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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곳간

(語默一如)

 

자주 부탁드리는 말씀이지만 불자들은 남을 건너다보면 안 되며, 건너다보지 마십시오.
남을 건너다보면 언제나 실망을 하게 되어 있고, 남을 건너다보면 언제나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언제나 근본 불성(佛性)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찰의 입구에 있는 산문(山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此入門者(차입문자) 莫存知解(막존지해) 이 문에 들어오는 자는 지해[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깨달음의 집안, 부처님의 집안인 불교 문중에 들어오고자 하면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 분별의식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쉬운 이야기 같지만,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뜻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뇌나 망상을 두지 말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관과 객관에 대한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다 보면 '관세음보살'에 대해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와 염불의 대상인 '관세음보살'로 둘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를 불교 용어로는 능(能)과 소(所)라고 하는데, 능은 주관이요 소는 객관입니다. 곧 주관과 객관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뭐꼬?'라는 화두를 들고 있을 때도 '이 뭐꼬' 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가 있고 '이 뭐꼬'라고 하는 대상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 능(能)과 소(所)가 벌어지면 못 쓴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막존지해'에 담긴 의미입니다.
화두를 하면 화두 하나에, 염불을 하면 염불 하나에 똘똘똘 뭉쳐져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지장보살을 부르든 이 뭐꼬를 하든 결코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이것이 이 문중에 들어오면 지해를 두지 말라. (此入門者 莫存知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계속 알음알이, 곧 분별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염불을 하는 것 같고 화두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화두도 염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 놓일 뿐입니다.

실로 대우주 자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벌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동시에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지 않은 '나'는 곧 대우주 자체입니다. 대우주 자체가 곧 그대로 '나'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나요 내 마음'이라고 하는 그것은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떨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나요 내 마음'입니다. 모양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여기에 무슨 부처가 있고 중생이 있겠습니까? 어떠한 알음알이도 여기에는 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들어오려면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대우주 자체에 갖추어져 있는 본래 모습 그대로 똘똘똘 뭉쳐져 있어야 할 뿐, 달리 의식을 움직여서 망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관과 객관을 나눕니다. 먼저 물질세계인 몸과 정신세계인 마음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 주춧돌을 두면서 이것저것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교의 문중에 들어온 사람들은 지해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분별하거나 쪼개는 것이 아니라 염불 하나에, 화두 하나에 똘똘똘 뭉쳐져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건 '지장보살'을 부르건 '이 뭐꼬'를 하건, 똘똘똘 뭉쳐져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몸이 조용할 때는 되고 몸이 움직일 때는 안 되고, 이렇게 조각이 나서는 안 되며 먼저 몸을 움직일 때나 몸이 조용할 때나 한결같이한 덩어리가 되는 동정 일여(動靜一如)가 되어야 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어묵 일여(語默一如)입니다. 흔히들 말을 하지 않을 때에는 염불이든 화두든 한 덩어리가 잘 되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는 화두가 도망을 가거나 염불이 뚝 끊어져버리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더욱 부지런히 애를 써서 말을 할 때나 침묵하고 있을 때나 한결같은 어묵일여의 경지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낮 시간에 잘 끌고 가다가 밤에 잠을 잘 때 뚝 떨어져 버리는 고비를 넘겨서, 활동할 때처럼 잘 때도 한결같이 공부가 되는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목숨이 다하여 이 몸뚱어리가 떨어져 나가고 그다음의 새로운 몸을 받을 때까지도 한 덩어리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합니다.
낮 시간에 움직이거나 대화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하는 동안에는 염불이나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이 되는데 잠을 자는 동안에는 끊어진다면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잠자는 속에서도 염불이나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만큼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몸뚱어리 끝나고 다음에 새 몸뚱어리 얻을 때까지 연결이 됩니다.

출가 승려도 아닌, 사회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수행이지만 하시면 됩니다. 하지 않기 때문에 되지 않을 뿐,
꾸준히 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실제 머리를 깎은 스님네들도 잘 되는 분이 드뭅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분들께 '절대로 그쪽을 건너다보지 말라'고 합니다. 좋은 말 많이 하고 좋은 법문 많이 들으면 혀와 귀는 극락세계로 가겠지만 나머지는 업따라 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이 지옥을 간다고 나도 따라서 지옥을 갈 수는 없습니다. 남이 지옥을 가든지 말든지,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극락 가는 길입니다. 옆을 쳐다 보고 '아이고, 스님네도 저러는데' 하다가는 내 신세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지식은 멀리서 친견하라'고 했습니다. 모습을 직접 쳐다보면 신심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멀리서 기대를 갖고 법문만 잘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간절하게 깨어있는 마음! 결국 인생의 근본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의 몸을 받아서 불제자가 된 지금, 지금 수행하지 않으면 다시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로 미루지 말고 마음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어디서 어떻게 걸어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사는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에 공헌하고 있는지 나면의 자성을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내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내 잘못이 보이고 자신을 인정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영광된 삶일 수도 있고 부끄러운 오욕을 남기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
불법을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 의지해서 살겠다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본래 불성의 인품이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아서 일상생활에서 보살로 살아갈 수 있는 심성으로 바뀌는 것을 공덕으로 삼아야 합니다. 고통의 늪에서 허덕이게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편이 참선수행입니다. 참선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생활 그대로 참선을 할 수 있지요.
참선은 어렵지 않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순간, 일하면서 놀면서 삶 속에서 항상 하는 것이에요. 밥을 준비하면서도 생각을 고요히 지혜롭게 해서 맛있는 음식을 딱 만들어내는 것이 다 참선입니다. 밥 먹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고, 요리하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고, 누워서 자면서도 참선하는 것입니다. 항상 고요하게 내면을 응시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지금 하던 거 빨리 끝마치고 앉아서 참선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고 있는 그대로 참선이 돼야 합니다.

삶 속에서 참선을 통해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 나의 성품, 본래 모습인 자성불(自性佛)을 보고 깨닫는 그것, 자기가 자신을 대면하는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해요. 성품을 봤다는 의미입니다. 견성을 체험하면 대립과 갈등의 고통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스럽고 허공처럼 한계가 없는 영원한 대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허리를 바르고 곧게 펴세요. 그리고 눈을 편안하게 아래로 뜨세요. 눈을 감으면 다가오는 경계를 피하게 되고, 잠이 오게 됩니다.
허리는 세우되 몸과 마음의 힘을 빼고 고요하게 앉아 자기 가슴 가운데 깊은 곳에 자성의 부처를 찾으십시오. 아이가 엄마를 찾듯이 지극하게 간절하게 부처님을 찾으세요.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듯이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내 근본, 내 뿌리를 믿는 것이 이 공부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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