는 내용을 보면 자기가 바라고 구하고 있는 게 구해지지 않아서, 구할 수 없어서입니다. 얻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구할 곳을 버리면 답답한 것도 괴로울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구하지 말라.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지고 찾으면 찾을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찾지 말아라 구하지 말아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눈 푸른 납자가 선지식을 찾아가 불법을 알고자 출가하고 정진했는데 도저히 모르겠다며 묻습니다. 선지식은 ‘마음 밖에 도가 없고,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라고 이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 네가 마음을 찾는다고 하는데 제일 가까운 곳에 두고 찾고 있다.’ 선문에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소 등에 타서 소를 타고 있는 격입니다. 마음속에 있으면서 마음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경우 어떤 형태이든 화를 내는 것도, 욕심부리는 것도, 착한 생각도 나쁜 생각도 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화내고 있는 마음을 자기라고 한다면, 화가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걸까요? 화는 사라졌지만 나는 있습니다. 원래 마음은 그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화는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수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것이 오고 저것이 옵니다. 물과 파도에 비유하겠습니다. 파도도 물이고 물도 파도입니다. 바람에 움직이는 물을 파도라고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파도가 아닌 물입니다. 사라지면 파도 속 물도 같이 사라집니까?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은 같이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생각이니 화가 마치 물에서 파도 생기듯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달마의 안심법문은 다들 아실 겁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혜가에게 달마는 그 괴로움을 가져오면 해결해 주겠노라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자 달마는 이제 편안해졌다고 합니다. 혜가는 이 대목에서 깨달았습니다. 망상이 생각이 괴로움이 눈앞에 있습니까? 물체라고 하면 실제 있다고 하면 눈앞에서 치우면 그만입니다. 망상은 그림자입니다.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망상과 생각과 마음은 어떤 관계일까요? 파도도 물이고 파도 아닌 것도 물입니다. 생각도 마음입니다. 그런데 생각 아닌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성격을 설명하겠습니다. 물, 불 마음. 불이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물은 무엇입니까. 물은 젖는 습성이고 불은 뜨거운 습성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무엇입니까? 여기 컵이 있습니다. 모양과 형태가 있지만 마음은 물건처럼 모양도 형태도 없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화가 나면 화나는 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화가 사라지면 답답함이 사라지면 시원합니다. 그 시원함을 ‘아는 놈’이 자신이요, 마음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도 생각을 합니다.
가령 종소리가 들리면 어제랑 오늘 종소리가 다르구나 알아차립니다. 얼마든지 생각을 합니다. 생각하지만, 생각 이전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원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마음은 물질과 다릅니다. 거울과 같습니다. 검은 것을 검게 비추고 하얀 것을 하얗게 비추고 붉은 것을 붉게 비춥니다. 거울 자체가 검거나 희거나 붉거나 하지 않습니다. 거울이 비추지 못하면 우리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무판자이거나 벽이지요. 거울은 자기 색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비춥니다. 마음도 형태와 모양이 없어서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아는 것뿐입니다. 앞에 보이는 푸른 산을 비춥니다. 소리는 소리인 줄 알고 빛은 빛인 줄 알고 냄새는 냄새인 줄 압니다.
이 ‘아는 마음’이 가려지면 이 마음을 모르는 겁니다. 머릿속 이 생각 저 생각은 마음을 온갖 환상으로 가립니다.
행복은 마음 가운데 있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갈망한다. 행복해 지기 위해 돈을 벌고 권력과 명예를 갖고자 노력한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학교에 보낸다. 행복을 위해 빌딩을 세우고 공장을 만들고 직장에 나가고 공사장에서 땀흘려 일을 한다. 그러나 행복은 외부조건에 의해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행복해 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행복은 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행복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면서 현실에 충실하고 스스로의 삶에 여유를 갖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행복은 바로 생활하는 그곳에 존재한다.
행복은 구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라고 구하는 것이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불행을 느끼게 된다. 금강경 사구게 중에는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닌 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니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말씀이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 무릇 있는 바 상(相)이 다 허망한 것이니 허망한 이 현상을 허망한 현상과 허망하지 않은 진실과 양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물질은 모두가 상에 속한다.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다.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다가 흩어지게 된다. 마치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영원하지도 않은 거짓 형상을 쫓아다니며 그것으로 행복해 지기를 바라는 생각이 어리석은 줄 깨달을 때에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된다. 참다운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세계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 가정 안에서의 사랑이 이웃과 사회로 넘쳐 나갈 수 있을 때 삶은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들이 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고 물질과 명예를 좇다 보면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 된다. 명예와 부를 누리면서도 마음은 공허하고 뜬구름처럼 허망하다. 재물이 터무니없이 많으면 사치해지기 쉽다. 분수에 넘치는 생활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어간다. 땀 흘려 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져 간다. 남을 부리게 되고 자칫 업신여기는 잘못된 병이 물 스며들 듯 젖어 들어온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황량한 것은 없다. 인간으로서 따뜻한 정이 없을 때 불행한 사람이 된다. 돈이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곳곳에서 부조리가 생기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진리와 멀어지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불성은 때 묻지 않는다. 햇빛처럼 밝고 흐르는 물처럼 깨끗하다. 마음 본바탕은 순수해서 연꽃과 같아서 때 묻지 않는다. 늘 대자대비의 마음이 흘러나온다. 언제나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는 곳에 행복이 있다. 이곳은 밉고 고움이 없다. 오고 감이 한결같고 고요하다. 마음 가운데 다툼이 없으니 어느 곳에 처해 있든 행복하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 가운데 있다. 행과 불행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각할 때 행복은 바로 그 자리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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